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이하영 선생님과 일이 있은 그날 이후 화실에서 난 늘 가시방석에 앉은 녀석처럼 안절부절하며 두여자의 눈치를 나도 모르게 살피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 행동하려고 해도 마음속에 두여자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민한 여자들의 육감을 벗어날 수 없었던듯 하다.
나는 어느새 희진이와 이야기할 때는 이선생님의 눈치를 살피고 이선생님이 내 가까이라도 오면 희진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림이 제대로 그려질리도 없었고 모든 행동과 생각이 뒤죽박죽 이었다.
희진이보다도 솔직히 신경이 더 쓰이는 것은 이선생님이었는데 사실 이선생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마치 그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난 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선생님을 마주 할 수 없었기에 더 이상 이대로는 안돼겠다는 생각에 이선생님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이야기 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영 " 무슨 일이니?"
낙하 " 선생님. 그날은 저..... "
하영 " 신경쓰지마 낙하야. 선생님이 미안했다."
낙하 " 아뇨. 다만 선생님께서 아무말도 안하시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요 "
하영 " 크게 생각하지마. 난 벌써 다 잊었어."
무엇을 잊고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도통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희진이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 이야기를 해야할까? 아냐...모르고 있는게 희진이를 위해 더 나아.. '
이선생님과의 면담 이후 바로 전처럼 편해질수는 없었지만 이선생님과 점차 예전처럼 마치 그날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전보다 더 편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희진이에게도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하영 선생님과의 그날의 일들은 둘만의 기억속에 묻어 버렸다.
내겐 첫여자인 이하영 선생님.
한 순간에 화풀이 대상이 나였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래도 여자를 일깨워준 아직도 나의 기억속에는 편안한 한분의 선생님으로 자리하고 계신 선생님으로 기억할 뿐이다.
그 사건이 지나고 다시 희진이에게는 나 혼자만의 속죄라도 하는것처럼 더욱 잘해주게 되었고 희진이는 그런 내모습을 항상 따뜻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더 잘 대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희진 " 낙하야. 이번 주말에 우리집에 가자. "
낙하 " 갑자기 너희 집에 왜? "
희진 " 그냥 같이 집에가서 저녁이나 먹자구."
낙하 " 됐어. 좀 부담스럽다. "
희진 " 안돼. 아빠 엄마한테 이야기 해놨단 말야. "
낙하 " 나한테 먼저 묻지도 않고 그랫단 말야? "
희진 " 암튼 그렇게 알고 있어. "
' 하여간 자기 멋대로라니깐.... '
그렇게 난 희진이네 집에 인사를 가게 되었다.
희진이에게 들은 말로는 아버지는 오파상을 하시고 어머니는 확실히 말은 안하지만 부동산쪽에 관련된 투기를 하시는 분 같았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조금나는 오빠가 한분이 계신데 따로 사업을 하며 혼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주말 오후 난 희진이를 만나서 희진이네 집으로 향하였다.
과일이라도 사들고 가려하는데 극구 필요 없다는 희진이의 만류에 맨손으로 희진이네 집에 가게 되었다.
겉에서 보기에도 의리의리한 말로만 듣던 맨션빌라.
날카로운 눈매로 기분 나쁘도록 뚫어지게 바라보는 경비아저씨의 눈길에 지은 죄도 없는데 찔끔하며 경비와 인사를 나눈 희진이를 따라 뻘쭘하게 현관앞에 서서 크게 한숨을 마셨다.
현관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께서 반겨 주셨다.
낙하 " 안녕하세요. 희진이 친구 낙하라고 합니다."
아줌마 " 어서 와요. "
현관에서 이어진 복도를 따라 조금 들어서니 넓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있는 치장을 곱게하신 아주머니 한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희진 " 엄마 친구 왔어요. "
희진이의 말에 난 어리둥절했고 잠시후에 방금전 문을 열어준 사람은 희진이네 가정부임을 눈치 챌수 있었다.
낙하 " 안녕하세요. 희진이 친구 낙하라고 합니다. "
희진모 " 이야긴 들었어. 화실 친구라고? "
낙하 " 네... "
희진모 " 이리와서 앉아요. "
잠시후에 희진이 아버지께서 방에서 나오셨고 그렇게 4명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희진부 " 우리 희진이 남자친구라고? 듬직하게 생겼네..허허 "
낙하 " 감사합니다. "
희진모 " 그래 부모님은 무슨일 하시고? "
희진 " 아이 엄마는 뭐야. 선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질문이 그래? "
희진모 " 궁금하니까 그러지. "
낙하 " 네. 아버지는 카센타 운영하시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세요. "
희진모 " 그래? 형제는? "
낙하 " 예 2남1녀 중에 막냅니다. 제일 위에 형하고 바로 위에 누나하구요. "
희진 "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그런데 오빠는 왜 안와? "
희진부 " 좀 있으면 오겠지. 희진이 남자친구 왔는데 설마 안오겠냐? "
그렇게 잠시간의 심문 비슷한 질의 응답을 마칠 때쯤 희진의 오빠가 도착한 듯 했다.
희진 " 오빠. 왜 이렇게 늦은거야? "
희진 오빠 " 미안. 알잖냐 서울 시내교통 더러운거 참...이 친구냐? "
낙하 " 네...안녕하세요. "
희진오빠 " 왜 이렇게 굳어 있어. 편하게 있어라. "
희진모 " 애미는 눈에도 안들어 오냐? "
희진오빠 " 그럴리가요. 저 왔어요. "
희진부 " 자.. 낙하군 출출할텐데 밥먹자. "
식당에 들어서서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잔치집도 아니고 무슨 음식을 그리도 많이 차렷는지 그것도 순 양식이다.
변변한 레스토랑에도 제대로 한번 가본적이 없는 나였기에 당황스럽기에 충분했었다.
희진부 " 입에 맞을지 모르지만 맛있게 들어라. "
낙하 " 예 "
희진오빠 " 난 밥 주세요. 아줌마! 낙하도 밥이 편하면 밥 먹어라 "
낙하 " 아..아닙니다. "
사실 어떻게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양식보다 밥을 먹고 싶었지만 쉽사리 그러겠다고 할수가 없었다.
희진이가 옆에서 조금씩 알려주었지만 그래도 처음 접하는 나이프와 포크질은 어색함을 감출수 없었다.
희진부 " 하하 우리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먹어라. "
희진오빠 " 그것 봐 낙하도 내가 딱 보니까 밥 체질이야. 한국사람은 밥이 최고지. "
낙하 " 죄송합니다.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와 희진이네 가족과 둘러 앉았다.
희진모 " 아버님이 카센타 하신다고? 어디서 하시지? "
낙하 " 예 전농동에서 아는분하고 같이 하시는데요. "
희진모 " 직원은 얼마나 되는데? "
희진오빠 " 엄마. 뭐해 지금. 사람 무안하게. "
희진모 " 뭐가?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
낙하 " 직원은 없고 그냥 두분이서 하십니다. "
희진모 " 두분이서? "
희진오빠 " 낙하야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희진이가 낙하 많이 좋아하는것 같더라. 하하 "
희진 " 오빠는 참. "
낙하 " 아닙니다. 제가 많이 좋아해요. "
희진모 " 아직 어린애들이 그냥 친구지 무슨. "
낙하 " 네? "
희진부 " 낙하군 답답할테니 희진이랑 나가서 데이트나 하지. "
희진오빠 " 그래 같이 나가자. 나도 그만 가봐야 해. "
그렇게 희진이 오빠의 손에 끌리다 시피 희진이와 같이 나오게 되었다.
희진오빠 " 낙하야. 어른들 말씀 신경쓰지 말고. 희진이 많이 이뻐해줘라. "
낙하 " 네... "
희진오빠 " 자 이거 가지고 오늘 둘이 신나게 놀아라. "
낙하 " 아닙니다. "
희진오빠 " 형이 주는건 받아도 돼. 그리고 나중에 한번 찾아와라. "
10만원 짜리 수표 3~4장과 명함을 건네준 희진이 오빠는 차를 타고 먼저 집을 빠져 나갔다.
희진 " 우리 오빠가 낙하 맘에 들었나 봐 "
낙하 " 그래? "
희진 " 응....확실해. "
맑게 웃는 희진이를 보면서 같이 웃어주었지만 희진이 아버지나 오빠와 틀리게 냉랭했던 희진이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희진이네 집에 다녀온 이후 희진이는 나와 환경이 다른 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지만 그럴수록 희진이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항상 아르바이트와 그림 공부때문에 피곤한 와중에도 희진이에게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또 희진이는 어떤 내색을 내거나 하지 않는데도 난 스스로 희진이와 나의 환경에 큰 차이가 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희진이네 집에 전화하면 대체로 가정부 아주머니가 받으면 전화를 바꿔 주었지만 가끔 희진이 어머니가 받으실 때면 희진이는 집에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점점 가정부 아주머니도 핑계를 대시며 전화 바꿔주기를 피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희진이에게그런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내가 짐작하는 그것을 내 스스로 인정하는 현실 자체를 확인하고 싶지않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희진이와 지금처럼 만남으로도 만족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당시에 내생활은 거의 1년 가까이 새벽 신문배달과 저녁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와 화실공부의 병행으로 나에게는 항상 잠이 부족했다.
지금 나로서도 믿어지지 않지만 키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176이었는데 그 당시에 57키로가 간신히 넘는 몸무게였다.
겨울방학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새벽 신문을 돌리기 위해 일어나 목욕탕에서 세수를 마치고 수건을 얼굴에 가져가는 순간 코 밑으로 주르륵 흐르는 코피를 볼수 있었다.
거울을 보니 쌍코피가 고장난 수도처럼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난생처음 코피란걸 흘려보며 신기하단 생각을 하다가 거울속에 내모습이 점점 뿌옇게 번지면서 온통 허옇게 변하더니 잠시 목욕탕 천정이 보인듯했고 그 이후 기억이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낮설은 천정이 보이고 그 위로 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점점 뚜렷해졌다.
아버지 " 정신이 드냐? 거의 30시간 만이다. 이놈아 "
낙하 " 예? 윽.."
몸이 쉽게 움직여 지지 않았고 머리가 멍한고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버지 " 그만큼 했으면 됐다 이제 그만 포기해라. "
어머니 " 그래. 의사가 너 휴식이 필요하데. "
낙하 " 무슨 소리예요. 나 괜찮아요 이제. "
아버지 " 이제 안돼 그만해 이놈아. 자기 몸도 하나 못 추스리면서 무슨 그림을 그린다고 그래. "
아버지의 말씀에 불끈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아들이 하고 싶어 한다면 이젠 승낙해주실 때도 됀것 아닐까 ?
금방 눈뜬 아들에게 하신다는 말씀이 이제 그만 하라니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그 말을 핑계삼아 난 어쩌면 이제 그만 힘든 일을 포기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낙하 " 씨팔. 그만두면 돼잖아!!!!!!!! 내가 그만두면!!! "
난 울면서 소리 치다가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때 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눈물 흘리시는 어머니 얼굴만이 보였다.
죄스런 마음에 아무말도 못하고 있다가 안쓰러운 막내아들 쓰다듬어 주시는 어머니께 되려 화를 내며 툴툴 댔다.
다음날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난 이틀동안 내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학교도 가지 않았고 몇번 걸려온 희진이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바람을 쏘이면 답답한 가슴이 좀 트일까 하는 맘으로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내 발길이 머문 곳은 화실 앞이었다.
화실 앞에서 머뭇거리는 때 뒤에서 내어깨를 잡는 손이 있었고 그 손은 다름 아닌 이하영선생님의 손이었다.
하영 " 여기서 뭐하니? 몸은 괜찮은거야? "
낙하 " 네. 이제 괜찮아요. "
하영 " 그럼 다시 화실 나와야지. "
낙하 " 아뇨. 저 그림 관두려고요. "
하영 " 왜? 무슨 일 있었니. "
낙하 " 나중에 따로 찾아뵙고 말씀 드릴께요. 오늘은... "
하영 " 그래. 참 잠깐만 기달려라 "
이선생님은 화실로 급히 들어갔고 잠시후에 넘어질듯이 희진이가 달려나왔다.
희진 " 괜찮은거야? 걱정 많이 했어. "
낙하 " 괜찮아 이제. "
희진 " 아직 안색이 안좋은데. "
낙하 " 아냐 걱정하지마....참 희진아...나 있잖아 그림 그만 그릴꺼야... "
희진 " 뭐. 왜? "
낙하 " 그냥. 너무 힘들어서..... "
희진 " 한해만 더 고생하면 되는데 왜....도대체 "
낙하 " 남은 1년을 버틸 자신이 없다. 넌 꼭 홍대에 가야해...나랑 약속하자. "
희진 " 나하고 같이 가기로 했잖아. 이제와서 왜 약한 소리하는거야? "
낙하 " 아냐. 어쩌면 나 이미 포기하고 있었는지 몰라.....더 이상 자신도 없고.미안하다 나이만 갈께... "
희진 " 안돼. 나랑 이야기 더해... "
낙하 " 아니 다음에 이야기 하자. 나 간다. "
희진이를 등지고 돌아서는 내 볼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흐느낌에 혹시 어깨가 들썩일까 숨을 죽이고 발걸음을 제촉하여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을 돌아선 내 발은 그 순간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내진 못했지만 세상의 모든 한을 가슴에 품은 듯 그치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움직일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내 의지를 스스로 꺽고 그토록 원하던 일을 포기한 억울함에 눈물이었기에 그러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림을 포기한 후 난 아버지와는 군제대후까지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에 내 생활은 180도 바뀌어 학교내 문제아라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학교내 선생님들의 요주의 학생으로 낙인 찍혔다.
수업시간에는 잠만 자기 일쑤였고 땡땡이는 기본이었으며 아이들 돈을 뺏어 친구들과 그 당시 이태원 나이트나 돈암동 술집들. 대학로 마로니에 등에서 허구헌날 쌈질에 술판이 전부 였다.
한번은 술에 취해 돈암동 길거리를 가다가 조폭쯤으로 보이는 녀석들과 시비가 붙어 갑자기 꺼내든 사시미에 죽을뻔 했을 때 친구 태우녀석이 가로막아 나는 무사했지만 태우녀석은 허벅지에 사시미를 5센치 이상 찔리는 사고가 있었다.
지금은 미국에 건너가 지내는 그 녀석에게 큰 빛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인생을 포기한 놈처럼 되는데로 살아가겠다는 심산이었는지 집에도 일주일에 두세번 옷을 갈아 입으러 들어가는게 고작이었다.
고등학교 학창시절의 마지막 1년을 난 그렇게 보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희진이와 거리가 멀어졌고 거의 보지도 못하며 아니 오히려 내가 희진이를 피하며 지냈다.
어쩌면 내 삶에서 지우고 싶은 1년여의 시간이지만 그 당시 남들이 문제아라 칭하던 친구놈들은 내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보석같은 존재들이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제일 선명한 기억속에 한장의 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