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김구 암살
김구선생님은 1876.7.11일 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다.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하였고,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1911년 '안악사건'으로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1915년 출옥하여 동산평 농장 농감이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1928년 이시영,이동녕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총재로 지냈다. 1932년에는 이봉창,윤봉길등의 의거를지휘하였고, 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였고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가 권총으로 김구선생님을 암살하였다. 26일 11시30분경 육군정복 차림의 안두희는 김구가 거처하던 경교장을 방문 면회를 요청하고 김구를 만나자 권총으로 쏘아 살해했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살해 동기는 남북협상에 응함으로써 정치와 사회를 혼란캐하였기때문이라고 했다. 1949년 8월 7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그는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았으나(조국의 지도자를 살해했는데 겨우 무기징역?) 한국전중에에 석방되어 군에 복귀하였고 중령까지 승진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안두희에 대한 형집행정지의 부당함이 논란되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그 배후 및 사건의 진상은 오늘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네이버 지식백과] 김구 암살사건 [金九暗殺事件]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김구선생님 암살자 안두희(安斗熙)
1949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안두희는 범행 48일 만에 두 계급(대위)이나 파격적으로 특진했다. 그러나 8월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되어 복역을 하게 됨으로써 대위 계급에서 파면되어 전역했다.6·25전쟁이 나자 안두희는 이틀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전쟁 초기에 이승만 정부는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그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장교가 된 그는 1951년 12월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군대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1953년 안두희가 전역할 당시 계급이 소령인지 중령인지는 확실치 않다. 자유당 치하에서 안두희는 군납공장을 차리고 건설회사를 경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4월혁명으로 이 정권이 무너지자 그때부터 가면을 쓰고 쓰라린 도피생활을 했다. 다행히 1년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다시 편안한 생활을 했는데,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또 쫓기기 시작했고, 붙잡혀 맞으면서 몇 번이고 자백을 강요당했다. 늙은 안두희는 외국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그것도 막혔고, 그러다가 1996년 당시 버스기사 박기서한테 구타당해 생을 마쳤다.
출처 | 제 블로그에 올린글 http://blog.naver.com/juhyun1100/220445413110 |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