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번역:
http://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news&wr_id=1697149 클리앙 paranal님이 NYT매거진을 번역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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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매거진에 현재 애플과 구글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프레드 포겔슈타인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에는 아이폰이 2007년 1월 맥월드에서 시연되기까지 참여한 많은 직원의 증언과 진행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였습니다.
* 이 글은 해당 기사 전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제가 일부를 발췌에 요약한 것입니다. 해당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의도치 않은 뉘앙스의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원문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당시 아이폰의 통신 부문 선임책임자였던 앤디 그리그논은 모스콘 센터에서 키노트 리허설을 할 때의 경험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리허설에서 90분간의 키노트 시연 중 버그 없이 한 번에 되는 경우가 없었다고 합니다. 잡스는 키노트를 위해 5일간 연습에 참여했지만 마지막 날까지도 아이폰은 무작위로 전화가 연결되지 않거나, 인터넷이 끊어지거나, 그냥 꺼져버리고는 했습니다.
"처음에는 리허설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좋았죠. 특권층이라도 된 기분이었죠. 하지만 금방 불편한 자리가 됐어요. 잡스가 완전히 격노한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어요. 그런 적도 있지만, 보통은 그는 당신을 그냥 쳐다보면서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당신은 내 회사를 **하고 있어' 라거나 '만약 실패하면, 다 당신 때문이야' 라고 말했죠. 그는 매우 열렬했죠. 항상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 준비과정 자체도 일급비밀이었습니다. 목요일부터 그 다음 주말까지 애플은 모스콘 센터를 완전히 임대했습니다. 백스테이지는 2.5x2.5m 크기의 실험실을 세워 아이폰을 테스트했고, 그 옆에는 잡스가 앉을 수 있는 소파를 비치한 대기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 앞과 건물 문에는 24시간 내내 수십명의 보안요원이 대기하며, 사람들은 전자 ID를 체크하고 잡스가 직접 승인한 출입자 목록과 대조하고 나서야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잡스는 유출에 매우 민감해 애플이 고용한 데모 시연자부터 무대 조명 관리자까지 발표일 전날에는 모두 모스콘 빌딩에서 숙박하게 했습니다. 2007년 당시 잡스가 직접 아이폰을 시연하는 것을 매우 큰 모험이었습니다. 아직 출시일까지 6개월이 남았지만 잡스는 제품을 직접 시연하고 싶어했는데, 아직 손대야 할 부분이 엄청나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생산 라인도 준비되지 않아 100여대의 아이폰만 존재했으며 모두 품질이 제각각이었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엄청난 버그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폰에서 음악이나 비디오 일부분은 잘 재생했지만 충돌 없이 전체를 안정적으로 재생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예로 이메일을 보내고 웹을 서핑하면 괜찮지만, 거꾸로 하면 안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아이폰 팀은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황금길" 이라 이름붙인 특정 조합을 개발해냈습니다. 하지만 그 경로를 따라도 정상적인 시연을 위해서는 그때그때 우회로를 발견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잡스는 데모 폰의 화면이 큰 화면에 그대로 뜨기를 바랐습니다. 대부분의 회사는 그런 효과를 위해 비디오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이는 잡스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애플 엔지니어는 아이폰 뒷면에 영상 출력을 위한 회로를 몇 주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결과 효과는 마술과 같았습니다. 잡스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쪽에 뜬 화면은 그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마치 직접 아이폰을 만지는 느낌이 들게 했죠. 또 아이폰의 와이파이가 너무 불안정해서 신호를 가까이서 잡을 수 있도록 안테나를 무대 뒤쪽까지 연장시켜야 했습니다. 또한 해당 주파수 간섭을 없애기 위해서 SSID를 숨기고 일본에서 사용하는 WiFi 주파수대역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셀룰러망의 경우 AT&T에서 이동식 셀타워를 가져다줬지만, 잡스의 허가 아래 소프트웨어적으로 무조건 수신바가 꽉 차게 뜨도록 소프트웨어를 바꿨습니다. 잡스가 통화를 할 때 셀룰러망이 죽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지만, 90분 시연 중에 망이 죽을 가능성은 높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메모리가 가득 차 여러 가지 작업을 하면 리셋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대의 기기를 준비해두어서 한 기기의 메모리가 부족해지면 리셋하는 동안 다른 기기를 사용하도록 설치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시행해야 하는 데모가 엄청나게 많았기 떄문에 그리그논은 충돌이 일어날 지점이 너무 많다는 걱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처음에 충돌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마지막에 잡스가 아이폰의 뛰어난 기능들을 선보일 때 죽을 가능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연에 그를 포함한 책임자들은 모두 걱정이 늘어졌습니다. "우리는 128MB의 메모리밖에 집어넣지 않았는데 아직 완성된 상황이 아니라 모든 앱이 너무나 크고 공간을 많이 차지했습니다" 잡스는 언제나 사람들을 밀어붙이면서도 예비 계획을 준비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애플은 아이폰만이 유일한 쿨한 물건이었습니다. "애플 TV 아니면 아이폰이었습니다. 만약 잡스가 맥월드에 애플 TV만 들고 나갔다면 사람들은 '저게 대체 뭐람?' 했을 겁니다." 잡스와 소수의 중역은 2001년 아이팟을 내놓은 이후로 계속해서 전화를 만들기 위한 토론을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는 분명합니다. 소비자는 한 가지만 들고 다닐 수 있다면 이메일 읽기, 전화, 음악용으로 여러 기기를 들고 다니지 않을 거라는 거죠. 하지만 그 생각을 깊이 파고들 때마다 자살행위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휴대전화용 칩셋이나 통신망 폭이 인터넷 서핑이나 음악 다운로드에는 너무나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메일 열람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그 시장은 [당시] RIM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잡스는 이동통신사와의 협력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통신사는 휴대전화 제작사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통제에 집착하는 잡스로서는 그런 계약을 하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2003년에는 모토로라 인수도 검토했으나 애플이 인수하기에는 너무 큰 회사라는 이유로 포기했습니다. 2004년 가을 즈음에는 통신사와 일하는 조건이 덜 번거로워졌습니다. [미국 통신사] Sprint는 통신망 대역을 판매하고 있었고 해당 통신망을 구입해 애플이 직접 MNVO 형태로 망을 운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잡스가 이사회에 들어가 있던 디즈니도 구입을 위해 접선하는 중이었고, 그는 애플도 그렇게 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습니다. 결국 애플은 싱귤러 (나중에 AT&T가 되는) 와 2006년부터 약 1년간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중역과 엔지니어는 휴대전화를 만드는 것이 작은 매킨토시를 만드는 것도 유사하리라 예상했습니다. 애플은 2005~06년에 세 종류의 다른 아이폰 프로토타입을 제작했습니다. 한 사람은 최대 6종류의 완전히 작동되는 프로토타입이 생산되었다고도 증언했습니다. 당시 프로젝트에 깊이 간여한 토니 파델은 당시 상황을 "첫 달 프로젝트"에 비유했습니다. "프로젝트에서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에는 익숙해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너무나 새로운 것이 많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잡스는 아이폰에 수정한 OS X를 얹고 싶어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큰 프로그램을 모바일 칩에 맞게 바꿔본 적이 없었습니다. 소프트웨어 크기를 1/10로 줄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수백만개의 코드를 바꿔써야 했으며, 2006년까지 실제 사용할 칩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속도와 배터리 수명은 시뮬레이션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또한 아무도 대량소비 디바이스에 멀티터치 스크린을 구현해보지 않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정전식 터치 기술은 1960년대부터 있어 왔지만 멀티터치 기술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연구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이뤄졌지만 애플이 아이폰에 사용했던 멀티터치 화면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엄청난 돈과 결심히 필요하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데만도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생산 라인 중에서 멀티터치 스크린을 만들어본 곳도 얼마 없었습니다. 이전까지 대량생산되었던 터치스크린은 감압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2003년 경에 몇몇 애플 엔지니어가 타블렛에 멀티터치 기술을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한 조슈아 스트릭턴은 잡스가 화장실에서 이메일을 읽을 수 있는 디바이스를 요구해서 연구가 시작된 것이라 밝혔습니다. 하지만 집 밖에서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의 배터리 수명을 가진 디바이스를 제작할 수 없었고, 쓸만한 만큼 그래픽 능력을 끌어낼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2003년 입사하기 전 MIT에서 멀티터치 디바이스를 연구했지만, 2004년경 이 기술로는 아무 것도 만들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애플에서 퇴사했습니다. 2005년 중반, 잡스는 터치스크린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휴대전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밀기 시작했습니다. 파델은 잡스가 프로토타입을 보여주며 이걸로 전화를 만들 수 있을지 물었을 때를 회상했습니다. 해당 프로토타입은 "매우 컸습니다. 방 하나를 채웠죠. 천장에 프로젝터가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 맥 화면을 비췄는데 얼추 3~4제곱피트 크기였습니다. 거기서 맥 화면을 터치할 수 있고 내용물을 옮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었죠." 파델 또한 터치스크린 프로토타입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맥 담당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서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토론을 했죠. 뭘 할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파델은 그 큰 프로토타입을 작게 줄여서 대량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 큰 의구심을 품었다고 말했습니다. 터치스크린 디바이스 자체를 만드는 것 자체도 프로젝트 하나가 되었으며 두 세가지 방법을 시도한 끝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을 골라냈다고 말했습니다. 첫 아이폰 프로토타입은 잡스가 2007년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줬던 유머 슬라이드에 나왔던 기기와 비슷하게 아이팟 클릭휠을 채용한 전화가 가능한 아이팟이었습니다. 2006년 초에 나온 두번째 프로토타입은 최종적으로 선보일 기기화 훨씬 비슷했습니다. 터치스크린에 OS를 사용하고 전체가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었죠. 하지만 전체를 알루미늄으로 하면 전파가 통하지 못해 예쁜 벽돌이 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통신 부문 사람들이 회의실에 가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에게 금속에는 전파가 통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당시 하드웨어 책임자였던 존 루빈스타인은 휴대전화 크기에 대해서도 토의가 있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저는 두 종류의 크기로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아이팟처럼 일반 크기 아이폰과 아이폰 미니 식으로요. 하나는 스마트폰, 나머지는 그냥 휴대전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아이폰 미니는 추진력을 얻지 못했고,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에는 모든 노력을 한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기도 했습니다." 잡스의 비밀주의로 인해 아이폰 팀원들은 주 80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해당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과는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바에서 친구에게나 배우자에게라도 정보를 누설하면 해고 사유가 되었습니다. 가끔은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이냐고 묻기 전에 NDA를 받고, 설명을 하고 나서는 NDA에 서명했으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다시 문서로 받기도 했습니다. 스캇 포스톨은 2012년 애플/삼성 재판 건으로 법정 증언으로 "아이폰 개발 빌딩이었던 보라색 건물 정문에는 '파이트 클럽' 이라고 써 놨는데 이는 파이트 클럽의 첫 규칙이 파이트 클럽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잡스의 목표기간에 맞추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어서 엔지니어가 갑자기 사표를 내겠다고 하고는 며칠 휴식을 취한 뒤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포스톨의 수행진 중 하나였던 킴 보라스는 한 번은 사무실 문을 너무 세게 내려치는 바람에 문이 끼여서 문을 다시 여는데 한 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그논은 "우리 모두 그 현장을 지켜봤죠. 어느 정도는 웃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나 이 모든게 얼마나 **같은지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했죠." 초기 아이폰 엔지니어는 아이폰 발표 후 부품 공급자의 반응이 가장 재밌는 부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Wi-Fi 칩을 공급하던 Marvell이나 블루투스 칩을 공급하던 CSR은 해당 부품이 새로운 아이팟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플은 이를 위해 가짜 설계도와 산업 디자인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그논은 다른 회사에 갈 때에는 애플이 아닌 다른 회사를 사칭하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통신사인 싱귤러에 갈 때 그러했는데 혹시나 창구 직원이나 지나가던 사람이 애플 배지를 목격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 설명했습니다. 2007년 1월 9일 잡스가 무대에서 아이폰 발표를 할 때 그리그논을 포함한 애플 직원은 초조한 상태로 객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잡스는 음악과 영상을 재생하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며 터치스크린 키보드가 얼마나 쓰기 쉬운지 시연했습니다. 또한 여러 사진을 넘기면서 두 손가락 핀치로 사진을 크게 키우거나 줄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시연이 끝나갈 때 그리그논은 안심한 것을 넘어 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신 안정을 위해 스카치 한 병을 들고 왔습니다. "엔지니어, 매니저 등 모든 사람이 5열쯤에 앉아 있었는데 데모 한 섹션이 지나갈 때마다 한 잔씩 돌렸습니다. 해당 부문을 담당한 사람이 마시는 거죠. 그리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작동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병이 싹 비었습니다. 여태 본 데모 중 가장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하루는 아이폰 팀 전체에게 ** 였죠. 그냥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다녔죠. 엉망이었겠지만, 정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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