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 문화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동북공정과 유사역사학 쪽에 대한 관심에서 특히나 불거지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문헌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는 그다지 우리와의 관련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 일까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드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는 문제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산융이나 선비 그리고 거란과 같은 이 들의 터전인터라 이 들과 한국사를 연계시키기위해서는 한국인과 관련이 있는 집단이 이 지역에 한때나마 거주하며 활동했음을 입증을 해야합니다.
여기서 일단 문헌 사학계는 결론을 낼수가 없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요, 문헌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요하로의 이동이나 한반도 내의 고고학적 사료들과 홍산 문명의 대조를 해봐야 하는데 신석기 단계와 청동기 초기 단계에서 이들 요서와 요동 및 한반도 사이의 문화적 격차는 상당한 터라 양 지역의 문화가 동일한 문명이 영위하였다는 것은 현 단계에서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쳇말로 까놓고 말하자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주장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들고 나오는 거랑 다를게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홍산 문명이 우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분들의 논거는 어떨까요? 이 글에서는 그러한 논거를 중심으로 간단하게나마 두서 없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 옥으로 만든 장식품
동물의 조각상을 두고 이야기 하는것은 토테미즘의 특성상, 그 모양은 사실상 전 세계 공통적인 분포를 자랑하고 있어 투라니즘과 같은 기마 민족 주체설이나 환국 문명을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면 연결짓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준비한게 다음에 보여드릴 장신구입니다.
아래는 일본 죠몬 유적지에서 흔히 발견되는 귀걸이입니다. 그 아래는 제주도에서 발견된 귀걸이 이지요,
아래는 홍산 문명 유적지에서 나온 귀걸이 입니다.
이러한 귀걸이를 결상이식(玦狀耳飾) 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수직으로 귀에 걸고 다닌 장식품을 통칭하는 것인데 사실 처음에 출토 되었을때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다가 1917년 일본 오사카의 코우 유적지에서 인골이 발굴되었는데 그 때 두개골 양 옆에 위치하였기에 이것이 귀걸이 인것을 처음 알았다는 비화가 있습니다.
이러한 결상이식은 비단 우리만의 무언가는 절대로 아닙니다.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 지역의 경우, 2009년까지 90개 유적 120점 정도의 결상이식이 출토될 정도로 신석기 유적지라면 적게나마 꾸준하게 출토되는 장식품으로서 오히려 상기의 제주도의 유물과 같은 경우를 비릇해서 한반도 동해안 지역과 큐슈 서해안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그것도 일본의 그것이 한국에서 출토되거나 심지어는 러시아 일대에서 나오기도 하는등 우리는 이러한 유물에서 무역의 흔적을 찾곤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자면 결상이식은 비단 이렇게 생긴것이나 옥 재질만 있는게 아닙니다.상기의 그림에서 볼수 있듯이 골무처럼 생긴 것부터 둥구스름하게 생긴 사각형, 가로나 세로의 타원형, 돌칼 같이 생긴것등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재질도 대리석이나 활석까지 다양하며 그 가공 방법 또한 찰절구에 갈거나 가는 실이나 줄에 갈아서 끊어내는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은 가공 '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며 앞서 언급한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할때 이러한 가공품만으로는 우리와의 직접적인 관계성을 입증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난것입니다.
2. 청동기의 존재
홍산문명에서 비파형 동검과 관련지어 볼수 있는 비파형 옥기는 나온적이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수가 없는게 현실입니다, 옥은 귀금속이지 실생활에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실생활에서 쓰는 도구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제작된 것이지, 미학적인 측면에서 제작된게 아니지요,정말 크게 양보해서 만일 나왔다면 정말 만에 하나 그랬다면 홍산문명에서 쓰였을 다른 비파형 도구는 왜 안나오는 걸까요?
3. 치성의 유무
고구려 중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고구려 말기에 비로소 한반도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 이 치성의 경우는 고구려 중기와 같은 시기에 중원에서 모습을 가진 유적물이 없는 것이 맞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치성에 관하여 채희국은 고구려가 원조다 라고 하지만 반대로 손인걸은 북방민족 원조론을 들고 나오고 있고 서인길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구려 성곽 문화의 원조가 아닌가 하는 학설을 들고 나오고 있으며 이러한 것과 별개로 춘추전국시대 원조론 즉 묵자의 기록을 토대로 주장하는 것은 비단 중국 학자들만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여러가지 학설이 존재한다고 할수 있겠지요,
홍산문명의 치성의 유무에 있어 홍산문화와 우리의 연관성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중국과 우리의 건축 양식이 가지는 차이점, 즉 우리는 둥근 성곽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시나 이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홍산문화의 치성이라 주장되는 구조물(첫째 사진)은 모서리가 뭉개졌을뿐 각진것이 맞으며 아래의 반월산성에서 볼수있지만 비단 우리나라의 치성이 둥그스름한것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최초로 발견된 곳도 유럽이고 최초의 학술명이나 연구 성과 역시 유럽에서 나왔습니다.폴란드 독일 스웨덴 러시아 중국 일본 등등 빗살 무늬 토기의 출토지는 그 만큼 많지만 우리가 이 빗살무늬토기 문화권안에서 우리의 문화권을 한정 짓는것은 그 안에서 우리와의 명백한 관련성을 찾았고 입증할수 있었기 때문일뿐이지 우리의 문화권 내에서만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된게 결코 아닙니다.
무엇보다 홍산문명에서 발굴된 채문 토기와 협사회도는 우리가 빗살무늬 토기라 부르는 즐문토기와는 다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실 이러한 유물들로 유사성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어쨌거나 우리와 같은 도구를 쓴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들을 우리 민족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호간의 관계성을 입증하는 것에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은 하가점 상층 문화일때는 산융이나 선비 거란과 같은 유목 민족들의 터전이었고 하가점 하층 문화일때는 정주민족이던 이 들의 터전이었는데 이 들과 한국사를 연계시키기위해서는 한국인과 관련이 있는 집단이 이 지역에 한때나마 거주하며 활동했음을 입증을 해야한다는 이야기인데 일단 문헌 사학쪽으로는 불가능한게 당연한게 문헌이 전무하지요.
그렇다면 고고학계에서 검토를 해야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관계성을 입증하는 문제에서 신석기 단계와 청동기 초기 단계에서 이미 이 들 요서와 요동 및 한반도 사이의 문화적 격차는 상당한 터라 양 지역의 문화가 동일한 문명이 영위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것은 현 단계에서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유전자 인류학과 체질 인류학 등을 통해 같은 계통의 조상을 두었는가를 알아보는 일입니다.주관적인 요소를 배제할수 있고, 인구이동과 문화 전파라는 고고학적 난제를 배제할수 있기때문에 이 유전자 인류학과 체질인류학이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해볼수 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우리의 조상뻘되는 민족은 요서지역에서 홍산 문화를 건설했던 집단과는 거리가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서지역에서 출토된 인골은 고동북 유형 그리고 고화북 유형 끝으로 고몽고고원유형의 순서로 고동북유형으로 지칭되는 집단중에서 한국인의 선조뻘되는 집단과 연계시켜 볼만한게 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요서의 홍산문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체질인류학 연구를 통해볼때 mtDNA에 따른 지역별 차이보다는 Y염색체에 따른 차이가 뚜렷하다는 점과 연구 표본이 지극히 부족한 점과 유전자 인류학의 유전자 채취 문제 등을 생각해본다면 더 나아갈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나 어디까지나 우리와 관련성을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뿐이지 이들이 한국인과 간접적이거나 직접적으로 연결 되어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러한 홍산문명은 황화 문명과의 연관성부터 신러 문화나 자오바오거우 문화등에서 볼수 있듯이 황화문명과 비교할만한 새로운 고대 문명이라는 주장까지 여러가지 주장이 나오고 있는게 사실입니다만 아직까지 연구 성과는 갑론 을박인게 사실입니다.
물론 동북공정을 통한 정부의 이념적 개입이 우세한것 역시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만 여기서 중요한것은 확실하게 고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볼때 우리와는 관련성이 없다는 점입니다.따라서 영토 중심의 사관 정리 사업인 동북공정에 대하여 홍산문명이 어떻든 현재로서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고 밖에 볼수 없는 우리가 홍산문명에 대하여 뭐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