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대 c226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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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크크크..”
웃음소리가 들린다. 광기에 미친 악마의 웃음소리가.
길다란 몸에, 인간과는 다른 신체 구조를 가진 괴상하게 생긴 악마.
“다음 곡이.. 완성 됐다.. 크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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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 Standby
「Misterioso (신비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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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야, 수연아 밥묵으라."
"네."
벌써 저녁 시간이 됐나. 하루 종일 집중해서 음악을 듣고 있었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오늘도 그저 음악만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여느 때와 같이 반찬은 후질그레 하다. 밥, 간장, 김치. 어디
영화 속 빈민촌에나 나올 법 한 반찬들이지만, 이런 것들로만 끼니를 때운건 꽤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아버지가 계실 때만 해도 이렇게 까지 가난한 집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꽤나 높으신 군인이셔서 벌이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진급을 하시더니,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아버지가 자취를 감추셨다.
더 이상 이런 집에선 살 필요가 없다고 느끼신 모양이다.
그 후론 나이 드신 어머니 혼자 나와 어린 내 동생 수연이를 키우셨다.
어머니가 힘든 몸을 이끌고 이런 저런 궂은 일을 하셔서 이렇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편에 내 동생과 나를 학교에 보내 주시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아, 어머니는 그렇게 주름이 늘어 가시는데 난 집에서 음악만 듣고 있다고 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난 현재 음악과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즉 음악을 듣는 것이 곧 공부인 것이다.
소질도 있고, 노력도 꽤나하고 있어서 장학금은 놓친 적이 없다.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효도는 하고 있다.
밥을 대충 해치우고 컴퓨터에 앉았다.
평소에는 여동생이 컴퓨터를 항상 차지하고 있지만,
여동생은 오늘 아침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갔기 때문에 마음 편히 컴퓨터를 켰다.
지지직 거리는 고물 컴퓨터지만 이 시간이 오늘 하루중 그래도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유머 사이트들을 돌면서 좀 웃고, 인터넷 기사들을 보며 고개 몇 번 끄덕이고 난 뒤,
그동안 확인 하지 못한 메일 체크를 시작 했다.
제목 : 그냥 이렇게 끝내긴 싫어.. 보낸 이 -민선-
제목 : 바보야 제발... 보낸 이 -민선-
제목 : 메일 답장좀..부탁할게.. 보낸 이 -민선-
오늘도 가슴 아픈 그녀의 메일들이 한 가득이다. 무시하자. 봐서는 내가 힘들다.
그렇게 클릭 한번 없이 확인한 메일함을 닫으려 할 때, 이상한 제목의 메일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제목 : 사랑의 소나타 보낸 이 - -
사랑의 소나타라.. 보낸 이 이름도 적혀있지 않다. '스팸메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의식 적으로
클릭을 했다. 내용은 조금 특이했다. 그곳에는 음악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생소하지 않은 말들이 쓰여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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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반의 청중이 흥미를 갖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가이다. - Romain Rolland
2. 들리는 음악은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음악은 더 아름답다. - John Keats
3.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침묵의 후가 음악이다. - Aldous Huxley
4. 음악은 남자의 가슴으로 부터 나와 여자의 눈물을 자아낸다. - Ludwig Van Beetho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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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유명한 거장들의 음악에 관한 명언이다. 별로 생소한 말들은 아니었기에 스크롤을 내렸다. 페
이지 아래에는 4개의 첨부 파일이 들어있었다. 모두 음악 파일이었다. 4개의 파일을 모두 다운 받아 그 제
목들을 살펴본다. 왠지 조금 특이한 제목의 파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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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 제시부 - 시작의 악장
file2. 발전부 - 인지의 악장
file3. 전개부 - 시험의 악장
file4. 재현부 - 결말의 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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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악장에 제시부 - 발전부 - 재현부 의 전개. 음악의 종결을 나타내는 'coda' 파트가 생략 되어 있는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한 소나타 형식이다. 음악을 아주 모르는 사람이 장난으로만 만든 것은 아닌 것 같았
다. 대체 누구일까, 이걸 만든 사람은.
호기심에 못이겨 첫 번째 파일을 실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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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 제시부 - 시작의 악장
「inquieto (불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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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실행되고, 음악이 흘러나온다. 생각보다 가볍고 편안한 리듬이다.
'a단조의 4/4박자.'
전형적인 소나타 형식이다. 전주가 끝나자 여린 p(여리게) 음이 흘러나온다.
모든 소나타는 1악장 전개부가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1악장 제시부가 소나타 형식을 취해야 '소나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제시부(Exposition)의 소나타 형식은 2개의 중심 선율을 가지고 있다.
p(piano-여리게)로 구성된 여성의 섬세한 선율과, f(forte-강하게)로 구성된 남성의 강인한 선율. 이
두 선율을 조화시키며 음악의 흐름을 제시하는 것이 제시부의 핵심 역할이다.
이 음악의 첫 번째의 여린 p(여리게)음은 상당히 아름답다. 사뿐 사뿐한 음들이 어린 소녀가 뛰어 노는 모
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한다. 그래 이건.. 어린 소녀가 노오란 꽃밭에서 뛰어 놀고 있는 모습. 소녀는 빙
글 빙글 돌며 해맑게 웃고 있다.
이 음악은.. 다른 음악과 다르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진다. 음악은 듣는 사람 마다
조금씩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 곡 만큼은 듣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감상을 할 것이라는 생
각이 들 정도였다. 소녀의 손짓 하나, 발동작 하나마저 머리 속에 영상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때, 남성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f(강하게) 파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혼란스럽고 우울한 저음. 소녀가 갑자기 지레 겁을 먹는다. 사뿐 사뿐 꽃밭을 뛰어다니던 두 발이,
이제는 땀에 젖어 뒷걸음질 치고 있다. 소녀의 앞에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점점 다가온다. 그녀의 발길
이 닿는 곳마다 아름답던 꽃들이 시커멓게 시들어간다.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칼을 꺼내 든다. 어린 소녀
가 울부짓는다. #(높게)과 b(낮게)로 범벅된, 무자비하고 시끄러운 선율이 그녀의 울음소리와 조화를 이루
며 퍼져나간다.
칼이 소녀를 계속해서 찌른다. 음악이 점점 거칠어진다. 악센트가 들어간 꽝꽝대는 강한 음들의 소리에 맞
춰, 소녀의 피가 사방으로 치솟는다. 수많은 노란 색의 꽃들이 붉은 피로 물들어간다. 빨간 모자는 소녀를
수 조각으로 토막 내어 형체를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뒤로 돌아선다. 유유히 사라지는 빨
간 모자와 함께, 다시 여성의 섬세한 선율이 울려 퍼진다. 피에 젖은 꽃밭을 뒤로, 음악이 점점 작아진다.
음악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
'흐드러진 꽃밭. 춤추던 어린 소녀. 빨간 모자를 쓴 괴한. 소녀의 토막난....욱'
찢어지는 살결 하나, 튀는 핏방울 하나까지 생생했던 영상이 갑자기 떠오른다. 화장실에 뛰어가 먹었던 저
녁 식사를 모두 토해냈다.
다시 컴퓨터에 앉아 다음 악장을 틀어본다. 순간, 컴퓨터가 큰 소리로 '파지지직' 거리더니 전원이 나가버
린다. 이 고물 컴퓨터 같으니..
"원재야! 이시간 까지 안자고 뭐허냐! 언능 가서 자!"
안방에서 어머니가 소리치신다.
"아..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고 침대에 가서 누웠다. 완벽한 p와 f의 선율. 뇌에 직접 새겨지는 것 같
이 강렬하게 떠올랐던 음악의 이미지. 아마추어의 장난이 아니다.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이 음악을 만든 사람은.. 대체 누구지..?'
오랜만에 잠을 이를 수 없는 밤이 찾아왔다.
그 일이 있고 나서, 4일이 흘렀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던 우려와는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다. 어제와 똑같이 음악 감상을 하고, 저녁을 먹고, 고물 컴퓨터를 켰다.
'제주도라니.. 좋겠군'
수학여행을 가 재밌게 놀고 있을 동생이 부럽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못 가던 동생을 위해 그동안의 알바비를 털어 수학여행을 보내줬었다.
덕분에 새 컴퓨터를 사려고 모아둔 돈은 날아가고, 지금 고물 컴퓨터의 자판만 두드리고 있다.
그때 들었던 '사랑의 소나타'의 음악만 재생하려 하면 컴퓨터가 지지직 거리며 꺼져버린다.
심지어 저번에 들었던 '제시부-시작의 악장' 마저도 재생이 되지 않는다. 새 컴퓨터가 필요한데..
할 수 없이 어제와 똑같은 유머사이트를 돌고, 별반 달라진 것 없는 인터넷 기사들을 본다.
정치면은 맨날 똑같은 새끼들의 싸움 얘기가 있다.
문화면은 항상 거기서 거기 인 것 같은 책들이 소개되어있고, 사건면은 항상 똑같은 더러운 살인사건 얘기가 있..
..어?
조금 특이한 기사가 눈에 띈다.
'어린 소녀 토막난 시체로 발견되..'
..어라?
내용을 훑어보았다.
「오늘 후 3시쯤 ……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 한 소녀가 칼에 무참히 토막 난 채 …… 얼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잘려 신원도 확인 불능 …… 그 부근에서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다는 목격자
도……」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처음으로 지금의 상황이 꿈이길 바랬다. 신원이 확인 되지 않았다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사랑의 소나타. 그리고 제주도로 수학여행간 내 동생.
......
짙은 슬픔과 분노가 뚝 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어우러진다.
처음으로 내 친구와 같던 ‘음악’이, 이렇게나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꼭 잡아서.. 죽인다.. 빨간모자.. 너는 내가 죽인다..'
찬란한 죽음의 연주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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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2. 발전부 - 인지의 악장
「Stretto (긴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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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삼일이 지났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죽었다. 더 이상 울 힘도 없다. 혹시나 했던 아버지는 딸의 죽
음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으신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말라버린 눈물을 아직도 짜내고 계신다. 혹시 어머니
께 까지 피해가 갈까봐 '사랑의 소나타'에 대해서는 말씀 드리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고 행복해 하던 수연이의 모습이 이렇게 눈에 선한데..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하필... 하필 왜 이번에 돈을 모아 수학여행을 보냈을까..
왠지 모를 죄책감이 밀려온다.. 제기
랄.
..일단 슬퍼하기보다는 범인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수연이에게 속죄하는 길이며, 또 다른 희생을 막는 길
이다. 우선 이번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첫째, 그 악마의 음악이 왜 나에게 온 것일까. 범인의 살인 동기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둘째, '사랑의 소나타'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건 더더욱 전혀 알 길이 없다.
셋째, 어떻게 노래에서 소녀의 죽음과, 내 동생의 죽음이 이렇게나 유사할 수 있을까..
'..예고살인'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이었다. 어떤 괴한이 노래로써 나에게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 음악에 따라 내 가족을 죽인 것이었다.
혹시 듣지 않으면 누군가가 죽지 않는 걸까.. 아니, 음악을 듣지 않으면 희생을 막을 최소한의 힌트마저
사라져 버리는 꼴만 될 것이다.
조용히 방 안에 들어가 컴퓨터에 헤드폰을 꽂았다. 음악을 실행시킬 때마다 다운 되어 버렸던 컴퓨터이지
만 지금은 다음 악장이 반드시 실행 될 것이란 걸 내 감이 말해준다. 전과 같이 곡을 다시 못 듣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하여 녹음기도 준비했다.
준비는 끝났다.
두 번째 파일인 '발전부 - 인지의 악장'을 실행시켰다.
소나타의 두 번째 부분인 발전부(Development)는 '제시부'에서 제시된 두 주제의 리듬, 화성, 선율 등이
동기적인 발전을 이루는 부분을 말한다. 다른 파트와는 달리 음과 선율의 역동적인 변화가 특징이다. 그
건 그렇고 '인지의 악장'이라니. 이번 음악을 들으면 무언가 알 수 있게 되는 걸까.. 이 음악은 나의 생각
이나 행동까지도 예측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소름끼치는 섬세한 선율이 귓속으로 파고든다. 역시나 가단조. 그리고.. 3/4박자인가. 작게 톡 톡 튀는 매
우 높은 음들이 들려온다. 멜로디는 상당한 고음으로 부터 시작해 점점 차분히 높아진다. decrescendo(점
점 크게)와 staccato(한 음씩 또렷하게)가 섞여 나오기 시작하며 선율이 뚜렷해진다. 이건 마치..
'발걸음소리.'
음이 조금씩 조금씩 높아진다. 뚜벅 뚜벅 어딘가를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1악장의 첫번째
선율이 그랬듯, 성급하지 않고 차분한 발걸음이다. 계속 올라간 음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
을 정도 이다. 이정도의 음높이면.. 9옥타브? 10옥타브? 돌고래가 아니고서야 정확하게 집기 힘든 음높이
다. 3/4박이었던 박자도 이미 기준을 잃었다.
그러고는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고, 작은 음들이 약간씩 소리를 보탤 뿐이다. 인
간으로 말하자면, 무언가 고뇌하는 순간 같았다고나 할까.
수 초 뒤, 음이 갑작스럽게 역주행 한다. 초 고음부터 초 저음까지. 소리도 그 속도에 맞춰 점점 커진다.
계속해서 낮아지던 음이 다시 1옥타브 도에 도달하는 순간, '꽝' 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음악이 끝이 났
다. 이건ff(매우 강하게).. 아니, fff정도는 될 정도다. 음이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나 빨라, '꽝' 하는 순간에 더욱 깜짝 놀랐다. 엄청난 속도라고 말하기 보다, 약 7초정도 안에 그 모든 음
들이 담겼었다고 말 하는게 그 빠르기를 이해하기 좀 더 쉬울 것이다.
'이번엔.. 낙사(落死)인가..'
천천히 올라갔다가, 정점에 도달 한 후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저 음색은 낙사임에 틀림 없다. 평상시 소나
타 음악을 듣고 낙사를 떠올리는 경우는 없겠지만, 이 빌어먹을 잔혹한 소나타라면 낙사를 표현했음이 틀
림없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었지만, 충격은 첫 번째 악장을 들을 때와 다름이 없다. 온몸이 터져, 너덜
너덜하게 죽어있을 그 사람의 모습이 생생하게 상상된다. ...그러기에 더욱 다음 예고살인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언제 다음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최소
한 사건이 어디서 일어날 지만 알 수 있어도, 며칠을 꼬박 새서라도 그곳을 지킬텐데..
절망적이다. 수연이가 죽을 때처럼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제길..
순간 내 머리를 스친 말이 있었다. 다름 아닌 이 괴한이 나에게 보낸 메일에 적혀있던 2번째 명언.
「들리는 음악은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음악은 더 아름답다. - John Keats」
'들리지 않는 음악이 더 아름답다'..라.. 설마 그런거였나.. 서둘러 2번째 악장을 녹음기를 앞으로 감아,
다시 틀어보았다. 그리곤 잘 들리지 않던 초 고음들을 집중해서 계속 들어보았다. 잘 들리지 않지만 대충
예상 하고 있는 음이 있었기에, 가장 높은 최종 음이 어떤 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역시나..
'9옥타브 시.'
들리지 않는 음악이란 초음파에 가까운 이 악장의 최고 음인 '9옥타브 시'를 의미하고 있었다. 각각의 음
계를 계단 한 층으로 생각한다면.. 1옥타브 도는 1층. 1옥타브 레는 2층 …… 그렇게 나아가면 9옥타브 시
는..
'63층'
허겁지겁 신발을 신고,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허억 허억..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빌딩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 와보는 63빌딩의 안. 가난한 나로서는 올
일도 없었다. 심지어 63빌딩의 층수는 지하 삼층과 지상 육십층이 합쳐서 육십 삼층이라는 것조차 이제서
야 알았다. 제길,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63빌딩을 올 만한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1층에서 60층까지 직행으로 타고 가는 전망 엘리베이터를 탔다. 유리로 된 창 밖을 보니 현기증이 날 정
도로 아찔하다. 이곳에서 떨어진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땡'
육십층에 도착했다. 옥상은, 옥상은 어디지? 옆의 직원한태 물어봤다.
"아.. 63빌딩의 옥상은 민간인에게는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예?"
..이게 무슨소린가..
"하지만, 저는 지금 꼭 가야합니다.. 사람목숨이 걸려있어요."
"죄송하지만, 63빌딩 옥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출입 불가 지역입니다."
직원은 당연히 불가능한 사실을 왜 자꾸 물어보냐는 듯 나를 쏘아본다. 계속해서 부탁을 했지만 그렇게 쉽
게 허가가 될 리가 없었다. 당황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내 가족 중 63빌딩 옥상에 올라갈 만한 지위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곳이 아닌 것일
까? 아니, 다음 살인 예정지가 이곳인건 확실 하다. 2악장 시작 부분의 발걸음 소리를 표현한 선율이 1옥
타브 도가 아닌 상당한 고음에서부터 시작 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발걸음은 엘리베이터에서 내
린 60층에서부터, 60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부분 까지를 표현한 것이리라.
날도 슬슬 어둑어둑 해진다. 몇 개의 층만 빼놓고는 불도 다 꺼졌다. 아무래도 살인 예정일이 오늘은 아
닌 것 같다. 우선 63빌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빌딩 주변의 피시방에 들어갔다. 인터넷을 키고,
가장 중요한 ‘옥상’에 대한 것부터 검색을 해 보았다.
"음.. 이거군"
정보가 쓰여 있는 블로그로 들어가 글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63빌딩에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층은 60층까지입니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도대체 63빌딩의 옥상에는 무엇이 있는가 논란을 일으켜왔는데, 여기에는 당혹스럽게도 방공 대공포와 수방사레이더 기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 중 극비로 …….」
꽤나 놀라운 사실이지만, 중요치는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군인은 없...
...
...
'..설마....?'
머리가 백지장이 된 체 피시방을 뛰어나온다.
"손님 돈은 내고 가셔야죠!"
시끄러, 1초도 아깝단 말이다.. 제발.. 제발.. 63빌딩이 눈앞에 보인다. 다시 들어가서 부탁을 해봐야지..
제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꽝!!"
엄청난 굉음이었다. 미사일이 떨어진 것 같았다. 부서진 아스팔트의 파편들이 내 머리를 치며 떨어진다.
"꺄아아아아악!!!!!"
대기를 찢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는 온몸이 터져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다. 피로 물든 아스팔트 위로, 군복을 입은 시
체가 차갑게 식어간다.
'..아..아버지....'
슬픔, 분노, 무력감. 순식간에 엎쳐오는 감정들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기절하였다.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수년간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재회가, 이런 식으
로 이루어질 줄이야..
「가족을 버려둔 채,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죄책감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다.
사랑하는 내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려 한다.」
아버지의 유언이다. 필체도 옛 아버지의 것과 일치한다. 관계자들의 마을 들어 보니, 승진하신 아버지는
63빌딩 옥상에서 일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아까 블로그에 써져 있던 데로, 63빌딩 옥상의 군부대는 극비.
그 극비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도 하지 못하시고 떠나신 것이었다. 이번 수연이의
죽음에 대해 소식통을 통해 들으셨겠지. 그리고 우리를 버렸다는 죄책감이 수연이의 죽음으로 증폭되어,
자살이란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사랑의 소나타라..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소나타라는 것인가?
..크크.. 씨발.. 이 악마의 음악을, 어떻게 해야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버지는 유서까지 써놓고 자살을 하셨다.
즉 이건 예고 살인이 아니다. 음악에 담겨있는 이미지들은 '바꿀 수 없는 미래'인 것이다. '인지의 장'이
라..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에서야 인지했다.
이건 인간의 짓이 아닌, 정말로 악마의 소행이라는 것을..
또 하루를 장례식장에서 보낸 뒤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 절망으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힘겹게 끌고 컴
퓨터 앞에 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그냥 유머 사이트나 돌면서 실실 쪼개고 있었다. 포기해 버렸
다. 어차피 다음 사람은 내가 아무리 용을 써 봤자 죽게 될 것이다. 차라리 이 씨발 같은 음악도 듣지 않
고, 쓸대 없는 노력도 하지 않는게 낫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으리라.
그때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짜악!"
분노에 찬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어머니였다.
"넌 지금..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디.. 웃음이 나오냐.. 이 썩을것아.."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신다. 아무리 힘드셔도 눈물은 흘리지 않는 분이셨는데..
"와서 밥이나 묵그라.. 그리고 반성좀 해라.. 이자슥아.."
"....네.."
뺨 한 대에 정신이 바싹 든다. 지금 정신을 놔선 안된다. 불가능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막아야 한다. 최
대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악마의 다음 목표는.. 나의 어머니일 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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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3. 전개부 - 시험의 악장
「Brillante (화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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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밥을 쑤셔 넣고, 책상 앞에 앉았다. 우선 지금까지 있었던 사건에 대해 조사해 보는 것이 우선이
다. 특히나 사랑의 소나타와 사건의 관련성. 그것만 완전히 꿰뚫을 수 있다면.. 사전에 사건을 막을 수 있
는 가능성이 없진 않다.
우선 사건을 푸는데 가장 힌트가 되는 건, 메일 내용에 들어있는 명언들. 2번째 명언은, 63빌딩이라는 구
체적 장소를 알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1번째 명언은..
「태반의 청중이 흥미를 갖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음악가이다. - Romain Rolland」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로맹 롤랑의 명언. 이 말처럼 난 처음엔 그 공포의 음악 자체가 아닌, 어떤 자식
이 이런 것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했었다. 그때 음악을 신중히 분석해 대비했었다면 내 동생의 죽음
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음악에 나왔던 노오란 꽃밭이, 제주도의 유채꽃밭 이라는 것만 분석해냈어도.. 어쨌거나 명언들은 직, 간접적으로 사건을 예측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만약 3번째 명언을 보고도 장소를 알아 내지 못했다고 해도, 어머니만 지키면 될 일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건 시간. 첫 번째 사건은 노래를 들은 후로 4일 후에 일어났다. 두 번째 사건은 노
래를 듣고 1일 후.. 2가지의 표본만으로는 날짜를 예측 조차도 할 수 없다.
'잠시만..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건 아닐 것인데..'
그렇게 따지면 사건이 일어날 시간이 카운팅 되는건, 노래를 듣고 난 후가 아닌, 이전 사건이 끝난 후 부
터가 된다. 즉, 두 번째 사건은 '노래를 들은 지 1일 후'라기 보다, ‘첫번째 사건이 끝난 뒤 3일 후’라
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4일 후.. 그리고 3일 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혹시..?'
첫 번째 악장은 가단조의 4/4박자.. 두 번째 악장은 가단조의 3/4박자..
..그런건가....
박자표의 분자에 자리하는 숫자. 아직 확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숫자가 다음 사건까지의 기간을 의미
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음 예정일은..
'내일이군.'
다음 악장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소나타의 3악장은 3/4박자, 또는 3/8박자인 미뉴에트 형식
으로 하는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분자는 3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틀째가
됐으니 다음 사건 예정일은 내일이 된다. 정확한 시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하루 종일 지키고 있
으면 되니까.
전보다 조금의 시간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급하다. 1분 1초라도 빨리 다음 악장을 듣고 대비를 해야 한다.
녹음기를 챙겨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3번 파일 '전개부 - 시험의 악장'을 더블클릭 했다.
클릭 하고 나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까지의 이 공백. 땀이 범벅이 된다. 무섭다. 너무나 무섭다. 그러나 어
머니.. 어머니만큼은 꼭 지켜야 하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최대한 귀를 기울였다.
악마의 목소리 같은 소름끼치는 음색이 귓속으로 파고든다.
"삐이이이이이이잉 삐이이이이이이잉" 시작부터 귀를 찢는 소름끼치는 고음. 초장부터 ff의 강렬한 선율이
음악을 지배한다. 이건 마치..
'사이렌소리.'
정체 모를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그 사이렌 소리가 도달한 곳에는.. 이건 뭘까, #과 b이 제각각으
로 섞여있는 복잡함. 음의 길이도 제각각이다. 예술적인 색채가 짙으며, 리듬은 자유롭고도 복잡한 미뉴에
트의 특징을 완벽하게 그대로 살리고 있다. 단지 천사의 음을 떠올리게 하는 미뉴에트가, 지금은 악마의
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만 빼면.
독특한 악센트에, 조금씩 흘러나오는 비명과 같은 화음들. 이 불규칙성.. 이정도의 불규칙성과 화려함을
낼 수 있는 물질은..
'화염.'
이 선율은 마치 시뻘건 화염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인데,
그 열기가 전해지는 듯 온몸이 뜨겁다.
그러다 갑자기 정적.
'벌써 끝난 것인가..? 라고 생각 할 때. 큰 소리를 내는 음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불씨 마냥 타오른다. 미
뉴에트의 특징 중 하나인 리듬의 반복이다. 이제는 웬만한 곡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Sforzando(아주 강하
게)까지 비명소리처럼 섞여 더욱 비참한 음이 들린다. 가냘픈 이 비명소리는.. 여성의 것.. 끔찍하다. 이
것이 어머니의 비명소리일 것이란 생각에.... 음악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반대
로 fermata(늘임표)가 비명소리를 계속해서 늘어놓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명 소리는 잠잠해졌다.
그렇게 3악장의 연주가 끝났다.
섬뜩하다. 마치 내가 불에 타 죽은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방으로 달려갔다.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 어머니를 깨웠다.
"엄마,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밖에 나가지 마.. 알았지?"
"..얘가 갑자기 뭔소리라냐? 너 괜찮은겨?"
어머니가 내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시고 당황하신 모양이다.
"아니.. 요새 꿈자리가 사나워서. 우리 수연이도,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혹시나 엄마까지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두려움에 목이 매어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이그.. 그래 알았다 인석아. 내일은 꼼짝 않고 집에 있을꺼여. 자슥.. 겁먹지 말그래이 이 애미는 안죽는다. 니를 놔두고 어딜 가겠노."
어머니의 손길이 내 머리를 어루만진다. 주름과 상처 투성이 손이지만, 너무나 부드럽다. 지켜 드릴 것이
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방 문을 조심히 닫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제 중요한건 3번째 명언. 그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
해 메일 수신함을 다시 들어갔다. 나에게 저주를 가져다 준 빌어먹을 메일을 클릭한다. 3번째 명언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침묵의 후가 음악이다. - Aldous Huxley」
영국의 천재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명언. 어떤 의미일까.. 힌트도 점점 모호해진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
다.
그 때, 새로 도착해 있는 메일 1건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 : 이 메일 꼭 봐줘. 읽지 않으면 나 죽어버릴 꺼야. 보낸 이 -민선-」
.......
그녀에게 또다시 메일이 왔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 시간이 없다. 그러나 거의 협박처럼 들리는 제목에, 어쩔 수 없이 마우스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답장이 없니.. 내가 보낸 메일 읽기는 하는 거니?
예전일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 아직도 너 정말 사랑해. 우리 예전에 행복했었잖아. 그때로 다시 돌아가자..
내일 새벽 2시에 우리집 앞으로 와줘. 아직 내게 마음이 있다면 말야.
오지 않는다면.. 그냥 죽어버릴래.」
'여전히 극단적이군. 제길 그런 그렇고 왜 하필 이럴 때....'
이 애의 성격으로는 내가 나오지 않는다면 정말 죽을 것이다. 확실하다. 나는 그녀를 너무나 잘 알기에..
유민선. 내 예전 여자친구다. 그녀는 꽤나 아름다운 여성이고 남들이 보기에도 우리는 꽤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그녀 덕에 항상 행복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에게 조금씩 냉담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녀의
사랑이 식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자존심도 다 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갑게 돌아섰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집 앞에 찾아가 만나 줄 때까지 날을 샜다. 나의 과해진 행동에 그녀
는 진지리를 냈다. 더 이상 오면 손목을 긋고 자살해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
속해서 그녀를 찾아갔다.
며칠 후, 그녀는 정말로 손목을 그어버렸다. 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메일속 말도 그냥 빈말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위험한 상황까지 갔었지만, 급히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에
겐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난 사랑에 관해서는 냉혈한이 됐다. 나중에 보란 듯이 성공해 그녀에게 복수하겠다고 다짐까지 했
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나에게 다시 시작해 보자는 메일이 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나에게 다시..'
그동안 복수를 꿈꿔왔기에 메일을 모두 씹어왔던 나지만, 나에게 돌아오고 싶다는 그녀에게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걸 느낀다.
'안돼.'
..안 된다. 지금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 더 이상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난 알고 있다. 난 이미..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니, 계속 사랑해 왔었다는 것을..
그 증거로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었던 커플 반지가 아직도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지 않은가.
내일 새벽 2시라.. 3시간 남았나. 그러나 난 그녀의 요구대로 나갈 수가 없다. 자칫하면 어머니가 불에 타..
순간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오늘 죽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민선이일수도..'
좀 전에 들은 3악장에서 타죽은 것은 '여자'라는 것만 예측 할 수 있었지, 나이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민선이일지, 어머니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선 민선이와 통화를 해보려고 황급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습니다."
제길..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결국에 어머니와 민선이 중 누구 하나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걸.
만약 민선이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면, 그녀는 집에 불을 질러 자살할 것이다. 반대로 민선이를 만나러 간
다면, 악마가 우리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를 태울 것이다. 그 악마라면 분명히 ... 뻔할 뻔자의 스토리다.
'선택의 장..' 이런 의미였나. 빌어먹을.. 또 나는 그 악마의 예측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
는 건가.. 무력감에 눈물이 난다. 그러나 선택은 해야 한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 둘 다 소중한 존재지만..
그래도 더 소중한건 당연히..
'어머니'
어머니가 주무시는 안방 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째깍이는 시계를 보며, 시간아 가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소리친다.
시계가 정확히 2시 30분을 가리켰을 때였다.
"삐이이이이이이잉 삐이이이이이이잉"
기다렸다는 듯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마치 악마가 내가 정한 마음을 알고, 바로 음악에 암시된 살인을 시
작 한 듯 하다. 아니, 정말 그랬다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다. 창문을 보니 저 멀리서 화염이 치솟는다. 싸
이렌을 울리며 소방차가 달린다. 민선이는 저기서 불타고 있겠지..
아까 음악에서 들었던 비명소리가 생각난다. 공포에 숨을 쉴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죽인것처럼.. 미안하
다. 떨어지는 눈물을 뒤로 커튼을 친다.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래도.. 그래도.. 어머니는 살았다.
죄책감과 안도감. 두 모순된 감정 속에 짓눌려 잠을 잘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앉아 있었다. 안방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아직 곤
히 주무시는 어머니. 그래.. 지켜냈다.
정신을 조금 차린 후, 타버린 민선이의 집으로 향했다.
죄책감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집 앞에서 마음속으로라도 한마디 사과라도 하는 것이 인간으로
서 최소한의 예의리라. 집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쑥덕거리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도 없는 것이.. 참 딱하죠..?"
"그러게 말이에요.. 쯧쯧.."
민선이는 얼마 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스스로 불을 붙였다고는 하나, 부모님
도 안 계시는 방 안에서 혼자서 타들어 갔으니..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 사랑했었어.. 민선아..
"그래도 참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그 불길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다니. 목숨 건진게 어디에요."
...
...뭐?
민선이가.. 죽지 않았다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
순간 심장이 '쿵' 하고 가라앉는다. 갑자기 문득 다시 생각난 한 구절의 글귀 때문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침묵의 후가 진정한 음악이다.'
침묵의 후. 아까 들었던 악장에선 분명히 처음의 화염을 표현 한 후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조
금 뒤 또다시 타올랐던 화염. 명언에 따르면.. 진정한 음악은 아직..
민선이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난 지금 집을 비워 버리고야 말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심장이 터져라 뛰었다.
제기랄.. 귓가에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점점 커진다.
"삐이이이이이이잉. 삐이이이이이이잉."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사이렌 소리보다 날카롭다. 날카로운 저 소리에 베어 죽을 것만 같다. 뛰는 순
간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뛰고 또 뛰어 집 앞에 도착했다. 아니,
이제 '집 앞'이라는 표현은 부적절 하게 됐다.
집은 이미 없었다. 화염이 다 씹어 먹고 배설한 시커먼 잿더미만이 있을 뿐. 소방대원들이 안으로 들어가
이상하게 뒤틀린 커다란 잿더미 덩어리 하나를 가져온다. 난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본다. 그들은 그 커다란
잿더미를 손에 들고 무전기로 이렇게 외친다.
'시신 확보 끝났습니다. 더 이상의 사망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 잃었다.
힘들지만 그래도 화목했던 우리 가족들.
수 년 동안 사랑을 쌓아왔던 나의 사랑들, 나의 버팀목들을
단 며칠 사이에 모두 잃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내 모습을 보고 한 경찰이 말을 건다.
"혹시 피해자의 가족이십니까?"
슬픔에 빠져 있을 새도 없이, 난 피해자의 가족으로써 경찰서에 동행 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에 도착했다. 뭉툭한 코에 머리가 조금 벗겨져 있는, 경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날 좁은 의자에 앉힌
다. 그리곤 이것 저것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대답해봤자 뭐에 써먹
는 것일까. 이미 다 죽었는데. 어차피 돌이 킬 수 없는데..
"자네, 김원재 군이라고 했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니, 많이 힘든 건 아네. 그러나 진정 하고 대답 좀 해주게."
'너같으면 진정이 되겠냐 개새끼야..'
알긴 뭘 안다는 걸까. 이 슬픔을 다 이해하는 척 하는 그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니들에게 급한 건
그저 상황조사일 뿐이겠지.
"..힘들다면 일단 좀 차분히 쉬게나. 조금 있다 다시 시작하겠네."
...
"악마."
"응..? 뭐라고?"
"불을 지른 건 악마입니다."
"흐음.. 자네.. 아직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가 보군. 조금 쉬었다가 다시 대화 합세."
'..어차피 사실을 말 해 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새끼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가치를 못 느끼겠다. 이 답답함. 정말 악마의 짓이란 말이다 이새끼들아..
"정말 악마라고 씨발 !!!"
가슴에 쌓인게 폭발해 버린건지,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놀란 주위의 경관들이 모두 나를 주목한다.
잠시 침묵 뒤에 나와 대화하던 경감이 사진 한 장을 꺼내 든다.
"자네.. 이 사람을 혹시 아나?"
흐릿한 사진이다. 멀리 떨어진 사람을 찍은 사진인데, 초점이 맞지 않아 불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히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물체.
'빨간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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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4. 재현부 - 결말의 악장
「Lamentoso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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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찍으신 거죠? 이사진?"
나의 적극적인 반응에 경관도 놀란 것 같다.
"아.. 이 사람을 알고 있나? 자네 집 주변 cctv에 걸린 사진이야. 사실, 확실하진 않지만.. 이번 화재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 되고 있는 사람일세. 이번 화제는 안쪽으로부터 시작 된게 아니야. 외부로부터 불이 난거지. 그 시간대에 cctv에 잡힌 사람은, 이놈 하나일세."
또다시 이놈인가.. 이놈이 모든 사건의 범인인가. 아니, 아버지의 일은 살인이 아니었다. 그걸 제외하고서
도 이렇게나 음악과 맞아 떨어지게 범행을 저지르는 건 불가능 하다.
'악마의 사도.' 그쯤 되려나..
"알고 있습니다. 예전 제 여동생이 살해된 적 있습니다. 그때의 용의자와 일치합니다."
"이런.. 연쇄살인 인건가. 그것도 자네의 가족만.. 혹시 자네 집안에서 원한 살 일을 한 적은 없었나..?"
경감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베어 있다.
"없습니다.. 전혀.."
"알겠네. 일단 저 방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게. 현재 집도 타버렸으니, 며칠간 머무르면서 사건 해결에 협조를 부탁하네."
..또 하나의 악장이 남아있다. 아무리 용을 써 봐도, 분명히 악마의 시나리오 대로 한명은 죽을 것이다.
지금 내가 경찰과 접촉하는 것도 그 시나리오의 일부분이겠지. 하지만.. 다음 피해자는 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네놈만은 잡아 죽이겠다.. 빨간모자.
"알겠습니다. 협조하겠습니다."
"고맙네."
"참, 그 방에 노트북 하나만 놓아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집 말고 또 불이난 곳에 ‘유민선’이란 애가 살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엔 그 애가 위험할 것이니.. 보호를 부탁드립니다."
".. 자네는 다음에 누가 죽는지를 어떻게 알고 있지?"
...설명할 길이 없다.
"악마가 말해주었습니다."
"..알았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꽤나 깨끗한 방이다. 받아온 노트북을 설
치했다.
계속해서 흘린 땀과 눈물에 범벅이 되 있지만, 씻는건 나중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건 다음 살인의 실행 날
짜를 파악하는 것. 망설이지 않고 노트북을 켰다.
또 다시 이 음악을 들어야 한다니.. 조금 쉬고 싶기도 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로 4번 파일, '재현
부 - 결말의 악장'을 다운 받았다.
마지막 악장이다. 동시에 마지막 기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딸깍'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빠른 템포의 음이 흘러나온다. 소나타의 4악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론도 형식의 곡인듯 하다. 론도 답
게 2/4박자의 곡. 예정일은.. 내일 모래인건가. 4악장 재현부는, 말 그대로 제시부의 선율을 다시 재현하
는 구간이다. 그래서 약간의 선율의 변화, 음역의 확대나 축소 등은 일어나지만 제시부와 대체로 같은 구
조로 되어 있다.
빠르고 경쾌한 음. 누군가 달리고 있다. 스타카토(음을 짧게 끊어 연주하라)같이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린
다.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가 삽입됐는지, 달리는 발소리에 가속도가 붙는다. 음악이 중반으로 접어들더
니, 화음이 나온다. 화음 속 3가지 음이 불쾌하게 어울리며, 또다른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화
음은.. 사람수를 나타낸다.
3명이다.. 젠장, 패거리도 있었나. 그중 앞서 가는 사람은, 핏물과 같은 시뻘건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숨이 막혀온다. 저자식이.. 저자식이..
재현부 답게, 처음 제시부의 선율이 다시 흘러나온다. '터벅 터벅' 빨간 모자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제길.. 잔인하게 살해당한 수연이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푸우욱' 잠시 후 칼이 날카롭게 살을 관통하는 소리. 여성의 슬픈 비명 소리. 제시부의 완벽한 재현. 살
을 에이는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다.
그렇게 마지막 음악이 끝났다.
다행히 생각 한 것보다 충격적이지는 않다. 뭐, '예상한대로' 라고 하는 게 맞겠다. 지나친 오버 없이 처
음으로 회기하는 절제. 그것이 소나타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아직 장소는 알 수 없지만 경찰이 그녀를 찾기만 하면 장소는 알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명언을
확인하는 것 뿐이다. 마지막 명언은..
「음악은 남자의 가슴으로 부터 나와 여자의 눈물을 자아낸다. - Ludwig Van Beethoven」
음악계 최고의 거장, 베토벤의 명언. 동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 이 길었던 죽음의 음악의 종지부를
찍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금까지의 명언들을 떠올려 보면 명언의 '음악'이란 단어는 항상 살인 행위, 그 자체를 가리켰었다. 그리
고 '남자'는 빨간 모자를 뜻할 태고, '여자'는 민선이를 뜻할 것이다. 즉, 이번 힌트는 빨간 모자가 민선이
를 죽인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빨간 모자에 대한 복수를 대비해 잠시 주위 상점에 가서 호
신용 칼 하나를 사왔다. 준비는 다 됐다. 이제 남은 건 민선이의 행방을 찾는 것 뿐.
하루가 지났다. 경찰은 그녀를 아직 찾지 못했다. 전화를 해보아도 그녀의 핸드폰은 꺼져 있을 뿐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수 밖에..
이틀째 날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찾았다는 소식은 없다. 무능한 자식들.. 시간은 가고.. 가고.. 마
음이 너무나 초조하다. 혹시 벌써 살해 당한건 아닐까. 벌써 오후 6시다.
'쾅'
방문을 세차게 열고 한 경찰이 허겁 지겁 들어온다.
"미.. 민선이는 찾았나요?"
"아니 그 아이는 아직.."
제길..
"그럼 무슨 일이십니까.."
"빨간모자가 있는 곳을 확인했습니다."
"...!! 어디.. 어디죠?"
"한강 공원쪽이라고 합니다. 자세한건 더 확인 되는데로.."
"비켜!!"
경찰서에서 뛰쳐 나와 한강 공원을 향했다.
"혼자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함께 행동을..."
..답답한 경찰 새끼야.. 그 ‘조금’ 사이에 사람의 목숨이 날아 갈 수 있단 말이다..
택시에 올라탔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진다. 제발.. 아직 살아있길..
"삐리리리리릭"
전화가 왔다.
「발신인-민선」
....
....!!
안도감에 손이 떨려왔다. 전화기를 귀에 갔다댔다.
"여보세요? 민선아? 너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던거야..? 아니, 너 지금 어디야?!"
위치 파악이 우선이었다.
"아.. 왜 갑자기 화를내.. 나 지금 한강공원 쪽이야."
.......제길..
"최대한 사람 많은 쪽으로 가있어. 알겠어?"
"나 여기 길 몰라.. 지금 골목쪽인데.. 나 지금 좀 급해.. 뒤에 누가 막 따라오는 것 같아.. 빨리 와.."
..이런..
"조금만 버텨, 내가 곧 거기로 갈게. 알겠지?"
"응.. 빨리 와.. 참 그리고.."
"응?"
"미안.. 정말 미안.. 이런데 끌여 들여서.. 보고싶어.. 빨리 와.. 살려줘.."
그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자꾸 코를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눈물도 흐르고 있나 보다.
"뭐가 미안해.. 하여튼 조금만 더 버텨 얼른 갈께!"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녀는 구한다.'
택시에서 허겁지겁 내렸다. 골목쪽이라.. 저쪽인가. 아무 골목이나 일단 들어가고 보았다. 생각보다도 더
인적이 드물다.. 위험하다.
그때 저 멀리 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빨간 모자.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두 추종자. 나를 등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현기증이 일어
날 것 같다. 저자식들이.. 저자식들이..
드디어.. 찾아냈다. 저 악마의 사도들을..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달릴 때 소리가 나면 안 되
므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뛰었다. 그들을 향해서. 두렵진 않았다. 내 몸속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두려움을 무마시켰다. 내 모든 것을 뺏어간 자식.. 첫 번째 목표는 왼쪽 뒤의 녀석.
달려가 그녀석의 왼쪽 등 부분, 심장이 있는곳을 쑤셔버렸다.
'커헉..'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왠놈이..."
당황한 오른쪽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자식의 목을 따버렸다. 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히 처
리했다.
남은 건 앞에 가는 빨간 모자 새끼 하나.. 땅을 박차고 달려 그자식의 등을 노렸다. 빨간 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눈이 마주쳤다.
인간이 생각을 하는 순간, 바로 그렇게 행동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몸은 생각보다 느리다.
아아, 인간은 얼마나 불완전한 동물인가..
칼이 그자식의 등에 닿는 순간, 2가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네.. 어째서 이런짓...을..." 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구하러 와줬구.." 라고 말하는 목소리.
찔러선 안된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의 생각은 바로 행동으로 전달 되지 못한다.
'푸욱.'
빨간 모자가 갑자기 돌아보는 바람에 심장은 피할 수 있었지만, 등과 배를 가로질러 칼이 꽂혔다.
고통으로 얼룩진 비명 소리가 들린다.
뒤에 있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경감이, 당황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빨간 모자가 쓰러진다. 모자가 벗겨진다. 모자가 벗겨지면서, 안에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긴 생머리들이
나와 휘날린다..
'..민선..아..?'
「음악은 남자의 가슴으로 부터 나와 여자의 눈물을 자아낸다. - Ludwig Van Beethoven」
'남자'는.. 나였단 말인가..
경감님과 부하 경찰은 이미 숨이 멎어있었다. 3명이 한 패였던 것이 아니었다. 형사들이 빨간 모자를 발견
하고 쫒고 있는 것이었다.
민선이 '쫒기고 있다'고 한건 이 상황이었다. 빨간 모자는 민선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야 유민선 !!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야.. 우리 엄마하고.. 수연이 죽인거... 니가.. 니가 한 짓이냐..?!"
분노와 당황감이 어지럽게 섞인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민선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왜... 이런 ㅆ.."
그녀의 등에서 붉은 핏물이 줄줄 새나온다.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핸드폰을 꺼냈다.
"제길.. 일단 구급차 부를게"
".. 소용 없어.. 알잖아.. 어차피.. 쿨럭..죽어........ 그 음악은 거스를 수 없으니까.."
"대체.. 정체가 뭐야.. 그 음악은 대체.."
"..잘 들어.. 잠시 내 과거 이야기를 해줄태니.."
그녀의 입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무리해서 얘기 하는걸 말리고 싶지만.. 그녀 말대로다. 어차피 그
녀는 소나타대로 죽게 되어 있다. 지금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최선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행복했었는데.."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듯한 슬픈 미소를 띠우며,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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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 Finale
「Morendo (사라져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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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coda) : 음악 작품의 종결 악구
23살. 나 유민선은 이 늦은 나이에 첫 사랑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김원재'. 같은 과 동기이다. 무뚝뚝하
지만 순수한 그에게 나는 반해버렸고,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그리고 그날이 우리가 사랑을 시
작한 첫 번째 날이 되었다.
항상 우린 함께였고, 행복했다. '이 사람이야 말로 내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
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사랑의 소나타'라는 제목으로 도착한 단 한통의 메일 때문에.
며칠 뒤, 어릴 때 부터 나를 키워 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어머
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그제서야 그 음악의 탓인걸 깨닫고 여러가지 손을 써봤지만, 며칠 뒤
아버지마저 병에 걸리셨다. 아버지도 곧 죽게 되시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다음 희생자는..
..원재가 될 것이다.
4번째 악장을 틀어봤다. 음의 리듬이 들쭉 날쭉하다. 시작부터 지정된 박자가 없는 곡이다. 언제 그가 죽
을지 알 수가 없다. 먼 훗날 일지도 모르고, 오늘 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날카로운 선율이 이상한 모양
의 시커멓고 뾰족한 흉기를 그려낸다. 그 흉기가, 남자의 머리통을 관통한다. 아아.. 끔직하다. 고통스럽
게 죽어가는 그의 모습. 제길..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다. 그는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를 사랑해선 안 된다.
그를 잊어야 한다.
그를 차버렸다. 그가 울먹인다. 나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황급히 돌아섰다. 그러나 그를 잊으려
용을 써도 잊을 수가 없었다. 매일 내 집 앞에 찾아와 나를 애타게 부르는 그를 보며, 사랑의 마음은 눈물
과 함께 더욱 커져만 갔다.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셨다. 이제 원재의 순서이다. 시간이 없다..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방법은..
없는건 아니었다. 내가 죽으면 된다. 그것 외에는.. 그를 사랑 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한번만 더 찾아
오면 손목을 그어 죽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도 찾아왔다.
결국 난 칼을 들었다.
너무 너무 무서웠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무서웠다. 그렇지만 그를 위해
손목에 칼을 내리 꽂았다.
'으으.. 여긴..'
..눈이 떠졌다.
'왜 눈이 떠지지.. 눈이 떠지면 안되.. 난 지금 죽어있어야 해..'
주위를 살펴보니 병원이다. 의사는 내게 주민의 신고로 간신히 살아났다고 했다.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
다는 사실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있나 확인 차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그에게서 문자가 와있다. 5분 전에 도착한 문
자. 아직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힘들었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몸 괜찮니.. 깨어나면 연락좀 해줘.. 이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 미안해..」
'대체..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이 바보자식아..'
제길..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일들을.. 감정이 복바친다.
"이 빌어먹을 악마새끼야 지금 당장 나와 !!!!"
분노에 휩쓸려 병원에서 소리쳐 버렸다. 혼자 쓰는 독실이었지만, 밖에서 내 소리를 들은 간호사가 깜짝
놀라 들어온다. 아무일 아니라고 다시 내보냈다.
"악마.. 지금 당장 빨리 나와줘.. 거래.. 거래를 하자.. 제발.."
반응이 없다. 제길.. 제길.. 팔로 눈물을 닦았다.
'.......?'
이상한 기척에 팔을 내리고 앞을 보니
검은 망토를 두른 이상하게 생긴 물체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것이.. 악마..'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에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갑자기 악마가 이상하게 생긴 신체 기관을 연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재미있는 인간이군. 나에게 거래를 신청하다니 ..킥킥.."
.......무섭지만..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원재를 살려줘.. 대신.. 내 목숨을 주마.."
"크크크... 니 목숨 하나로는 안되지.. 나의 음악은 절대적이야.. 킥킥.. 그걸 철회한다는 것은.. 더 큰 대가를 필요로 한다. 큭큭.."
"어떤.. 희생 말이냐..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 목숨밖에 없단 말이다.."
"네 목숨 따윈 필요 없어.. 대신 다음 사랑의 소나타를 그자식에게 전송하겠다..큭큭.."
"..!! 그건 안.."
..잠깐, 그렇게 하면.. 원재의 가족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재는.. 살 수 있다..
원재만, 원재만 살 수 있다면..
"그래.. 알겠다."
'원재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절 용서하세요..'
..3명..인가. 그가 나를 잊었을지, 잊지 못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소나타는 4악장. 그럼..
"잠깐,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단 3명뿐이라면 마지막에 죽게 되는 것은 누구지?"
"큭큭.. 그 본인이 죽게 된다."
제길.... 역시나 그렇게 되는 건가.
"마지막에 죽게 되는 건, 그가 아닌 나로 해줘. 내가 대신 죽겠다."
"큭큭.. 그냥은 안되지.. 그럼 또 하나의 조건을 걸어라."
악마다.. 이래서 악마가 악마인 것인가.. 더 이상 걸 수 있는 것이 없다. .. 그렇다면..
"내가.. 원재의 가족들은 가능한 선에선 내가 죽이겠다."
"크크크.. 재밌군.. 정말 재밌어.. 좋아, 거래는 성립 됐다..큭큭 이제 철회는 불가능하다. 지금 당장 가
서 새 곡을 만들어 그에게 보내도록 하지.. 너에게도 보낼 태니 잘 듣고 실행에 옮기도록.. 크크."
악마는 그렇게 말한 뒤 사라져버렸다. 며칠 뒤, 새로운 사랑의 소나타가 나에게 도착했다.
동시에 원재에게도 도착 했겠지..
우선 원재에게 다시 접촉 할 필요가 있었다. 3번 악장의 살인 계획을 실행 하려면, 다시 그와 접촉을 해
야 한다. 그때 가서 너무 갑자기 메일을 보내면 이상하겠지. 지금부터 접촉을 시작 해야한다. 그에게 메일
을 써서 다시 나의 존재를 각인 시켰다.
그리고 예정된 첫 번째 살인을 해야 했던 날. 나인 것이 의심 받지 않게 하기 위에 남자 옷을 차려 입었
다. 긴 머리를 감추기 위해 평소 쓰지 않던 붉은색의 모자를 사서 쓰고, 머리카락을 안으로 집어 넣었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떠났다. 그리고 음악에 따라 그녀의 동생을 죽였다. 너무나 끔찍하고, 무
서웠다. 내 손이 사람을 찢어 베고 있다..
그러나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의 아버지 일은 나의 영역을 벗어났으므로, 악마가 직접 죽였다.
다음으로는 그의 어머니. 나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분이었다. 하지만 죽여야만 했다. 음악에 암시된
것처럼 스스로 내 집에 불을 지르고 원재의 집 뒤에 잠복했다. 그가 나의 집 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뒤,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린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수없이 속으로 외쳤다.
이제 내가 죽음으로써 죄 값을 치룰 차례다.
예고된 그날이 왔다. 조용히 죽으려 했다. 옷들이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똑같은 복장을 할 수 밖에 없
었다. 남자 옷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자도 썼다.
그냥 길을 거닐다, 담담하게 죽으려 했다. 이미 난 내 손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을 둘이나 죽였
다. 지금 죽어도 억울할 것이 없다.
'어디서 죽지..'
아름다운 곳에서 죽고 싶었다. 한강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사람이 나에게 따라 붙는 것이 느껴
졌다. 4번째 악장처럼 3사람이 되었다. 그리곤 칼질소리가 났었지..
..무서워 졌다.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담담한 척 했지만.. 역시 죽는건 무섭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구해줘.. 원재야, 구해줘.. 그가 보고싶다. 마지막 순간이지만 그가 보고 싶다. 핸드폰을 들어 그의 번호를 눌렀다.
핸드폰을 통해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반가운 이 목소리.. 정말로 듣고싶었던 이 목소리..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나온다. 그가 내 위치를 묻는다. 그가 이리 온다고 했다.
"미안.. 정말 미안.. 이런데 끌여 들여서.. 보고싶어.. 빨리 와.. 살려줘.."
미안해, 보고 싶어, 살려줘.. 마음속에 담아뒀던 단어가 모두 폭발해 터져 나온다.
전화를 끊고, 공포에 떨며 앞으로 걸어간 지 수 분 후, 갑자기 뒤에서 2개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털썩.'
뒤를 돌아 보았다.
아까 두 괴한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원재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드디어, 드디어 만났다... 보고 싶던 나의 그. 기쁨에 소리쳤다.
"구하러 와줬구.."
'푸욱'
.
.
.
.
.
그녀가 말을 마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시선을 고정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되거야. 다행이야.. 널 구할 수 있어서.. 마지막으로 네 얼굴 보고 죽을 수 있어서.. 네 손에 죽을 수 있어서.. 내 힘으로 음악의 저주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어서.."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싼다. 따뜻한 체온. 지금 흐르는 내 눈물보다도 뜨겁다.
"바보.. 바보 같은 것아.. 왜.. 왜.. 나 따위 것을 위해서.."
"기뻐..널 살릴 수 있어서.. 고마워..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 슬슬.. 갈 때가 됐나봐.. 네 뒤에 세상이.. 온통 까맣게 보이네.."
...........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감겨줬다.
"더이상 아무 말 하지 마.."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준다. 그녀의 숨이 완전히 멈췄다.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축 쳐진다.
....다행이다.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아서.
"고맙다, 기다려 줘서. 이제 죽여."
"큭큭.. 이정도쯤이야.."
내 뒤에 검정 망토를 휘날리며 서있던 악마가 씨익 웃는다. 시커먼 손가락이 뾰족한 흉기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내 머리통을 관통한다.
그녀의 노력에도, 음악의 저주를 바꿀 순 없었다.
그러나 그녀 덕에 이 저주의 음악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죽을 수 있었다.
나에게 도착한 음악은 내가 사랑 하는 사람을 모두 죽인 '사랑의'소나타 임과 동시에,
날 살리기 위한 그녀의 사랑이 깃든 '사랑의'소나타였다.
의식이 흐려지는 마지막 순간, 예전에 그녀가 고백할 때 예쁘게 웃으며 말해준 하나의 명언이 생각난다.
『음악은, 사랑이 적합한 말을 발견한 것이다. - Sidney smith』
한편의 아름답고 웅장했던 소나타가, 방금 막 연주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연주를 위해
악마는 지금 다음 곡을 써내려 간다.
공포로 얼룩진 또 다른 사랑의 선율을 담을,
다음 소나타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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