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은 프로이트는 그가 제시한 문제를 두 가지로 분류하여 대답합니다.
첫째는, 정의와 힘의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계평화라는 정의를 위한 초국가적 기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실질적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정의와 힘'이라는 표현을 정의와 폭력이라고 바꾸어도 별 지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정의와 폭력은 언뜻 배치되는 듯 보이지만 따지고보면 정의는 폭력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계 전체에서 이해관계의 대립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태초의 소규모 인간 집단에서 발생한 분쟁의 해결책은 분명 '근육의 힘'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엔가 인간은 근육을 대체하여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제 갈등의 해결은 근육의 힘이 아니라 성능이 좋은 무기의 소유가 되고 그러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지성의 힘이 근육을 대체합니다.
폭력적인 근육의 대결에서 다소 문명화되어 보이는 지성의 대결로 양상이 바뀌었지만 이때의 지성은 그저 폭력의 연장이기에 실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여전히 인간 사회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다 소위 정의와 법이 발생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근육의 힘이 우월하거나 좋은 성능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지성이 뛰어난 소수의 폭력에 대항한 다수의 단결이 그것입니다.
다수는 단결했고 공동체의 정의 그리고 법을 규정해 폭력적인 소수를 압박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정의는 한편으로 폭력적인 개인에 대한 규제 뿐 아니라 공동체의 법에 저항하는 개인에 대한 폭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쯤은 용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정의나 법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정의와 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힘의 양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폭력적인 소수에 대항한 다수의 약자들 사이에도 역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정의란 다수 약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등한 힘의 또다른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정의란 폭력이 개인에게 소속되어 있는지 다수에게 소속되어 있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이유로 정의가 폭력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의 폭력을 규제하기 위한 정의도 역시 폭력이기 때문에 뭐 어쩌자는 것일까요?
프로이트는 두 번째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층에 존재하는 증오와 파괴에 대한 본능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 파괴 본능의 변화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지적에 주목합니다.
정신분석이 발견한 인간의 본능은 두 가지 뿐입니다.
보존과 통합을 추구하는 생명충동, 즉 에로스적 본능과 파괴와 공격을 추구하는 죽음 본능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생명과 죽음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양자의 본능이 분리되면 그 어떤 본능도 작동할 수 없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정도의 공격성을 지녀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일정정도의 지배욕이 필요합니다.
생명충동과 죽음충동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부정하면 안된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합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폭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생명일 필수적인 만큼 죽음도 유기체에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양자를 분리시키면 양자는 작동을 멈춥니다.
따라서 인간이 지닌 파괴와 증오의 본능은 제거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전쟁 역시 제거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1차 대전 이후 이런 주장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입니다.
참호가 도입되고, 독가스가 살포되었으며, 최초로 탱크와 잠수함 그리고 전투기가 배치된 전쟁,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대규모 유혈 전쟁 이후 이런 식의 주장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힘을 주어 주장합니다.
"우리가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지만 전쟁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1차 대전 이후 다수의 사람들은 폭력을 지상에서 몰아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몰아낼 수 없는 것을 의지로 몰아내려고 할 때 무슨일이 생길까요?
인간이 원천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파괴와 증오에 대한 본능이 은폐되거나 억압될 뿐입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며 더 잔인한 형태로 회귀합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폭력성을 억지로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정확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쟁이나 폭력을 제거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 원리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는 태도가 요청됩니다.
우리는 폭력에 대한 열망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열망을 변형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변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봐야 합니다.
프로이트는 1차 대전 발발 직후인 1915년에 쓴 논문에서 자신의 심리학적 진실을 피하려는 문명인의 태도를 지적하며 그것이 야기할 더 큰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3편에 계속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