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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 박정희는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유명한 독재자 중 한 명이지만, 질 낮은 전두환이나 노태우와는 조금 다른..
뭔가 그래도 막 독재자라고 까기만 조금 껄끄러운.. 그런 대통령이었다.
그러다가 중3 때 구입한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엄청난 애독자가 되고,
먼나라 이웃나라의 한국 편에서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인식은 급 좋아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전교에서 한 자리수의 순위권을 다투었던 나는 엘리트주의에 경도되어 있었고..
플라톤의 철인정치, 엘리트정치에 공감하고 있었고..
이문열의 삼국지를 재밌게 읽으면서 도덕적이고 유순하고 무능력한 유비보다는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고 기회주의적이고 속물적인...
그래서 .. 결국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되는 조조라는 인물에 훨씬 매력을 느끼고 조조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던 아이였다.
그 무렵 내가 가장 자주 갔던 인터넷의 카페는 '87의 공부세상'이라는 카페였다.
나는 그 카페의 토론게시판에서 시간날 때마다 열심히 토론을 하는 열혈 논객이었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토론글이 올라왔다.
나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읽은 글을 토대로 하여 박정희 옹호론을 열심히 펼쳤다.
내 머리속에 있는 박정희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카리스마 있는 대통령이었고, 경부고속도로라는 위업을 달성하였고, 잿더미의 한국을 일으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신화의 주인공이었으며, 다른 독재자들에 비하여 치부도 거의 하지 않은..
한 마디로 애국심과 선견지명, 카리스마를 가지고서 정말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죽었지만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러나 후대의 역사는 결국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기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엄격하고 카리스마 있는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의 지도자였다.
학급의 담임선생님으로 치자면,
좀 무섭고 엄격하여서 공부하기 싫어하고 게으른 아이들은 무지 싫어하지만..
아주 실력 있고 카리스마 있게 학급을 이끌어서 꼴등인 반조차 언제나 1등으로 만들어 버리는 ..
아이들이 나중에 뒤돌아 본 후 생각하면, "아.. 그 선생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선생님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17살의 나는 87의 공부세상에서 죽도록 박정희를 위해 싸웠다.
위대한 지도자를 어리석은 아이들이 몰라봐 주는 것이 억울했다.
나는 박정희의 유명한 업적들- 한강의 기적과 포스코 건설, 경부고속도로 등을 열거하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인터넷을 뒤지면서 논쟁을 했다.
나중에는 박정희 기념사업회였던가.. 하는 그런 단체의 홈페이지까지 뒤지면서 박정희에 대한 옹호근거를 찾았다.
그런데..
토론을 하면서 찾다보니... 좀 이상했다.
박정희에 대한 내가 몰랐던 부분들을 자꾸만 알게 되었다.
박정희가 친일파 친일 장교였다니....??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친일파 이완용과 같은 놈이였다니...??
게다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까지 하다니...? (그러고보니, 몇 년 전에는 박정희가 일제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쓴 혈서도 발견되어서 뉴스가 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역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기에..
박정희가 일제시대라는 그런 암흑기의 역사에서도 한국인으로서는 일본군 장교가 될 만큼 열심히 공부를 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그의 성공을 향한 강한 집념과 더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르는 의지에 더 공감했고, 그를 이해하려 했다.
오죽 그를 이해하려고 했으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실소가 나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이를테면, '박정희도 좋아서 만주의 독립군을 토벌했던 건 아니고요, 만주에서 은근히 속으로는 독립군의 편에 섰대요. 독립군의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했다던걸요.' => 박정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적혀 있던 말이었다..ㅋㅋ)
박정희의 경제성장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엄청난 착취에 기반을 하였던 것이며 빈부격차를 확대하였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몰고 왔다는 상대방의 논리에 대해서는..(지금 생각하면 그때 토론게시판에서 나와 논쟁을 벌였던 아이.. 고1치고는 제법 지식이 많았던 것 같다.)
경제성장이 있을 때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인 것이며, 빈부격차가 좀 확대되고 착취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때 논쟁은 그냥 그렇게 서로 자기 주장만 하다가 끝났다..
그 후, 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한국의 근현대역사에 대해서 기술한 책들을 열심히 도서관에서 찾아 읽어 보았다....
그런데 박정희는 무슨 양파처럼...
너무나 많은 새로운 면모를 나에게 보여주었고... 내가 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점점 산산조각이 났다.
그냥 좀 무섭고 엄격하고..학생들이 자신에게 대들면 가혹하게 때리는 선생님.. 정도의 이미지였던 그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말대답을 하거나, 자신에 대해서 뒷담을 하는 아이를 알게 되면, 그날밤 뒷골목으로 끌고 가서 그를 죽이고 난 후, 다음날 반의 학생들에게는 "A군이 불행하게도 어제밤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라는 소름끼치는 거짓말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먼저 그는 정계에 나타난 과정부터가 소름끼치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일제 시기에는 친일파 장교로 활동하며 독립군을 고문시키고 죽였고..
6.25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빨갱이가 되었다.
그래서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빨갱이의 우두머리로서 남한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공산당의 수괴가 된다.
그러나 붙잡히게 되자, 바로 전향...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의 이름을 모두 팔아 그들을 몰살시키고 홀로 생존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처음 시작이자 꽃이 되었던, 거룩한 '4.19 혁명'....
고귀한 희생정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젊은 학생들이 피와 죽음으로써 일으킨 그 혁명을...
단 하루 아침에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로 짓밟아 버리고, 합법적인 정부였던 장면내각이 채 정책을 펴보기도 전에 무능하다는 낙인을 찍고 장면내각을 전복시켰다.
마치 쓰레기통 위에 기적처럼 피어오른 꽃과도 같았던.. 4.19 혁명이라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그는 그렇게 뿌리 뽑아버렸다.
그렇게 쿠데타로 집권한 뒤, 그는 장기집권과 쿠데타에 대한 명분 형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성장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경제성장..
그것은 그의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시키고, 정당성과 명분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자신의 정부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한국의 50년 식민지배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단돈 3억 달러에 깨끗하게 청산하는 굴욕적인 협상을 일본과 맺었고.. (장면 정부는 23억달러를 요구했었고 일본이 이를 거절하여 회담이 결렬된 바 있었다.)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침략적, 야만적 전쟁에 우리 군인들을 대량으로 파견하여 그들의 상당수를 고엽제라는 후유증에 걸리게 만드는 대신, 베트남의 골수까지 미국과 함께 빨아먹으며 경제적 이익을 뽑아내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역사 중의 하나라고 한다. 박정희가 베트남 전쟁에 용병을 파견했던 일은, 도의적으로는 잘못되었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기는 하다. 어쨌든.. 박정희가 떳떳하지 못한 전쟁으로 돈을 벌었던 것은 사실이다.)
노동쟁의를 철저하게 억압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어 간다.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사실 그 착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에 대해서 한번도 깊이 고민해보거나, 구체적인 사례들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그러한 일들이 "지금의 잘 사는 한국"을 위해 필연적인 과정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조사했던 바와 당시 노동자들의 한맺히고 피맺힌 절규의 기록은...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깜깜하고 밀폐된 공장에서 시력이 멀고 결핵에 걸리고 호흡기 질환에 걸리고 손발이 사고로 짤려나가도 단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발이 부르토도록 일하고 하루에 14시간이 넘는 엄청난 노동 시간 속에서도 단 30분의 점심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월급은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받았으며, 노동법에 적혀 있는 최저임금규정이라든가 노동시간의 제한은 먼 달나라의 이야기였다.
'법에 지켜진 대로만'.. 제발 노동조건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군화로 짓밟혔고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지금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지금의 나를 밥 잘먹고 등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라며, 그때 그 사람들을 그렇게 착취하고 억압하고. .마치 가축처럼 학대했던 그러한 역사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시각이 아닐까?
게다가 그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하고 난 후에도, 회사가 발전하고 난 뒤에도, 그 결실을 누리지도 못하고, 늙었다고 버려지고 해고당하였고, 피눈물나는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의 대가는 공장 주인들에게만 고스란히 돌아갔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2때 내가 읽었던, '전태일 평전'의 분신 장면.. . 박정희 대통령에게 노동자들의 피눈물나는 현장의 모습을 구구절절하게 편지로 썼던 그가.. 최후에 선택했던 방법은 자신의 몸에 기름을 두르고 불태우는 것이었다.
전태일과 그의 여동생과 친구들이 겪었던 엄청나게 가혹한 착취를 한번이라도 자세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 그 당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튼 박정희는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성장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한 편..
장기적인 집권을 위해 또한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한다.
그가 행했던 또 하나의 비열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 있다....
국제 인권위원회인 엠네스티가 '사법 암흑의 날'을 규정하게 된 계기가 된 사법살인사건...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정부에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던 대학생들과 언론인들, 교사들 등을 모아 그들을 간첩으로 날조하여 사형판결18시간만에 사형을 집행하였던... 한국 사법계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이다.
인민혁명당 사건(人民革命黨 事件, 영어: People's Revolutionary Party Incident) 또는 인혁당 사건(人革黨 事件)
http://ko.wikipedia.org/wiki/%EB%AF%BC%EC%B2%AD%ED%95%99%EB%A0%A8
이 외에도 그가 저지른 만행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멀쩡한 대학생들의 사회과학 학회를 간첩단으로 몰아서 죽인 민청학련 사건..
이들 역시 사형선고 받고 바로 처형당했다. (후에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가 증거들을 날조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오일쇼크 등으로 인해 경제적 성과도 좋지 않아 카리스마와 지지를 잃어갈 무렵..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게서 간신히 이긴다.
아래는 위키백과사전의 내용...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선거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를 했었고..
나름대로 박정희가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확신을 가졌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대도시이던 서울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였고 부산에서도 접전을 벌인 반면, 경상북도와 지방 도를 중심으로는 박정희 후보가 다수의 득표를 하였다. 정부여당과 인구가 많은 영남의 적극적 지지를 배경으로 한 박정희 후보는 6,342,828표로 김대중 후보의 5,395,900표보다 946,928표를 더 확보하였다.
하지만, 야당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본인의 투표를 포함하여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투표가 선관위 관계자의 확인이 없다는 이유로 통째로 무효처리된 사례를 회고하였다. 야당의 이러한 의혹과 관권선거 주장 논란과 더불어, 표차가 제6대 대통령 선거 보다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제5대 선거에 비해 표차가 컸음에도 박정희 정부로서는 더이상 현행 헌법으로는 장기집권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의 임기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는 얼마 뒤 치러진 제8대 총선에서 신민당이 개헌저지선(204석 가운데 69석이 개헌저지선이며, 실제로 확보한 의석은 89석)보다 많은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더욱 확실해진다.
특히 영남의 박정희와 호남의 김대중이 격돌하는 대선의 특성상 선거 운동 과정에서 지역감정 선동이 극심했는데, 김대중은 호남 소외론을 내세워 당시 상황적으로 발전이 더디던 호남 지역의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선동 등에 의하여 영남의 ‘지역감정적 투표 행태’가 더욱 극심해졌다. 박정희 측에서는 "신라 대통령론"과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영남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도 나타났다.
헌법상의 마지막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는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단행하지만, 얼마 후 "그동안 진행해오던 국책사업의 안정적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안정적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성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신대통령제적 헌법으로 삼권분립을 파괴하고 견제장치를 모두 제거한 반민주적 헌법이었으며, 이에 자연히 야당과 재야 정치 세력의 강력한 비판과 저항을 받게되었다.
부정선거의 의혹 속에서도 간신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그후,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유신'이라는 초헌법적인 법을 만들어 3권분립과 헌법을 싸그리 무시하고 만다.
이 유신이라는 헌법이 얼마나 유치할 정도로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면서 대통령을 황제와도 같이 만들어 주었는지는, 나중에 법과사회를 선택과목으로 접하면서 자세하게 그 조항들을 알게 되었고...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알게 되자 정말 어이를 상실했더랬다.
유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대통령 직선제의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 선거.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도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 부여.
국회 해산권 및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하여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장.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 가능
이 유신을 감행하기 직전, 대통령 선거에서 "이번에 한번만 마지막으로 뽑아주면, 정말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라는 악어의 눈물을 흘렸던 그의 발언과 거짓말이 역겨울 따름이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엄청난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하자 차 사고로 그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평생 절름발이로 만드는 데 그쳤다.
김대중 납치사건 :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B%8C%80%EC%A4%91_%EB%82%A9%EC%B9%98%EC%82%AC%EA%B1%B4
또한 유신에 반대하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를 모두 '피'로 짓밟았고, 학교에는 사복을 입은 경찰들을 심어 학생들을 감시하고 사찰하고, 비판을 하는 언론인과 교수들과 교사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가 고문하였다.
유신 독재 정권 기간
10년 동안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 침해(필화사건)에 대한 양심수의 총수는 2,704명(그 중 1,184명은 구류)으로 매년 270명 내외가 유신체제의 제물이 되었다. 여기에 훈방 조처나 수사과정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의 숫자를 포함하자면 유신체제의 희생자와 인권 유린사례를 고려하면 그 수는 대폭 늘 것이다.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 해도 모두 1천 2백 4명에 달한다. 여기에 일반 범죄사범이나 우리 사회에서 경찰 등에 의해 행해진 공공연한 인권유린사례를 포함하자면 통계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박정희정권은 다양한 관제행사에 국민, 특히 지식인을 동원해 체제 찬양을 강요했다. 저항이 아니라 침묵할 자유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정권의 인권유린은 체제 도전에 대한 방어적 성격을 넘어 유신을 위해 순교를 강요하는 공격적 인권유린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정권의 인권탄압은 고문과 폭력, 특히 고문을 통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고문은 "'법과 폭력'이란 상반된 제도와 힘의 야합"이 만들어 낸 것으로, 고문은 고문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고문하는 사람까지 인간성을 파괴시킨다.
5세기 경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문 폐지를 주장하면서 고문당하는 사람은 "그가 범죄를 저질렀기 대문이 아니라 범행 여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고문의 괴로움을 당한다"고 고문의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고문을 당해서 죽는 경우 이는 사형선고를 받지 않고도 사형되는 셈이며, 그가 정말 죄인인지 아닌지 그 누구도 알 지 못한 채 죽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박정희시기 자행된 고문은 보다 적극적이고 잔혹한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유신시대의 고문은 범죄 사실을 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만들기 위해 권력자와 그 하수인의 의도대로 각본을 짜기 위한 강제도구로 작용했다. 여기에는 일제시기의 고문기술과 한 사회가 이룩해놓은 과학.기술까지 총동원되었으며, 국가공무원이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국가의 범죄였다. 아울러 고문에 대한 공포를 사회에 만연시켜 "저항하는 자에게는 고문이"이라는 극도의 공포감을 확산했다. 고문은 피해당사자를 포함해 익명의 국민 개개인 또한 폭력 앞에 떨어야하는 동물적 존재로 만들려고 기도했다.
고문의 방법도 극악해 물고문, 전기고문, 수면방해, 구타, 천장에 거구로 매달기,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넣어 비틀기, 겨울에 옷을 발가벗기고 찬물에 집어넣기, 불이나 담배불로 지지기, 비녀꽂기, 통닭구이, 강간.윤간.기타 성고문, 물속에 머리 처박기,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기, 원산폭격, 빈대붙기, 칠성판에 묶고 구타하기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적 사건들 경우에는 고문문제가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범죄, 그리고 이른바 공안사건의 경우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알려지더라도 인권의 범주에서 제외되는 "인권의 불평등" 현상이 두드러졌다
오죽하면, 당시 중앙정보부 최고 지위에 있던 김재규가 그를 암살하였을까.. 김재규는 박정희가 시위대를 모두 학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
-김재규의 최후변론 중
이렇게 박정희에 대해서 자세한 역사를 알면 알 수록...
나는 그에 대한 나의 이미지를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수많은 한국근현대 역사 책들과 당시 사건 당사자들의 기록들을 읽고 난 후, 내게 있어서.. 박정희라는 인물은..
권력욕에 눈이 먼 탐욕스럽고 비열한 한 마리의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은폐와 왜곡, 날조로 얼룩진 비열하고 구역질 나는 역사의 피묻은 페이지들을 '경제성장'이라는 탈취제로 억지로 가리려고 애쓰는 기회주의자였고 냉혈한 독재자였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의 경제성장의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해야 하는 한 부분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학교에 들어온 후, 깨지게 되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2007년.. 학교 커뮤니티 고파스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또다시 벌어졌다.
그때, 한 경제학과 학생이 아주 구체적인 통계자료들을 들이대면서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에 대해서 비판을 했다.
그는 자신의 과 교수님들 중에는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에 대해 회의적인 분들이 많으며, 오히려 더 발전할 수 있던 것을 그때문에 못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과 학회에서 여는 세미나에서도 토론을 하다보면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댓글에 많은 경제학과 학생들이 또 동의의 댓글을 달면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었다.
아무튼 그때 나는, 박정희의 그 위대하고 거룩하기 짝이 없는...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의 한 부분이었던 경제성장에 대한 업적마저도..
전문가와 학계에 있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 공존하는 '논란이 있는 사항'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고... 독재를 하지 않았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나, 일본도 우리 만큼의 경제성장을 일구었음을 알게 되었다.
박정희 재임 당시 동아시아 평균성장률을 보면, 일본 : 10.5%, 싱가포르 : 10.1%, 마카오 : 10%, 대만 : 9.8%, 홍콩 : 8.6%, 한국 : 8.5% 순이었고, 중국조차 7-8퍼센트의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게다가 당시는 초저유가 시대, 일본의 급속한 성장, 노동집약적 산업기지 필요성, 공산국가 중국과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를 배경에 깔고 있었고, 당시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약진을 하고 있었음에도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 고작 8.5% 이루면서 '물가는 평균 16.5%씩 폭등했다. (한국무역협회: http://stat.kita.net/top/state/n_submain_stat_kita.jsp?menuId=05&subUrl=n_default-test_kita.jsp%3Flang_gbn%3D^statid=dots&top_menu_id=db11)
"박정희의 마지막 해인 1979년 GNP는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경상수지는 사상최악인 41억5천만 달러의 적자를 냈고, 기름재고는 7일분 밖에 남지 않았고, 소비자 물가상승도 18.3%나 뛰었고, 외환보유고도 바닥이 났다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고 초기에 박정희가 초능력을 발휘하여 단숨에 뭔가를 이루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전혀 아니다. 경제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특히 박정희 정권 초기 5년간은 4대의혹사건 등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는 경제가 특별히 달라진 없었다. 1960년~1964년의 연평균 GNP성장률은 5.5%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비슷한 상황이었던 중국은 7.5-10%, 베트남도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박정희의 경제가 좋아진 것은 60년대 후반기에 한일협정으로 돈(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이 들어오고 베트남전쟁에 따른 특수로 10억달러 이상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다른 대통령들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도 없어도, 그리고 월남특수가 없어도 박정희 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루어 냈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5만 명이 이 5년간 받은 수당은 1억3,000만 달라였다. 당시(60년대) 외화보유고는 3억 달러에도 미달 했으므로 한국외환 보유고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숫자였고, 또한 한국 총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거였다"
- 강준만의 현대사 산책 중.
한국의 경제성장에 박정희의 공로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생각보다 박정희가 경제성장에 기여한 정도가 그렇게까지 절대적이고 유일한 동력은 아니니까 한번 자세히 더 조사해 보라고는 말하고 싶다.
나는 박정희를 존경하고 있는 그의 딸 박근혜가 참 싫다. 아니 역겹다.
당당하게 아버지가 기업에서 훔쳐낸 장물인 정수장확회를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움켜쥐고 있는 여자,
아버지가 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유신도, 고문도, 날조, 시위대에 대한 유혈탄압도 아닌 단지 '장발 단속'이었다고 말하는 여자..(당시 길거리에서 경찰들이 젊은이들 쫓아가서 머리 강제로 자르고 30cm 자 들고 다니면서 스커트 길이 재고 다녔던 일은 정말 세계에 유례가 없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긴 하지..)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
아버지의 경제성장만 역사의 페이지에서 남기고.. 모든 그의 독재와 만행들을 근현대사 교과서에서 지우려는 뉴라이트의 대표주자인 여자,
역사와 학계와 국민과 대한민국 헌법이 '쿠데타'로 규정하고 있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당당하게 '혁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여자..
이 따위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파렴치한 그 여자가.. 매우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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