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창작 소설이 공포 게시판에 많이 올라오더군요. 저도 조심스레 제 소설을 올려봅니다.
제목은 신데렐라이지만 <씻지말고따꺼> 님께서 올려 주신 소설과는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등장 인물 중에 이질적인 인물이 있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여겨 주십시오.
[신데렐라]
“호~.”
신데렐라는 곱은 손을 입김으로 녹였다. 이제 봄이라고는 하지만 찬물로 설거지하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남은 접시는 스무 개. 겨우 네 명이 식사하면서 접시를 서른 개나 썼다. 식사할 때마다 계모는 일부러 집안의 접시를 다 꺼내 놓곤 했다. 물론 설거지는 늘 신데렐라의 몫이었다.
하지만 설거지를 할 때는 계모와 언니들도 신데렐라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에 신데렐라는 설거지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쉬이익, 펑, 펑.”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랬다. 오늘은 성에서 봄맞이 축제를 하는 날이었다. 축제 때는 일반 백성들도 성에 들어가 무도회를 즐길 수 있었다. 무도회에는 왕자님도 참석을 하기 때문에 마을 처녀들은 축제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신데렐라도 마찬가지였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성에 가서 가끔씩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던 왕자님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계모가 허락해 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신데렐라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평소에는 절대 부탁하지 않았지만 봄이라서 그랬을까? 이번 축제에 함께 데려가 달라고 신데렐라는 계모에게 난생 처음 부탁을 했다.
“신데렐라, 남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까지 무도회에 가겠다고 그러니? 그리고 네 꼴을 좀 보렴. 그 꼴로 어딜 가겠다고. 집에서 하던 일이나 끝마치려무나. 오는 길에 맛있는 음식이나 좀 싸다 주마.”
계모는 큰 선심을 베푸는 듯 말했다. 두 언니는 그런 계모의 옆에서 킥킥대며 웃었다.
결국 계모와 언니들이 집을 나선 후 신데렐라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참으며 바닥을 닦았고 장작을 팬 후 마지막으로 접시를 닦고 있는 것이다.
신데렐라는 반짝반짝하게 닦은 유리 접시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흐릿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언니들보다 자기가 더 예쁜 것 같았다. 귀걸이를 하면 더 예쁘지 않을까, 하고 신데렐라가 접시에다 귀를 비추어 보았을 때였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창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멜로디. 하지만 노랫말이 신데렐라의 귀에 쏙 들어왔다. 물론 신데렐라는 더 심한 짓을 당하긴 했지만. 계모는 가끔씩 부지깽이를 들고 신데렐라를 때리곤 했고 언니들도 신데렐라를 쥐어박기 일쑤였다.
신데렐라는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상야등을 켜 놓은 정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조금씩 푸릇푸릇해지기 시작한 잔디밭, 잔디밭 사이로 난 좁다란 블록 길, 정원 왼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돌, 그리고 돌과 울타리 사이에 커다랗게 솟은 은행나무 한 그루.
아직 잎이 많이 돋지 않아서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일 터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밤하늘의 어둠과는 느낌이 다른, 어쩐지 좀 더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어둠이 신데렐라의 시야를 막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뭘까? 부엉이는 아닌데.
신데렐라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그 어둠은 나무 밑으로 뛰어내려 신데렐라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안녕, 신데렐라.”
상야등 불빛이 남자의 모습을 똑똑히 비추었다. 남자는 신데렐라를 굽어볼 정도로 키가 컸고 처음 보는 양식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검은색 일색이었다. 검은 윗도리와 바지, 검정색 구두. 얼굴만 마치 겨울날 내린 눈처럼 새하얬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는 않았다. 키가 크긴 했지만 덩치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약간 얼빠진 듯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혹시 어머니를 찾아오셨나요? 지금 무도회에 가셨는데…….”
남자는 신데렐라의 첫 번째 질문만 귀에 들어온 듯 대답을 했다.
“내가 누구냐고? 난 정장 남자야.”
남자는 자신의 윗도리 깃을 잡아당기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정장……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을 정장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아, 옷이 참 근사하네요. 댁한테 정말 잘 어울려요.”
남자, 정장 남자는 계모가 자신의 옷차림을 칭찬해 주기 바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데렐라의 예상이 맞은 듯, 옷차림을 칭찬하자 정장 남자는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눈에 특히 눈에 띄었다.
“신데렐라, 보는 눈이 있구나. 너처럼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줘야지. 그래, 소원을 한 가지 말해 보렴.”
착한 아이라. 이 남자는 도대체 몇 살이기에 자신을 아이라고 하는 걸까. 신데렐라는 정장 남자의 얼굴부터 발까지 천천히 살펴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았다.
“고, 공중에 떠 있네요!”
“응? 아, 떠 있지. 떠 있고말고.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단다.”
정장 남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행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내려왔다.
요정이다. 이 남자는 요정이야. 정장 남자라는 이름의 요정. 내가 요정을 만나다니.
신데렐라는 어쩐지 마음이 들떴다. 정장 남자는 그런 신데렐라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 소원은 뭐지? 아냐, 아냐. 내가 맞춰 보지. 음…… 너 무도회에 가고 싶구나?”
역시 요정이었어.
신데렐라는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듯 소원을 딱 짚어 말하는 정장 남자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럼 가면 되지.”
그때부터 정장 남자의 마법이 시작되었다. 손짓 한 번에 신데렐라의 누더기 옷이 아름다운 드레스로 바뀌었고 온갖 장신구들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마차와 잡티 하나 없는 백마 네 마리에 듬직한 체격의 시종들. 그리고 신데렐라의 아름다운 얼굴이 그대로 비춰 보이는 유리 구두 한 켤레.
신데렐라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다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얼얼하지만 기분 좋은 아픔. 지금 신데렐라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요정님. 정말 고마워요.”
신데렐라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난, 정장 남자라니까. 그건 그렇고 신데렐라.”
정장 남자가 신데렐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데렐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마주쳤다. 얼빠진 미소와 달리 그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독사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눈. 신데렐라는 몸서리를 치며 대답했다.
“왜 그러세요?”
“제한 시간은 자정까지란다. 만약 12시 종소리가 끝날 때까지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않으면?”
“네 가족을 죽이겠다.”
신데렐라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람. 무슨 요정이 이래?
“어떻게 할 거지?”
신데렐라는 자신의 드레스와 유리 구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생전 처음 입어 보는 아름다운 의상.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입을 수 있을지 몰랐다.
12시.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다. 가서 왕자님을 직접 보고 돌아오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테니.
신데렐라는 결심한 듯 유리 구두를 신고 마차로 다가섰다. 시종 하나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럼 신데렐라, 조심해서 다녀오렴.”
정장 남자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사륜마차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새하얀 마차가 달려 나간다. 거센 바람에 갈기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달리는 네 필의 말.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채찍을 가하는 마부. 별빛 하나 없는 밤에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날듯이 언덕을 올라가는 이 마차를 누군가가 보았다면 유령 마차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마차 안의 신데렐라는 행복하기만 했다. 이 언덕을 넘으면, 이 언덕만 넘으면 무도회가 열리는 성이 나온다. 그곳은 지금까지 신데렐라가 꿈도 꾸지 못했던 따듯함과 기쁨으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마차가 언덕을 넘자 하늘의 보름달이 지상으로 내려온 듯 밝게 빛나는 성이 눈에 들어왔다. 신데렐라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성. 신데렐라를 태운 마차는 성문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귀족의 행차라고 생각한 듯 문지기는 경례까지 해 주었다. 성으로 들어간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 한 구석에 멈춰 섰다.
“내리시죠.”
억양 없는 말투의 시종이 신데렐라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12시까지입니다. 이제 세 시간 남았습니다.”
알고 있어. 걱정 마. 꼭 돌아올 테니.
신데렐라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처음 신는 굽 높은 구두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지만 신데렐라는 고개를 들고 최대한 우아하게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이어지는 정원에도 연회가 벌어진 상태였다. 테이블을 환히 밝히고 있는 커다란 촛불 빛에 반짝이는 은 접시. 정원에 심어진 나무의 향기와 음식 냄새가 어우러져 이미 저녁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데렐라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만약 계모가 오늘 자신을 축제에 데려와 주었다면 지금쯤 이곳에서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쩝쩝대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귀부인, 아니 마치 한 나라의 공주처럼 아름답게 치장을 한 신데렐라의 목적은 더 이상 요리가 아니었다.
신데렐라는 무도회가 열리는 본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기다란 계단을 오르자 은은한 음악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아래쪽 연회장에서 보았던 사람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아한 자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과 호사스런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부유층들. 양쪽 다 신데렐라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로 신데렐라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그들 사이에 끼어 있다. 신데렐라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
공개된 축제라고는 하지만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뚜렷했다. 신데렐라는 평민들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 음식을 나르던 시녀 하나가 급히 달려와 신데렐라에게 말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이쪽입니다.”
시녀는 신데렐라를 귀족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더니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신데렐라는 자신이 귀족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이게 다 정장 남자 덕분이다.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은 새로이 나타난 인물을 평가라도 하듯 수군거리며 신데렐라에게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냈다. 신데렐라는 안내받은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그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데렐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명의 귀족과 인사를 나누고 귀부인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무사히 한 젊은 귀족과 춤을 추고 있는 걸 보면 실례되는 말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신데렐라는 춤을 춰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춤을 추는 신데렐라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밤의 고요한 호수에서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우아하게 날갯짓하는 한 마리 백조와도 같은 모습. 신데렐라는 주위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몇 곡 째일까? 신데렐라는 잠시 쉬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야회 무도회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뜨거워진 신데렐라의 몸을 식혀 주었다. 신데렐라는 식어가는 몸과 함께 자신의 마음도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도, 아름다운 드레스와 유리 구두도, 얼마 후에는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지겠지.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비참하고 힘든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추억이 자신을 얼마나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신데렐라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괴로움을 한숨에 섞어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11시 30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신데렐라는 왕자님을 못 봤다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즐거운 시간을 눈 속에 새기려는 듯 무도회장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신데렐라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훤칠한 키에 탄탄한 체격. 바람에 살랑이는 부드러운 머릿결과 단정한 얼굴. 웃을 때 보이는 고른 치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남자. 멀리서 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신데렐라는 그 남자가 왕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저와 춤추지 않겠습니까?”
신데렐라에게 다가온 왕자가 길고 섬세한 손을 내밀었다. 신데렐라는 고개도 제대로 못 든 채 조심스레 그 손을 잡았다.
춤을 어떻게 추었을까? 신데렐라는 자신이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공중에 붕, 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이 신데렐라로군요.”
“어디서 오셨지요?”
“아, 그렇군요. 저는……”
신데렐라는 왕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왕자의 단정하고 아름답다고까지 할 수 있는 얼굴에 취해 있었을 뿐. 평소 자신은 침착한 편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잠깐 신데렐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춤을 추던 도중에 무도회장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11시 59분. 아주 오래 춤춘 것 같은데 겨우 30분 정도 지났구나. 응? 11시 59분?
신데렐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12시 종이 다 울리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이 죽는다.
신데렐라는 급히 왕자의 품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죄송해요, 왕자님.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에요.”
왕자의 품에서 떨어진 신데렐라는 조심스레 왕자의 손을 놓았다. 매끄럽고 따뜻한 손.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왕자가 신데렐라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신데렐라,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소?”
왕자가 결의에 찬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여느 귀족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의 그 매력에 난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거요.”
신데렐라는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왕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뎅-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뎅-
이 종소리가 끝날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뎅-
가족들이 죽는다.
-뎅-
돌아가야 해.
-뎅-
아니, 잠깐. 그들이 내 가족인가?
-뎅-
매일 괴롭히지 못해 안달하고, 때리고, 욕하고.
-뎅-
그게 무슨 가족이야.
-뎅-
그들이 죽든 말든 내가 왜 신경을 써야 하지?
-뎅-
그런 못된 년들.
-뎅-
지금까지 나를 잘도 괴롭혔겠다.
-뎅-
차라리 죽어 버려!
-뎅-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멎었다. 왕자는 신데렐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신데렐라도 왕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예.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일게요.”
은빛 달이 빛나는 듯한 아름다운 미소. 하지만 그 미소에는 차디찬 칼날과도 같은 섬뜩함이 배어 있었다.
신데렐라는 무도회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결혼식 전까지 귀족의 예법을 익혀야 했고 왕족과 유력 귀족들과도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지만 신데렐라는 힘든 줄도 몰랐다. 왕은 신데렐라를 마녀 취급하며 결혼을 반대했지만 나라의 실권은 왕자에게 있는 듯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신데렐라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진짜 죽었을까? 확인은 할 수 없었고, 해 볼 생각도 없었지만 그날 정장 남자의 눈빛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가족들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데렐라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죽었으면 죽은 거지, 하는 생각이 간간히 머릿속을 지나갈 뿐이었다.
결혼식 날은 정말 화창했다. 하늘도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는 듯, 따스한 햇살을 예배당 창문 너머로 비추어 주었다. 신데렐라는 하늘의 선물을 등 뒤로 받으며 경건한 분위기로 가득한 예배당 복도를 걸어 왕자와 주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한발 한발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행복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다정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왕자의 곁에 도착했을 때 온몸을 가득 채운 행복감은 미소가 되어 흘러 나왔다.
모든 것이 신데렐라를 축복하고 있었다. 주례사를 읊는 주교와 예배당을 가득 채운 하객들,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까지도. 아니, 예외는 있었다. 제일 앞줄에 앉아 마뜩찮은 눈빛으로 신데렐라를 바라보는 왕과 맨 뒷줄에서 검은 옷을 입고 손을 흔들고 있는 정장 남자.
정장 남자? 왜 그가 이곳에 있지?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생긴 듯, 신데렐라는 자기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 수 있었다. 하객들 뒤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정장 남자. 미소를 띤 채 손을 흔들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그가 이 결혼을 축복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랄까, 마치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정장 남자의 옆에 계모와 두 언니가 서 있었던 것이다. 멍한 눈에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분명 계모와 언니들이었다.
어째서 죽지 않은 거지?
“……합니까?”
신데렐라는 갑자기 들려온 말에 정신을 차렸다.
“예?”
“신데렐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까?”
주교가 신데렐라를 보고 말했다.
“예.”
정신이 없었지만 신데렐라는 대답을 했다.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하십시오.”
왕자가 신데렐라 쪽으로 돌아서서 면사포를 걷어 올렸다. 신데렐라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최대한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했다. 왕자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걸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부부라는 말을 듣자 신데렐라의 마음속에 솟아난 불길함이 금세 사그라졌다.
그래, 나는 왕자님과 결혼을 했어. 계모와 언니들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바로 그때 신데렐라의 눈앞에 검붉은 것이 펼쳐졌다. 뜨끈하고 비린내 나는 그것은 바로 피였다. 깜짝 놀란 신데렐라가 뒤로 물러선 순간 입에서 피를 토한 왕자가 비틀대다 쓰러졌다.
“마녀다, 마녀가 왕자를 죽였다. 저 마녀를 잡아라.”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왕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예배당 문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달려와 멍하니 서 있던 신데렐라를 무릎 꿇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주위의 아우성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데렐라의 모든 감각은 예배당 복도를 미끄러지듯 걸어오는 정장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장 남자는 병사들에게 눌려 엎드린 상태가 된 신데렐라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 아무도 정장 남자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무슨 짓이야. 왜 왕자님을 죽인거지?”
정장 남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신데렐라는 분명 정장 남자가 왕자를 죽였으리라고 확신했다. 정장 남자는 뾰족한 송곳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더니 입을 열었다.
“신데렐라, 신데렐라. 그러기에 약속을 지켰어야지. 12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네 가족을 죽이겠다고 했잖아.”
그랬다. 주교가 왕자와 신데렐라의 결혼을 선포한 순간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신데렐라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멍하니 정장 남자를 쳐다보았다.
“신데렐라, 잘 있어. 나 이제 간다.”
정장 남자는 바짓단을 툭툭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신데렐라의 귀에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이 마녀의 목을 쳐라!”
정장 남자가 떠난 후 신데렐라의 귀에 처음으로 들린 말은 그대로 신데렐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말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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