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북 위례성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온조 전승의 백제 건국 설화에서 부아악에 올라 주변을 둘러봤는데, 한강 남쪽 땅의 입지가 존나 좋아서 거기에 본진 짓고 백제 세웠어요. 거기가 하남 위례성이에양. 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온조왕 13년, 14년의 기록에서는 어딘가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하는 기사가 존재합니다. 이 앞뒤 기록의 모순 때문에 등장한 것이 하북 위례성입니다. 처음에는 한강 북쪽 어딘가에 있다가, 상황이 너무 안좋으니까 한강 남쪽으로 천도한게 아니냐는 거죠.
하북 위례성은 주장하는 연구자마다 위치에 대해서 여러 썰이 난무합니다. 일단 그들이 말하는 위치를 쭉 나열해보겠습니다.
▶ 삼각산 동쪽(정약용), 서울 종로구 세검정 일대(이병도), 서울 강북 일대(이홍직, 천관우), 한강 북쪽 어딘가(방동인, 박순발), 북한산성(김정학), 중랑천 일대(차용걸, 성주탁, 최몽룡, 김기섭, 김윤우, 이도학), 미아동과 우이동 일대(김용국), 경기도 서북부 지역(김기섭), 북한산 아니면 중랑천 일대(김현숙), 파주~연천 일대(문안식, 임영진)
이 밖에 아예 하북 위례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신희권처럼 있었던 말 건 간에 딱히 그 존재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북 위례성의 존재를 확신시켜줄 만한 유적이나 유물 따위가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썰은난무해도 공통적으로 한강 북쪽 어딘가를 말하고, 그 중 대다수는 서울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강북 지역에 있는 14개 구들의 개발 상태를 생각하면 포기하는 게 편할지도 모릅니다...
2. 미추홀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비류 전승의 건국 설화에는 비류, 온조 형제가 고구려를 떠나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추홀은 인천광역시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하지만 한성백제박물관의 김기섭은 미추홀이 인천이라는 건 고려 시대에 정권을 잡은 인주 이씨가 고향의 연원을 끌어올리기 위해 만들어낸 인식이고, 실제로는 경기 북부 지역(파주, 연천, 양주) 일대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튼 여기서는 미추홀이 인천광역시라는 통설에 따라 쓰겠습니다.
대체로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구의 문학산성 일대로 봅니다. 문학산성이 일단 백제가 쌓은 성이고, 문학산성 근처에 관교동토성이라고 역시나 백제 시대 성 하나가 더 있었어요. (관교동토성은 현재 사라진 상태입니다.) 또 비류가 묻혔다는 전 미추왕릉(경주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미추홀의 왕이라서 미추왕릉.), 비류 우물 등 유독 이 일대에 비류에 대한 민간 전승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썰이 있는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서구 공촌동, 계양구 일대라는 겁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 그리고 재야사학자 한종섭이 주장하는 썰입니다. (근데 한종섭이라는 사람은 환에 가까운 사람이니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이도학은 전근대까지만 해도 국가의 중요 물자 중 하나였던 소금 교역과 관련하여 썰을 풀어나갑니다. 원래 공촌동 일대에는 염전이 있었습니다.
(지도 보시면 알겠지만 지금 인천의 해안선은 전부 간척으로 확장된 겁니다. 예전엔 꽤 내륙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어요. 그래서 남구의 주안동에도 염전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주안에는 국내 최초의 근대식 염전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공촌동에서 만든 이 소금을 공촌동 ~ 계양구 ~ 부천시 오정구 ~ 서울 양천구(= 신정동토성)로 이어지는 길목을 통해 한강에서부터 수로를 이용해 풍납토성, 몽촌토성(= 하남 위례성)까지 운반했다는 거죠. 이를 통해 로또학 이도학 사마께서 말씀하시길, 처음에는 소금 교역을 통해 주도권을 미추홀의 비류 세력이 잡고 있다가 중요 물자의 자유로운 공급을 위해 하남 위례성의 온조 세력이 근성 있는 노력을 통해 비류 세력을 꿀꺽했다는 겁니다.
[참고 자료]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총서 쟁점백제사 3권 - 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
한성백제박물관, 동북아시아 속의 풍납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