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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sisa_22404
    작성자 : 무법천지
    추천 : 1
    조회수 : 293
    IP : 124.254.***.115
    댓글 : 5개
    등록시간 : 2006/06/03 09:32:19
    http://todayhumor.com/?sisa_22404 모바일
    시사 소설 - 스톡홀름 증후군

    봄날 아침답지 않게 우중충하다. 스모그로 눅눅해진 부연 공기 사이로 낮달 같은 해가 창백하게 떠 있다. 아까부터 기혁은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당신이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 이렇게 사는 거,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아침도 못 먹고 힘없이 집을 나서는 기혁에게 수민은 기어코 이렇게 쏘아붙이고야 말았다. 언제부턴가 두 사람 사이에 웃음이 없어졌다. 수민은 사사건건 짜증을 냈고, 그런 수민을 기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같은 마을에서 자랐다. 손바닥만한 마을에서 동갑네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어느 날, 어른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텅 빈 수민이네 흙벽돌집 부뚜막에서 아궁이에 콩을 구워 먹다 말고 수민이는 불쑥 이렇게 말했었다. 

    “나 있지. 나중에 크면 너한테 시집갈 거다.” 

    세월이 흘렀고, 고향을 떠난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2년 전 졸업 20주년 기념행사 때문에 찾아간 고향 모교에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추억을 더듬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승구야. 승구 맞지?” 
    “그래 임마, 우기혁,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 
    한승구. 그는 고향마을에서 손꼽는 부자인 양조장집 외아들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차표 고무신을 신고 축구를 하던 시절에 번쩍이는 가죽 축구화를 신고 나타나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던 친구가 바로 한승구였다. 
    기혁은 승구와 친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승구가 치사하게도 초콜릿 따위로 친구들의 환심을 사서 대장 노릇을 하는 것도 재수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부모님들이 승구 부모에게 굽실대는 게 싫었다. 
    기혁이네는 지주인 승구네 땅을 얻어 농사를 짓는 마름이었다. 당시 그 마을주민 대부분이 승구네 땅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승구 부모의 횡포가 무척 심했고, 게다가 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챙긴다는 사실을 기혁은 어른들의 한숨 섞인 대화를 들어 알고 있었다. 
    “기혁이 너 뭐하냐?” 
    “응, 경찰관이야.” 
    “그래? 너 같은 순둥이가 어떻게? 근데… 아직 말단이네. 야 임마. 봉급쟁이 생활해서 언제 돈 벌겠냐? 자기 사업을 해야지.” 
    내가 준 명함을 잠시 살펴보던 승구가 이렇게 말하면서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그의 거만한 태도가 마치 날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승구가 건넨 명함에는 ‘一國 파이낸셜 대표이사’라는 금박 글씨가 또렷했다. 
    “아참, 내가 누구랑 결혼한 줄 알면 놀라겠구나. 여보, 이리와 봐.” 
    이내 푸른색 원피스를 말쑥하게 차려입는 여인이 승구 옆으로 다가와 섰다. 수민이였다.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의 눈빛에 어쩐지 수심이 가득하다고 느꼈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좋아했던 것은, 수민이 그에게 시집오겠다고 한 약속은 그저 추억일 뿐이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수민을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 후였다. 옆집에서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기혁이 동료 경찰관과 잠긴 문을 부수다시피해서 들어간 집 안에 수민이 있었다. 
    그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거의 알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퉁퉁 부은 얼굴은 어디가 찢어졌는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두 팔은 뒤로 돌려져 양 손목이 전기줄로 묶여 있었다. 
    직감적으로 강도가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경찰관에 의해 욕실에서 수갑을 차고 끌려나온 것은 다름 아닌 한승구, 그녀의 남편이었다. 승구는 기혁을 발견하고는 반색을 하며 ‘억울하다’고 했다. 부부싸움인데 어떤 놈이 신고했느냐고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도 한참 넘는 것이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설을 퍼붓는 승구를 동료들이 순찰차에 태워 경찰서로 간 후, 기혁은 수민을 부축하여 병원에 데리고 갔다. 진찰결과 코뼈와 앞니가 부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를 진찰한 의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온 몸에 뼈가 성한 곳이 없네요.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곳이 수십 군데나 돼요. 그리고….” 
    의사는 다소 민망해 하면서, 그녀의 허벅지 깊은 곳에 담뱃불로 지진 흉터까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기혁은 치를 떨어야 했다. 
    “왜 그러고 살아?” 
    경찰서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조수석에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은 수민에게 기혁이 물었다. 수민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잔뜩 웅크린 그녀의 어깨가 한없이 작아보였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들려준 이야기는 기가 막혔다. 
    수민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우연히 연락이 닿는 고향 친구들 몇 명이 만났다. 향우회라도 조직하자는 대화를 나누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든 수민이 깨어난 곳은 여관방이었고, 알몸으로 누운 그녀 옆에는 역시 알몸인 승구가 코를 골고 있었다. 이 일로 수민이 임신하는 바람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정붙이고 잘 살려고 했었단다. 솔직히 돈을 잘 버는 승구 덕에 호강하며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단다. 그런데 승구는 결혼 직후부터 수민을 업신여기면서 아주 대놓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참다못한 수민이 따지고 들자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더니 차츰 그 정도가 심해져서 얼마 후부터는 옷을 모두 벗기거나 손을 묶어 놓고 허리띠로 때리고 마구 주먹질 발길질을 했다. 
    “그렇게 6년을 살았어. 부잣집에 시집보냈다고 좋아하시던 부모님 생각해서 참고 또 참았지. 하지만 이제는 버틸 수 없을 거 같아. 날 죽여 버릴 지도 몰라.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경찰조사에 수민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조사과정에서 승구가 조직폭력배를 끼고 사채업을 한다는 사실, 돈을 제대로 갚지 않는 채무자를 감금하고 쇠파이프로 때려 채무자의 건물을 빼앗은 사실 등이 추가로 밝혀져 승구는 구속되었다. 몇 달 후, 수민이 경찰서에 찾아왔다. 부쩍 밝아진 모습이었다. 
    “이혼했어. 사실은 이혼조건으로 합의서 써줬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어린 시절 서로 좋아했던 사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민은 자신을 지옥에서 구해 준 기혁이 믿음직스러웠고, 기혁은 수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운명. 기혁은 수민과의 만남이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두 사람은 운명에 끌리듯 결혼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민의 태도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주로 돈 문제였다. 수민은 승구놈과 살면서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풍족했던 모양이었다. 고급차를 몰고 다니면서 골프를 치는 것이 수민의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기혁의 봉급에서 매월 주택 융자금을 갚고 남은 돈을 쪼개어 빠듯하게 살아야 하는 데 대해 수민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술을 먹고 늦게 귀가하는 일도 많았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어제 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왔던 수민은, 오늘 아침 아침밥을 준비하기는커녕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참다못한 기혁이 나무라자, 수민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다고 참견이야? 승구씨도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았어.” 
    “뭐라고? 당신 정말 왜 이래? 승구가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었는지 잘 알잖아. 설마 개처럼 맞고 살던 그 때가 그리워지기라도 한 거야?” 
    “몰라. 모른다고. 당신 결혼할 때 나한테 뭐랬어? 행복하게 해 준댔잖아. 이게 행복한 거야?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 이렇게 궁상떨며 사는 거, 이젠 정말 지긋지긋해.” 
    사무실에 도착한 기혁이 우울한 기분으로 막 담배불을 붙이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잘 있었냐? 니 덕분에 나도 잘 지내고 있다.” 
    승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침 일과 겹쳐져 짜증이 밀려왔다.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좀 바뻐.” 
    “아니, 뭐, 별 일은 아니고… 수민이가 요즘 고생이 심한 모양이더라. 행색이 말씀이 아니던데?” 
    “뭐야? 이 자식이.” 
    기혁은 사납게 전화를 끊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둘이 만나기라도 한 거야? 아냐! 그럴 리 없어. 6년 세월동안 수민이가 얼마나 시달렸는데.’ 담배를 쥔 기혁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때 오토바이 헬멧을 쓴 남자가 다가왔다. 
    “저, 우기혁씨 맞으시죠? 택배입니다.” 
    택배원이 건네 준 노란 봉투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 한 장의 사진이었다. 그것을 집어들던 기혁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사진 속 호화로운 침대 위에는 속옷만 입은 남녀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남자는 승구였고, 승구에게 달라붙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자는 수민이었다. 
    그 아래 한 귀퉁이에는 촬영일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2006년 5월 31일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06/06/03 10:18:23  220.9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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