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이번 시간에는 유시민에 대해서 다뤄볼꺼야.
유시민은 그의 경력과 과거를 살펴보면
결코 '조연'이 아니지만
무너져버린 열린우리당과 여러가지 논란으로 힘을 잃어버린 통합진보당의
역사를 보면 그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진게 아닐까 싶어
어찌됐건! 이번시간은 유시민!
그는 1980년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회장이 되었어
그가 서울대에 재학중이던 1980년동는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뜨거울 때였어
(위 5.15 서울역 시위)
그자리에는 이수성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전 국무총리, 전 대학총장)과
심재철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현 새누리당 최고의원)도 있었어
(왼쪽 심재철 전 대학총장, 오른쪽 심재철 새누리당 최고의원)
계엄해제와 신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던 시위대는 이수성의 설득과
심재철이 협상을 통해 얻어낸 학생들의 안전귀가 약속을 받고 시위대를 해체 하게 되 이 시위대 해체를 '서울역 회군'이라 불렀다고 해
하지만 협상과 달리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내렸어
(위 신계륜 현 민주통합당 위원장)
이때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인 신계륜을 중심으로 유시민은
서울역 회군 반대파에 가담하게 되
하지만 신재철 중심의 회군파의 의견이 더 강했기에 시위대는 철수를 했다고 해
철수를 한 이후로도 그는 학생운동을 계속 하게 되는데
(위 1985 서울대 프락치사건 당시의 유시민)
그는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을 선고받게 되
서울대 프락치 사건은
신군부가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폭행, 고문을 받은 사건을 말해
여기에 유시민은 항소 제 5부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하고
운동권, 민주,진보세력에게 필독해야할 문서로 여겨지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그가 유명세를 타는 계기가 되
(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실려잇는 유시민의 <아침으로 가는길>)
이 이후로 수배중의 몸이던 유시민은 유지수란 가명으로 활동을 하게 되
유지수란 이름으로 활동을 하던 유시민은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 <신용비어천가>등 드라마의 각본을 쓰기도 해
(위 <그것은우리도모른다>의 극본 유지수(유시민) )
1990년대 후반에는 그는 언론인으로 활동했어
97년대선게임의법칙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햇고
2000~2002년에는 100분 토론의 MC로 활동하기도 했어
(왼쪽 <97년대선게임의법칙> 오른쪽 <100분토론>)
2002년에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생각을 해
그는 뜻이 맞는 40여명과 함께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하게 되
(위 개혁국민정당의 로고)
그는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강제적 주입이다"라는 발언과 함께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어
2003년 4월 보궐선거에 그는 16대 국회에 진입하지만
2003년 11월 개혁국민정당은 열린우리당에 통합되고 말아
(위 열린우리당 로고)
2003년 그가 국회의원일 당시의 이슈는 '이라크 파병 문제였어'
그는 두번 이 건안에 반대를 하지만
'대통령이 욕먹을때는 같이 먹고 비맞을 때는 같이 맞아야한다'는 논리로
진보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라크 파병 동의안'에 서명을 하게 되
(왼쪽 이라크파병동의안 회의 모습(안상수 등) 오른쪽 이라크파병부대)
2004년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승리가 확실시 되자
투표 문제로 민주노동당과 갈등을 빚기도 하고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라는 발언을 하는등
독설로 유명해짐과 함께 타 정당과 갈등을 많이 빚기도 했어
(위 대연정을 제안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하지만 그는 한나라당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하자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서는 대연정이 불가피하다'라는 논리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의견을 따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
2007년 열린우리당의 분당 사태에 "이후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은 99%"란 발언을 하고 그 책임을 공천구조에 물으면서 범여권과 갈등을 빚기도 했어
(왼쪽 <대한민국개조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전에 출간했다)
(오른쪽 이해찬 전 국무총리)
그는 2007년 보건복지부장관직을 내려놓고
17대 대통령선거에 공식입후보 하지만
지지율이 낮았던 유시민은 이해찬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고 후보 사퇴를 하게 되
2007년 열린우리당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통합이 되
이때 유시민은
"우리당의 꿈을 접어 가슴 속에 담고 가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
"의석수가 143개나 될 거대한 민주신당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커다란 종이와 같다. 우리가 뜻을 모아 우리당 꿈을 함께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발언을 하면서 통합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여줘
(위 대통합민주신당의 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그는 대통합민주신당을 탈퇴하게 되
그는 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은 진보세력이 클수 없다고 주장하며
진보정당의 창당 구상을 하게 되
하지만 그는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주호영의원에게 패하게 되
(위 주호영 새누리당 국회의원, 전 특임장관)
그는 총선에서 패한 이후에도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계속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게 되
2009년 11월 그는 국민참여당에 입당하게 되
그는 이과정에서 경기도지사 민선의 후보로 나가게 되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후보와 단일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희호(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을 찾아가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거에 대해서 사과를 표명하기도 해
하지만 그는 2010년 6월 민선에서 김문수 후보에게 4%의 적은 표차로 낙선하게 되
(위 김문수 경기도지사)
경기도지사를 뺐긴 유시민은 국민참여당의 원내진입을 위해
경남 김해을 재보궐 선거를 노리게 되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이였던 문재인의 중재로 단일화에 성공하게 되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 (현 18대 대선 후보))
하지만 야권단일화에도 불구하고 재보궐 선거에서 패함으로써
그의 원내진입의 꿈은 좌절되고 말아
결국 그는 이정희, 심상정, 노회찬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하게 되
(왼쪽 이정희 중앙 심상정 오른쪽 노회찬)
(아래 통합진보당 로고)
하지만 이석기 의원의 종북의혹, 애국가 논란
통합진보당 내 경선과정에서의 각종 비리 문제 등으로
통합진보당이 갖은 비난을 받자
노회찬 등과 탈당을 선언하고
새진보정당추진회의를 이끌어가게 되
(위 새진보정당추진회의 로고)
민주화 운동을 통해
한국 정치계의 큰인물로 부상했던 유시민
노무현 전대통령의 오른팔로써
그의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서 노무현의 정책을 지지하는
충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유시민
여러번의 탈당과 야권단일화에도 불구하고 여러번 낙선했던 유시민
야권의 통합을 위해 통합진보당을 창당했지만 여러 문제로 무너지자
탈당을 해버린 유시민
그는 그가 원하는 '아침'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그가 꿈꾸는 진보는 과연 이번 대선에서 찾을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