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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와 관련한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다 보면 특히 교통사고와 관련해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보는데요, 비 소식이 들려오는 오늘 같은 날이면 도로 어딘가에서 사고로 고통에 신음하는 분이 계시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저는 중학생 시절,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중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차가 크게 흔들리며 도로 바깥쪽 산기슭에 부딪혔는데, 창문을 깨고 나와서 확인하니 바로 10m 앞이 낭떠러지였습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그때 맨 뒷자리에 탔던 친구는 앞으로 고꾸라진 데다 하필 머리 위로 오디오 시설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많이 다쳤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비 불량으로 조향 장치가 고장 나 핸들 조작에 문제가 생기자 운전사 아저씨께서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 일부러 낭떠러지가 나타나기 전에 산기슭 쪽으로 방향을 튼 거라고 하더군요. 그때 교통사고의 위험성을 크게 느꼈습니다.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가 지나고 장마가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장대비가 오는 장마에는 응급실 환자가 줄어듭니다. 아무래도 극심한 통증이 아니고서야 밤에 빗길을 뚫고 응급실에 오기는 부담이 돼서 그럴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은 평소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가 오면 교통사고 환자는 더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약한 빗방울이 내리면 접촉사고가 늘어 목을 잡고 오는 환자들이 생기다가, 폭포 같은 비가 쏟아지면 중한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응급실 의료진은 벌집 쑤신 듯한 혼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실습 나온 의대생들과 응급구조과 학생들도 모두 귀가하고 저를 포함한 당직의 세 명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응급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응급실이죠? 응급차량 좀 보내 줄 수 있어요?
종종 병원 앰뷸런스가 119처럼 환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는 줄 알고 문의하는 경우가 있어 환자의 보호자 되시냐고 묻자 뜻밖에도 119 상황실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사고가 났는데 119 차량이 모자라서요."
일단 원무과로 전화를 돌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 웬만한 대형사고가 아니고서야 119 앰뷸런스가 모자랄 일은 없을 텐데 이상하다 싶어 미리 소생실을 준비할 것을 지시하고, 만약을 대비해 팀을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다른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119 대원이 들어오기에 혹시 근처에서 큰 사고 난 것이 있냐고 물었지만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급한 무전이 들어오긴 했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CPR요!
아니나 다를까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고, 곧이어 119 대원이 환자를 싣고 뛰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먼저 들어온 첫 번째 환자는 50대 남자로, 안면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얼굴 부위가 적갈색으로 변색, 심하게 부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외상성 질식(강한 가슴 압박이나 순간적인 타격으로 순환이 되지 않는 상태)을 시사하는 소견이었습니다. 심박동이 전혀 없어 심폐소생술을 이어 갔고 얼굴에 붓기가 심해 기도가 보이지 않아 기관 삽관에 어려움을 겪던 중 다음 환자가 도착해 옆방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추가 환자를 대비해 내려와 있던 4년차 선배와 병동, 중환자실 주치의가 두 번째 환자를 맡았습니다. 두 번째 환자는 젊은 남자로, 밖으로 보이는 출혈은 없었지만 혈색이 창백하고 심박동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일단 첫 번째 환자의 기도를 어렵게 확보해 놓고 다시 진찰해 보니 양쪽 갈비뼈 골절이 여럿 만져졌습니다. 간호사를 통해 흉관 삽입을 준비하도록 해 놓고 1년차 후배에게 심폐소생술을 지속하도록 맡긴 뒤 두 번째 환자의 상태를 보러 옆방으로 가려는데 119 대원과 함께 환자 한 명이 더 실려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의료진 인력이 외상에 의한 심폐소생술 세 건을 한꺼번에 시행할 수는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원래 이런 상황이 예견되었다면 미리 심정지 환자 중 살릴 가능성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를 가려내는 환자분류(triage)를 했어야 하지만, 우리에겐 환자 수에 대한 정보가 없었습니다. 양쪽 방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사이 한 명이 더 추가되었고 게다가 뒤에 추가 환자가 더 있다는 119 대원의 말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1번 방 CPR 그만합시다.
1, 2년차들은 모두 여기에서 나가서
지금 새로 온 환자 밖에 있으니까 거기 도와줘!
결국 외상성 질식에 양쪽 흉부가 완전히 부서져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첫 번째 환자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소생실 부족으로 일반 중증환자가 누워 있는 응급실 중환자 공간에서 심폐소생술을 시작한 세 번째 환자도 아직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젋은이. 귀에서 출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개골절, 뇌출혈이 의심되었고 심박동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두 번째 환자를 보던 4년차 선배가 먼저 나와서 환자를 데려온 119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세 번째 환자에 의료진을 배치한 저는 다시 두 번째 환자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소생실로 들어갔습니다. 심전도에 신호가 있어 잠시 손을 떼어 보도록 하니 심실세동(심장이 부르르 떠는 상태)의 심전도가 나타났습니다.
"CPR 하고 있어. 쇽 하자."
제세동을 한차례 시행하고 다시 소생술을 지속하던 중 밖에서 4년차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석재야! 2번 방 그 환자 오른쪽에 먼저 튜브 넣어!
첫 번째 환자를 위해 준비되었던 흉관 세트, 결국 첫 번째 환자가 아닌 다른 환자에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한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 갔지만,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세트를 옆방으로 끌고 와 응급 흉관 삽입술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부서진 갈비뼈 사이로 작은 절개선을 넣고 굵은 튜브를 넣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적갈색의 피, 한눈에도 양이 적지 않겠다 싶었는데 튜브를 고정하는 그 짧은 사이 1L짜리 배액통은 벌써 반 이상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여기 보틀 좀 바꿔 주세요!"
배액통을 바꾸고 나서도 심폐소생술을 하는 압박 그대로 심장에서 짜내듯 혈류가 뿜어져 나와 두 번째 통까지 바로 차 버렸습니다. 아직 접수도 되지 않아 응급수혈 요청도 못한 상태. 피가 준비되려면 적어도 20분은 있어야 하는데, 이건 버틸 수 있는 출혈 속도가 아니었습니다.
대안으로 사용하는 혈장증량제를 다량 주입하도록 하고 어쩔 수 없이 튜브는 잠가야만 했습니다. 빠져나오는 속도를 그나마 늦춰 볼 수 있는 방법은 튜브를 잠가 버리는 것뿐... 심실빈맥이 한차례 지나간 환자의 심전도는 이후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흉강 내 출혈을 확인했지만 심실빈맥이 한차례 있었고 워낙 젊은 환자라 좀 더 소생술을 시행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환자들을 확인해야 할 때...
세 건의 심정지 환자에 의료진이 붙어 있는 사이, 외상 처치실에 환자 두 명이 더 들어와 있다는 얘기가 들렸습니다. 둘 다 젊은 환자였는데, 첫 번째 환자는 다리 골절만 의심되었고, 두 번째 환자는 얼굴에 여러 상처가 있고 자신이 오토바이 운전을 했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머리 안쪽에 출혈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라 서둘러 CT 검사를 의뢰해 놓고 사고 경위를 알기 위해 경찰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응급실을 방문한 경찰도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워낙 심한 빗길에서 일어난 사고라 현장의 목격자가 확보되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나마 정신이 가장 멀쩡한 외상처치실의 첫 번째 환자로부터 경찰이 얻어 낸 정보는 네 명의 10대 청소년들이 탄 승용차와 마주 오던 택시가 부딪쳐 사고가 났다는 것.
먼저 심정지 상태로 왔던 두 명의 젊은이가 운전석과 조수석 탑승자, 마지막으로 도착한 외상 처치실의 두 명이 뒷좌석 탑승자였던 모양입니다. 또 한 명의 심정지 상태로 온 50대 남자는 택시 승객이며, 택시 운전사는 그나마 상태가 가장 경미하여 거리가 먼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비 오는 한밤중 함께한 모험의 결과는 엄청난 후폭풍으로 돌아왔습니다. 초기에 심정지 상태로 들어왔던 세 명은 결국 사망 선언을 해야만 했습니다.
잠시 후, 한 어머니가 응급실에 도착해서는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고 집에서 나가는 걸 봤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울부짖었습니다. 다른 보호자들도 연락을 받고 속속 도착, 응급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와 아들들을 잃고 응급실에서 오열하는 부모님들의 눈물이 겹쳐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외상환자의 치료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최근 보건복지부에서는 몇몇 대형병원에 중증외상센터를 지정해서 치료에 촌각을 다투는 외상환자를 따로 관리하고 예방 가능한 사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응급의학과와 각 외과계열 교수님들이 한데 모여 팀을 구성해 중증외상의 기준에만 들어가면 기존에 있던 수련의와 전공의를 통한 진료 등의 중간 순서를 모두 건너뛰고 바로 수술을 결정해서 환자를 살려 내자는 취지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전공의였던 시절에는 이런 외상환자에 대한 특별대우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지금처럼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진들이 함께 상의해서 빨리 수술 결정을 내려주었다면 몇몇 환자들의 생과 사의 갈림길은 달라졌을 겁니다. 어쨌든 지금은 많이 좋아졌고, 그 말은 곧 앞으로도 점점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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