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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적인 복통으로 내원한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보통 응급실은 혼잡하고 중한 환자가 많이 있기 때문에, 검사에 별 이상이 없는 위험해 보이지 않은 환자는 간단하게 결과를 설명하고 환자의 증상이 호전됐다고 하면 다음날 외래로 방문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복통으로 방문한 70대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방문해 아침까지 혈액검사와 수액치료를 받았고, 진찰과 문진, 혈액검사 결과에 특이 소견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증상이 호전됐는지 물어보니 아직 배꼽주위 통증이 남아있다 하였습니다.
진통제를 더 사용할까 CT를 찍어 다른 이상을 확인해야 하나 고민이 되어 증상이 어떤지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할머니의 복통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수 년 전부터 복통이 지속되고 식사만 하면 불편하고 체해서, 1개월 전 내과의원에서 위, 장 내시경을 확인했고 복부 CT도 확인했으나 이상이 없었다는 얘기를 하십니다. 이제 MRI를 찍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번에는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물어보셨습니다.
"할아버지, 배는 장이 계속 움직여서 필요하면 CT로 확인해야지 MRI는 못 찍어요."
그래도 아직 검사가 부족했다 생각하시는지 계속 다른 검사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럼 입원해서 금식하고 며칠 지켜보자 하니 이번엔 할머니께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입원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참을 이런 대치가 계속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이젠 할머니 속이 아닌 내 속이 부글대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검사 다 하신 것 같으니까
입원해서 금식하고 지켜보시거나 약 드시고 외래에서 보시거나
딱 결정을 해주세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차갑게 얘기했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신지 선뜻 결정을 못 하셨습니다. 마침 다른 침상에 환자도 없고 여유 있는 아침시간이라 이번엔 내 마음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 그동안 여기저기서 검사 많이 받으셨는데
아직 궁금하신 게 많으신가 봐요
오늘 환자 없을 때 오셨으니 이 기회에 자세히 다 물어보세요
그리고는 아예 옆 침상에 걸터앉아 자세히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할머니는 복통의 원인을 찾으려 CT 등 검사결과를 가지고 대학병원 소화기내과에 갔으나 검사 결과도 자세히 보지 않고 입원할 필요 없다며 부랴부랴 돌려보낸 교수님 얘기를 시작으로 그 동안 병원에 방문하면서 섭섭했던 이야기를 30여분에 걸쳐 줄줄 쏟아내시기 시작했습니다.
"대학병원은 환자도 많고 바빠서 자세히 설명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CT 검사는 직접 안보셨어도 판독 결과지 보신 거니까 걱정 마세요. 다 확인하신 거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요즘 혼자 지내시며 우울감이 심해 매일 수면제를 먹고 지내고 계신 외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할머니, 요즘 잠은 잘 주무세요?
그랬더니 이번엔 밤마다 속이 답답하고 열불나고 등 뒤에서 바람이 드는 것 같다, 원래 본인은 외향적인 성격인데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돈만 아끼는 할아버지 때문에 힘들고 잠도 못 잔다는 등 한바탕 섭섭한 얘기를 풀어내셨습니다.
"할머니, 남자들 중에 사근사근하고 표현 잘하고 이벤트도 잘하는 남자는 몇 없어요, 저도 그래서 와이프랑 자주 싸워요."
할머니는 맘이 좀 풀어지셨는지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며 집 앞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입원할까 고민하십니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 얘기를 쭉 들어보니까 스트레스가 많으셔서 소위 화병으로 배가 아픈 걸 수도 있겠어요. 진정되는 약이랑 소화제 해서 3일치 드릴 테니까 약 드셔보시고 월요일 내과로 나와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할머니는 입원 안 해도 되겠냐며 좋아하십니다.
꼭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는 환자가 아니라도 주위에는 현대 생활을 하면서 발생한 우울감, 소위 화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충분히 긴 문진을 한다면 파악할 수 있겠지만, 하루 백 명에 가까운 환자를 봐야 하는 우리나라 의료 현실의 의사에게는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봐야할 겁니다.
그래서 환자나 의사나 결국 여러 가지 검사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모든 비싼 검사를 다 마치고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환자는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그 분야 전문의가 있다는 더 큰 대학병원을 방문합니다.
3분 진료에 예외일 수 없는 대학병원에서도 이 상황은 마찬가지로 이어집니다. 긴 시간 기다려 겨우 만난 교수님으로부터도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하고 좀 더 지켜보잔 얘기만 듣게 되는 것이죠. 결국 실망한 환자와 가족으로부터 '너무도 바쁜 의사들은 약 먹고 지켜보자는 소리밖에 안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됩니다.
진주의료원 사태로 촉발되어 최근 화두가 된, 공공의료를 폐업의 위기로 몰아넣은 의료보험 수가 문제를 포함해, 결국 돌고 돌아 꼬여버린 대한민국의 의료 전달체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출처 | https://brunch.co.kr/@csj3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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