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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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나타난 건 유난히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었다. 그날 나는 30년 만에 찾아왔다는
무더위소식에 몸을 마룻바닥에 눕힌 채, 하드를 핥고 있었다. 그리고 놈은 내가 하드를 반쯤 먹었을 때,
끼이익 쇳소리가 나는 우리 집 대문을 들이밀며 나타났다.
“여기가 어디지?”
놈은 나를 보자마자 뜬금없이 이곳의 위치를 물었는데, 놈의 행색이 워낙에 수상스럽고 해괴해서
대답해주지 않았다. 얼굴에는 까만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살갗하나 보이지 않게
옷을 입고 있는 미친놈에게 친절히 길안내를 해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놈에게 모른다고 둘러대며
하드를 날름 핥았다. 순간 놈은 내 500원짜리 하드를 장갑을 낀 손으로 만졌고, 내 하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내렸다. 갑자기 녹아 흘러내린 하드에 성질이 뻗친 나는 일어나 녀석의 멱살을 틀어잡았지만
이내 놈이 풍겨오는 뜨거운 열기에 손을 놓고 주저앉았다. 놈은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고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나갔다. 그게 놈과의 첫 대면이었다.
“만수야, 오늘이 몇 월 며칠이냐?”
구멍가게 박 노인이 담배랑 맥주를 계산대로 올려다놓고 있는 내게 물었다.
“12월 12일인데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돈을 계산대에 두고 담뱃갑을 뜯었다.
“근데 왜 이렇게 덥냐?”
박 노인은 콧대에서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박 노인은 가게 안이 더운지 연신 싸구려
플라스틱 부채를 흔들어댔다. 그 촐랑거리는 부채질이 신경에 거슬렸다.
“이런 게 하루 이틀인가요? 그리고 좀 선풍기라도 놔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구멍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맛깔나게 빨았다. 그 놈이 나타난 후, 우리 동네에 계절이라고는 여름밖에 없다.
여름이 지나고 와야 할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의 순환은 매번 반복되는 여름 때문에 못 본지 어언
3년이 됐다. 12월, 마을 한복판에서 러닝셔츠에 반바지차림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여름에 마을 사람들은 재앙이니, 말세니 하며 처음엔 무척 당황했지만,
차츰 여름용 특작물재배에 열을 올려 꽤 짭짤한 수익을 내고, 겨울마다 찾아오는 관광객들 덕에
관광수입도 적잖이 챙기며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모았다. 덕분에 마을사람들은 전보다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끝없이 올라가는 기온과 불쾌지수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터져, 옛날과 같은
인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을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이 끝없는 여름 때문이었다.
“만수야~”
골목을 따라 오르는데 동네친구 현철이가 나를 불렀다. 현철이는 나와 같이 마을에서 놈을 만난
몇 안 되는 마을 주민 중 하나였다.
“왜? 어디 가는데?”
나는 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흔들어보였다. 봉지 안에서 맥주병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와, 텔레파시가 통했나? 나도 맥주마시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현철이가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냐? 어디서 마실까?”
나는 발길을 돌리며 물었다.
“그냥 구멍가게 앞에서 마시자”
우리는 그렇게 구멍가게를 향해 골목을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옆집 박 씨가 자신의 아들을
마구 때리는 게 보였다. 박 씨는 자신의 아들의 궁둥이를 각목으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박 씨 아들의 허벅지며 엉덩이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저거 저러다 죽겠는데?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현철이가 조용히 말했다.
“모른다, 그냥 가자”
나는 고개를 휙 돌리고, 가던 길을 갔다. 괜히 말려들었다가 우리까지 해코지 당할 게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리 맥주를 들이 키고 싶었다.
“근데 점점 더워지는 거 같지 않냐?”
현철이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그러냐? 그래서 더 짜증이 나는 건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햇살이 강한 것도 있었지만, 그냥 인상이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저번에 무슨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조사한다고 왔는데 무슨 국지성 기후라나? 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뭐 말도 안 되는 과학 들먹이던데,”
현철이는 괜히 흥분하며 열변을 토해냈다. 침을 튀이며 말하는 게 영 못마땅했지만, 맥주를 마실 생각에
그냥 넘어갔다. 사실 현철이의 말이 맞았다. 3년간 여름이 지속되는 마을을 조사하기 위해 각종 매체에서
나왔지만 괜히 그럴싸한 과학을 둘러대기 바빴다. 그 놈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놈과의 두 번째 대면 때문이다.
“만수야, 우리 동네에 겨울이 오지 않는 게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생각해?”
현철이가 신문을 들이밀며 물었다. 신문에는 과학용어와 함께 우리 동네에 여름이 지속되는 이유를
그럴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좆 까라고 해, 그딴 거 몰라”
나는 신문을 손으로 밀쳐내고,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아직도 그 미친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놈밖에 없어. 이장님도 뒷산에서 보셨다고 했어”
며칠 전, 마을 이장님께서 뒷간에 갔다가 수상한 남자를 봤다고 하셨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옷을 두껍게 껴입고, 얼굴에는 이상한 마스크를 썼다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내가 여름에 본 놈과 동일인임이 틀림없었다.
“외계인일까?”
현철이가 생뚱맞은 소리를 해댔다.
“한국말 잘하던데?”
헛소리에 가볍게 응수하고 다시 텔레비전을 봤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눈썰매를 타는 모습을 보자
왠지 부러웠다. 우리 동네에도 눈이 오면 오르막길에서 썰매타면 정말 재밌었는데, 올해는 눈은커녕
쏟아지는 폭염에 냇물도 증발해버릴 지경이다.
“나도 그 미친놈 보고 싶다. 우리 뒷산에 가보자”
현철이가 내 어깨를 흔들며 칭얼거리는데, 한 대 콱 박아주고 싶었다.
“싫어! 그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아이스크림 녹이는 거? 우리가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그냥 한 번 구경만 하러 가자 응? 없으면 그냥 돌아오면 되잖아”
현철의 끈질긴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나와 현철이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뒷산으로 향했다.
한 겨울에 반소매에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끌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이상했지만, 여름이 지속되는
우리 동네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산을 오를수록 폭발적인 더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땀은 어느새 반소매 티셔츠를
타고 흘러, 속옷가지 적셨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찝찝함에 현철에게 쏘아댔다.
“이게 뭔 고생이냐? 그냥 돌아가자”
“야, 그냥 가면 뭐해? 여기까지 온 게 아깝지도 않냐?”
현철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전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창고가 있었던 산의 중턱에
근접했을 때, 지금까지와 비교가 안 되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밀려오는 짜증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내 일어났다. 앉았던 바위가 달궈졌기 때문이었다.
“야, 저거 봐”
순간 현철이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현철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그 놈이 서있었다.
우리는 살을 익힐 것만 같은 열기에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놈은 우리의 말에 반응을 했는지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전에 봤던 이상한 가면이 보였다.
“뜨겁지 않니?”
놈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뜨거운데, 당신 정체가 뭐야?”
나는 놈에게 다시금 소리쳤다.
“별로 안 뜨겁구나, 쳇”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나와 현철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디 갔어?”
“미친, 뭐야 방금?”
나와 현철이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이 그 놈과의 두 번째 대면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산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올라 아무도
산에 다가갈 수 없었다.
현철이와 함께 맥주를 들이키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뛰어왔다. 더운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갖춰 입은
경찰들의 제복에는 겨드랑이와 등 쪽에 땀이 번져 보기 흉했다. 러닝셔츠 하나만 입고 있어도 더운데.
경찰들은 서둘러 마을 위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지?”
“신경 끄자”
무시하고 술을 마시고 있는데, 위로 올라갔던 경찰들이 옷에 피 칠갑을 한 박 씨를 끌고 내려왔다.
박 씨의 눈은 풀려 있었고, 입에서는 연신 욕을 내뱉고 있었다.
“씨발, 성질나게”
“으아!! 뜨거워!!”
순간 박 씨를 끌고 가던 경찰들이 비명을 질렀다. 박 씨의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살점이
녹아내렸다. 드러난 내장은 부글부글 끊었고, 피에서는 거품이 올라왔다.
“상수야 덥다, 뜨거워 이제 그만 씨발!”
박 씨는 짓뭉개지는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와 현철이는 그 자리를 황급히 피해,
경찰 뒤로 숨었다. 경찰들 역시 박 씨가 녹아내리는 끔찍한 광경에 뒤로 서서히 물러날 뿐이었다.
“털썩”
다리가 녹아내린 박 씨는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으며 쓰러졌다. 그리고는 스르르 녹아내렸다.
박 씨가 녹아내린 자리에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순간 박 씨가 지난 번에 했던 이야기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만수야, 나도 봤다”
박 씨가 구멍가게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게 말했다.
“뭘요?”
“네가 저번에 봤다는 미친놈, 그 뒷산에서 이상한가면 쓰고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그 놈”
박 씨가 흥분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며 말했다.
“진짜요?”
그 동안 목격자라고는 이장님과 나와 현철이 뿐이었던 터라, 잘 됐다 싶었다.
“그 놈, 이상수 맞지? 목소리가 딱 상수였는데”
“이상수라뇨?”
“이상수 몰라? 그 때 마을 창고에 불났을 때,”
“아, 기억났어요. 근데 그 사람 치료받으러 서울에 갔지 않아요?”
상수는 그다지 활달하지 않은 마을의 보통 젊은이였다. 동네 창고에 불이 나기 전까지.
동네 창고에 불이 났던 그 날, 상수는 끝까지 불을 끄려고 하다가 결국 창고에 갇혀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근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잖아, 분명히 복수하러 온 걸 거야”
“복수요?”
“사실 그날 동네 사람들이 겁을 먹어서 상수를 구해주지 못했거든, 그리고 상수가 별로 마을에서 친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거든. 결국 소방대원이 와서 구출해줬지만. 너무 늦게 구해서 온몸에 심하게 상했지”
“그래서 복수한다고요? 그게 6년 전 일인데요? 말이 안 되잖아요”
나는 박 씨의 헛소리를 듣고 그냥 웃어넘겼다.
박 씨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 여럿이 죽어나갔다. 대부분이 더위에 미쳐서 날뛰다가 죽거나,
박 씨처럼 열기에 녹아서 죽어버렸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우리 동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퍼져
나오는 열기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마을로 도망가는 길에, 타이어가 녹아내린 차들이
여럿 있었다. 나 역시 불은 없지만 불에 타는 고통에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알아 본 바로, 상수라는 사람은 3년 전에 죽었다. 그리고 3년 전부터 우리 마을에는 푹푹 찌는 여름이
찾아왔다. 뭔가 아귀가 딱딱 떨어져 맞았다.
더위에 지쳐 마루에 쓰러져 있는 내게 그 놈이 다가왔다.
그걸로 녀석과 세 번째 대면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네요?”
나는 바싹 말라가는 입으로 놈에게 말했다.
“난 네 번째인데? 너도 그 날 불구경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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