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길윤형 기자
[email protected] ‘주거권’ 아닌 ‘계급적’시각에서 접근
△ 2003년 상도2동 언덕에 철거민들이 용역직원들의 눈을 피해 철제탑 '골리앗' 을 세웠다(사진/ 류우종 기자)
8년 전 이곳에서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철거민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1997년 7월25일, 서울 동대문구 ‘전농3동 전농4재개발구역’ 철거민들은 악명 높았던 철거용역업체 ‘적준’과 마지막 대결을벌였다. 이날 오후 6시께 주민들이 “적준의 침탈을 막기 위해 만든” 고공 망루 ‘골리앗’에 불이 붙었다. 박씨 등전국철거민연합 소속 주민 10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10m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을 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바닥에부딪쳐 ‘뇌사’ 상태에 빠진 박씨는 이튿날 숨을 거뒀다. 201동을 빙 돌아 후문으로 향하니 “여기 자본의 수탈, 관료들의억압에 온몸으로 맞선 당당한 여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쓰인 추모비가 남아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전한다.
지난 4월16일 새벽, 경기 오산시 수청동 세교택지개발지구 안에 있는 4층짜리 우성그린빌라옥상에 또 하나의 ‘골리앗’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어, 저게 뭐지?” 철거민들에게 허를 찔린 철거용역들은 안전장비도 제대로갖추지 않고 옥상 진입을 시도했다. 화염병과 골프공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철거작업을 벌이던 이아무개(26)씨가 화염병을 맞고불에 타 숨졌다.
전국철거민연합 간부 성아무개(39)씨가 “내가 화염병을 던졌다”며 자수해 살인 혐의로 4월26일 구속됐지만,모두 집주인으로 알려진 철거민 8가구 10여명은 농성을 풀지 않고 벼랑 끝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1987년 이후 도시 철거민의 가열찬 투쟁 속에는 늘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옛서울시철거민협의회)이 있었다. 이들은 “철거민은 곧 노동자”라는 명제 아래 철거민 문제를 단순한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로보지 않고, ‘계급적’인 시각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철거 뒤 주민들이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있는 영구임대아파트 수준의 싼 집과, 그 집을 지을 때까지 주민들이 임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 제공’ 등이다.남경남 전철연 의장은 “철거민 운동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주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며 “희생 속에서 운동이 발전되기도한다”고 말했다. 전철연쪽은 그동안 “우리와 함께 투쟁해 50곳이 넘는 지역에서 공증된 문서로 요구사항을 관철해왔다”고 목소리를높였다.
그렇지만 민중진영 내부나 다른 철거민 단체들은 “전철연의 과격한 구호가 단지 구호로만 남는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22일 전국철거민협의회 중앙회(전철협)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철연과 같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은 더 이상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호승전철협 지도위원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으로 철거용역 회사에 돌아가는 용역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며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든다”고 말했다.
80년대 논리와 관성 바꾸지 않았다
폭력 대결도 불사하는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지도부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현재 전철연은 남경남(51) 의장, 고천만(47·구속) 부의장, 양해동(59) 집행위원장 등3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전철연에 몸담았던 철거민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들은 모두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철거운동에 뛰어든 지역 철대위원장 출신으로,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의 전성기를 이끈 철거운동 1세대와 김수현 청와대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기획운영실장 등 이른바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에게 교육을 받고 10년 넘게 전철연을이끌어왔다. 1세대 운동가들은 운동을 접었거나 ‘주거권 실현을 위한 전국연합’(주거연합) 등 다른 운동단체나 학계로 진출했다.
남경남 의장은 경기 수지 풍덕지구 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1991년 철거민운동에뛰어들었다. 이후 경기도철거민협의회 의장으로 발돋움한 뒤, 1994년 만들어진 전철연 의장이 됐다. 부의장 고천만씨는 경기용인구갈 세입자대책위원장 출신으로 남경남씨와 함께 경철협 부의장을 지냈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양해동(그는 몸이 아파 활동을잠시 중단한 상태다)씨는 서울 청량리1동 철거민 출신으로 1989년 길거리에서 서울시철거민협의회 유인물 한장을 우연히 집어들면서빈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그는 청계천 노점상 출신으로 민주노동당 후보로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2번이나 출마한양연수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란히 1999년 경기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사건과 구리 최촌마을 화염병 투척 사건 등으로 한두 차례씩 옥고를 치렀다.
이들을 잘 아는 옛 동지들은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이끌던 1세대활동가들이 빠져나간 뒤 아직도 80년대 운동 논리와 관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운동의 주체세력이바뀌면서 서철협을 이끌었던 활동가들에게 교육받았던 논리와 투쟁 방법을 발전적으로 해체해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2002년 8~9월 <말>의 보도로 전철연 중앙이 지역 철거민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를 장악하기 위해 저지른‘악행’이 폭로되고, 돈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또는 ‘확인하기 힘든’) 추문들이 겹치면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철연은 그야말로 수많은 사건·사고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들만 꼽아도△1996년 신연숙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7년 민병일씨 폭행 사망·박순덕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9년 수원 권선4지구사제총 사용 △2000년 민주당 화염방사기 난입 △2003년 서울 상도동 컨테이너 추락 △2004년 고양파출소 화염병 투척 등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투쟁중 숨진 35명, 전철연과 직·간접적 연관
한국도시연구소가 1998년 펴낸 <철거민이 본 철거>를 보면 1998년 현재까지철거투쟁 과정에서 숨진 철거민은 모두 29명이고, 전철연은 이후 7년 동안 숨진 ‘열사’가 모두 6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그동안 철거투쟁으로 숨진 35명 대부분이 전철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철거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감옥에 갔는데도, 전철연은 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경기 수원 권선3지구 철거대책위원장 홍경희(40)씨는 “전철연 같은 철거민 조직 말고는철거민들이 기댈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집회 때마다 앞장서 시위를 주도하는 전철연의 대표 ‘투사’다. 그는1988년 울릉도에서 푸른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섬처녀’다. 울릉도 처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도시는 ‘이촌향도’ 마지막세대인 홍씨를 반겨주지 않았다.
16년 전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딸 셋을 낳아 기르는 10년동안 “이삿짐을 채 풀지도 못한 채” 수십번도 넘게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1996년 수원 권선동에서 보증금 100만원, 월세15만원짜리 방에 살고 있을 무렵 “주변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갈 데가 없었다”는 홍씨는 자연스럽게 전철연에발을 들여놓게 됐다. 실천은 성과를 낳았다. 3개월 투쟁 끝에 8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가이주단지에 입주할 때는 감격에 겨워엉엉 울었다. 그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고통을 보면, 꼭 내 일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모두가 홍씨처럼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최국자(45·여)씨는 “이제는전철연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경기 의왕시 내손택지개발지구 철거민인 최씨는 2000년 6월9일 서울 여의도민주당사에 소형 화염방사기를 들고 난입 농성을 벌여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아무리 투쟁을 해도 세상에서관심을 안 가져주니까 항의집회를 하자는 것인 줄 알았죠. 그런데 현장에서 화염방사기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최씨는“1999년 12월 한겨울에 강제철거가 됐는데도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전철연에 많이 의지를 했었다”며“생업을 포기하고 투쟁에 나서는 과정에서 수천만원씩 빚만 졌다”고 말했다. 최씨의 남편(42)은 최씨의 구속에 항의하다 잡혀부부는 영등포 구치소 감방 동기가 됐다.
많은 지역에서 철거민들은 전철연식의 극단적 투쟁 전술에 혀를 내두른다. 안암동 재개발지구 철대위원장을 지낸 이영철씨는 “전철연의 의사결정 방식이 지나치게 폐쇄적이어서 불만을 품는 철거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골리앗 만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 넘어
“전철연 지도부가 지역 철거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하는 말이뭐냐면, 평생 살 집을 만들어줄 테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럼 사람들이 생계가 막막해지니까 절반 정도 떨어져나가.남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다른 지역 집회에 쫓아다니라고 하거든. 그럼 사람들이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또 절반 정도떨어져나간다고. 그 과정을 거치면 철대위에 남는 사람들은 5~10가구밖에 안 돼. 거기서 이제 골리앗을 만들어야 하니까 돈을걷자고 한다고.” 골리앗은 만드는 데 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철거민들이 카드빚을 내 그 비용을 댄다. 그가 속한안암동에서도 2002년 2월 철대위가 꾸려질 때 50명이었던 주민들이 3개월 만에 20명대로 줄어들었다.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성실하게 따르다 보면, 생계를 포기한 주민들은 수천만원씩 빚이 쌓이고곳곳에서 휘두른 폭력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투쟁에 더 매몰될 수밖에 없고, 점점 전철연의 명령에복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지금 경기 오산에서 ‘골리앗’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죽을 때까지이곳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 전 철연 주도의 철거민 투쟁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1997년 전농3동 전농제4재개발구역의 농성 중 (왼쪽)에는 철거민 박순덕씨가, 1996년 경기 용인수지택지개발지구 강제철거 과정에선 철거민 신연숙씨가 사망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 강창광 기자)
벼랑으로 몰린 철거민들에게 전철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제명’이다. 취재 중에 만난 철거민들은 “철거민에게 ‘제명’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특히 아직 투쟁이 계속되고있는 지역의 경우, ‘제명’을 당하면 철거민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협상이 잘 끝나면 살 집과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민사상의 고소·고발 사건이 모두 유야무야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는 상황에서 철대위에서 쫓겨나면, 철거민들은수천만원의 빚을 떠안은 채 범죄자로 전국을 떠돌아야 한다. 그 와중에 사람이 죽기도 한다.
2001년께 최덕자(45·사망 당시)씨 등 경기 의왕 오전동 재개발 지역에 남은 철거민3가구가 싸움이 붙었다. 주민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모아둔 운영자금 700여만원을 전철연 중앙에서 “간부 도피자금으로사용한다”며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친 주민들은 전철연이 요구하는 연대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3가구 가운데 최씨네 가족을 뺀나머지 2가구는 지역을 떠났다. 전철연은 이 지역 철대위원장이던 최씨를 ‘제명’했다. 최씨는 아파트 숲으로 뒤덮인 마을에서움막을 지어놓고 3년 넘게 생활했다. 남편과 말다툼이 잦아졌고, 2003년 11월 최씨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최씨가 죽을 때 그의 집은 300만원, 보증금 20만원짜리였다.
전철연은 이미 비민주적인 전위 조직으로 퇴화해 서철협 시절의 활력을 잃은 모습이었다. 현재전국 35개 철대위와 공동 투쟁을 하고 있다지만, 적극적으로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100명 안팎에 불과하다. 경기 안양유진상가 세입자대책위원장으로 전철연과 6년 동안 같이 활동해온 정동열(62)씨는 “운동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운동의 순수성이결여돼 있다”고 말했다.
“철대위원장이 중앙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철저하게 배제를 합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빨리투쟁을 끝내고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큰데, 주민들이 직접 상대쪽과 협상을 못하게 하거든요. 철거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것은 현장 주민이고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데, 비타협 투쟁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저마다 확인 불가능한 전철연 간부들의 비리를 제보해왔다.그렇지만 전철연 때문에 고통을 겪은 이들도 대부분 이들의 결벽성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왜 전철연을 둘러싼 추문은끊이지 않을까. 어렵게 수소문해 만난 옛 철거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운동을 진행하다 보면, 건설을 통해 막대한이익을 얻게 되는 건설자본들이 돈을 미끼로 협상을 제안해옵니다. 여기에 굴복하면 운동이 끝나는 거고, 이겨내더라도 주민들 사이에분란이 생깁니다. 전철연도 중앙에서 나온 2~3명의 핵심간부가 건설회사나 재건축 조합과 밀실협상을 합니다. 돈과 관련된 논란이끊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밝혀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비판에도 전철연은 아직 변화를 모색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변화를이끌 내부 역량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4월24일 밤 어렵게 만난 남경남 의장(그는 지금 수배중이다)은 “사람을 죽이는 정부의 철거민 대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흡사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 듣고 있는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200만 철거민 투쟁에 앞장서 피흘려온 전철연.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 전농SK아파트 201동 뒤. 박순덕씨 추모비에 한가롭게 내리쬐는 4월 봄 햇살이 무참했다.
<월간 말> 9월호에 실린 관련 기사 전문이다.
전국철거민연합의 추악한 실체
"그들이 철거민들을 테러하고 쫓아냈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은 항상 철거민 운동의 맨 앞에 있었다.
"지상의 방 한 칸" 조차 누릴 권리도 없이 용역깡패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짓뭉개지는 철거민들의 싸움마다 전철연이 함께 있었다.
이 "처절한" 싸움의 과정에서 철거민의 "죽음"까지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믿기지않겠지만 이 투쟁의 배후에는 생존권을 볼모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는 전철연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오성 기자
[email protected] 기자는 지금 참담한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수구권력의 폭압을 고발하거나 파렴치한의 비도덕을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을 위해 싸우는 한 "민중운동 조직"의 행태를 폭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본지는 지난호에서 <취재수첩/ 전철연과 철거민들과의 씁쓸한 불화>를 통해 전철연과 안암동 철거민들간의 갈등상황을 보도한 바 있다.
전철연측이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안암동 철대위에게 본때를 보이기 위해 학생 규찰조를 철수시켰고, 그로 인해 안암동이 철거용역들에 의해 초토화됐다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그 후에도 사과와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주민을 철대위 위원장으로 선임하는 등 주민분열을 "획책"한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안암동 사태를 취재하는 내내 전철연의 "실체"에 대한 부정적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확인되지 못한 여러 소문들이 떠돌기도 했다. 대부분 안암동의 경우처럼 자신들을 "추종"하지 않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기자가 지난 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동3동 철거투쟁에 대해 "충격적인" 증언을 들은 것은 9월호 마감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이었다.
1997년 7월 25일 서울시 전농동 재개발지역 철거중 망루에서 떨어져 사망한 고 박순덕씨 사건은 모두에게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 직후 많은 운동단체들과 대학생들이 철거싸움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감추어진 진실은 또 다른 곳에 있었다.
8월 14일 밤. 기자와 마주 앉은 김홍섭(51・당시 전농3동 철대위원장)씨는 박순덕씨가 사망하기 한 달 전 전철연측이 주민들을 "테러"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악몽"을 떠올리듯 "그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6월23일 새벽 4시였다. 검은 옷에 복면을 쓴 15명의 사람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골리앗(철거민들이 세운 고공망루)을 침탈했다.
당시 골리앗을 지켰던 주민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쇠파이프로 온몸을 두들겨 팼다. 처음엔 이들이 철거 용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같은 주민들이었다.
박순덕씨도 거기 있었다. 골리앗 근처에 살던 주민들마저 모조리 쫓아냈다. 6월 23일은 바깥에 알려진 것처럼 그들의 골리앗 농성을 시작한 날이 아니라 디데이를 잡고 골리앗을 빼앗은 날이다." 6월 23일. "주민테러사건"의 진실 1997년 당시 전농동 철거민들은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었다. 이날 "테러"를 자행한 이들(7가구)은 전철연에 속해 있었고, 김홍섭씨를 비롯한 나머지 주민(30여 가구)들은 전철연과 거리를 둔 상태였다.
전철연측에 속해 있던 주민들은 다른 주민들과 단절한 채 모든 일을 전철연 중앙과 논의하면서 골리앗 규찰에도 나서지 않았다.
안암동 이영철 위원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홍섭씨도 전철연에 의해 여러 음해를 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전철연의 지시를 받은 건 어떻게 알았나? "사건이 벌어진 후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전철연의 이태교 의장, 남경남(현 전철연 의장)씨, 수색 철대위원장 등이 사수대를 끌고 골리앗으로 들어갔다. 자기들이 들여보낸 15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철연이 타 지역의 철거민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네 군데에서 밀고 들어갔다.
그들은 골리앗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선 우리 주민들이 짐을 챙기려고 자기 집에 접근만 해도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져댔다.
같은 주민들한테 말이다.
그날 저녁쯤에 그들이 우리 주민 전부를 전농동 네 거리까지 몰아냈다. 그때에도 전철연 간부들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들이 골리앗을 뺏은 이유는 뭔가? "내가 주민들을 설득해서 SK건설로부터 돈 받아먹고 싸움을 끝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와 임원들을 제명하면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했다. 결국 자기쪽 사람들로 전농동을 접수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날 "철거민으로부터 쫓겨난" 30여 가구의 주민들은 졸지에 철거민이 아닌 "노숙자"가 되고 말았다. 쫓기는 과정에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만도 30명을 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피부에 경련이 인다. 같은 철거민을 어떻게 그렇게... 그런데 당시에 누구도 우리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전철연은 우리를 돈 받고 타협하려 하는 더러운 놈들로 몰았다." "내전"이 벌어진 다음 날. 경찰이 골리앗 주위를 샅샅이 포위한다. 30여 가구의 주민들은 자기 집을 빼앗긴 채 근처에 천막을 치고 공동생활을 해야 했다.
전철연측 주민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였지만, SK측과의 합의를 거부하고 가수용단지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박순덕씨가 투신한 7월25일,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박순덕씨만 골리앗에 남아 있게 된 이유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 후 골리앗에서 하도 돌과 화염병이 날아오니까 우리가 SK측에 안전모를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골리앗에 남아있던 부녀자 7명이 SK측에 쳐들어가 왜 주민들에게 안전모를 지급하느냐며 항의를 하다 붙잡혔다.
우리가 SK측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날 박순덕씨는 밥하는 당번이라 빠졌고, 결국 여자로선 박순덕씨 혼자 골리앗에 남게 된 상태에서 7월25일 강제철거가 자행된 것이다" 결국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결과,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끝내 "참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주민들을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만드는 전철연이 어떻게 운동조직인가"라며!!!!!
"박순덕씨를 죽음으로 내몬 데에는 전철연의 책임이 크다"고 치를 떨었다.
그는 "나 말고도 이를 증언해줄 사람들이 많이 있다"며 진실을 알려줄 것을 호소했다.
김홍섭씨를 비롯한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거쳐 SK측과 합의를 시작한 것은 박순덕씨의 사망사건이 일어난 후였다. 이들은 모두 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골리앗을 침탈하면서까지 극한 투쟁을 벌였던 나머지 7가구는 수감생활을 끝내고 1999년 7월에서야 SK측과 임대아파트 입주문제를 "합의"한다.
오히려 세월만 낭비했을 뿐, 마찬가지 결과였다.(전철연은 자신의 홈페이지(www.nodong.com/junchulyun)를 통해 이 "합의공증서"를 승리쟁취의 "증거"라며 내세우고 있다.) 전철연은 "안암동 침탈"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문제는 전철연의 이 같은 행태가 여전히 "현재진행"이라는 점이다.
전철연은 왜 이처럼 주민들을 분열시키려는 것일까.
이영철 안암동 철대위원장은 "자꾸 주민들을 제명시키라고 하는 것부터 이상했다"고 주장한다.
"규찰 못 서면 벌점 10점, 집회에 안 나오면 벌점 30점, 이런 식으로 벌점이 어느 정도 되면 회원을 제명토록 한다. 먹고살기 힘든 철거민들이 어떻게 매번 집회에 참가할 수 있나? 결국 전철연을 개처럼 따르는 몇 명만 남겨둔 상태에서 건설회사측과 손쉽게 합의를 보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
!!!지금 전철연에 속한 지역들 중에 다섯 가구 이상 남은 지역이 거의 없다.!!!!!!!!!!
이건 건설회사가 원하는 숫자 아닌가." 침탈사건 이후 안암동 주민들과 학생들은 전철연의 "음모"를 파헤칠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을 수집하고 있다. 지난 7월17일. 이들은 철대위 규찰부장으로부터 "전철연이 7월9일 철거용역의 침탈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 증언"을 확보한다. 침탈이 있기 전 전철연 고천만 부의장이 "자기 사람"인 정중영 총무에게만 "빠져나가라"는 지시를 내렸고, 정 총무가 측근인 규찰부장에게 이를 알렸으나 그가 결국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규찰부장이 털어놓은 고 부의장의 지시사항은 이렇다.
"일주일 이내에 전철연 중앙이 안암에서 손을 떼고, 주민들을 몰아낼 것이다. 학생 단위들도 며칠 안으로 한 명도 못 들어오게 하겠다. 며칠 뒤에 철거용역들이 안암을 칠 테니까 정 총무는 빠져 있어라. 짐까지 빼면 명분이 없으니까 몸만 나가라. 침탈 후에 주민들이 분산되면서 철대위가 금방 와해될 것이다.
그때 다시 학생들과 함께 들어가서 골리앗을 건설한 후 중앙의 지원을 받으며 목숨을 걸고 싸워라. 목숨을 내걸겠다는 약속을 해라." 침탈 직후부터 제기됐던 전철연의 "음모설"이 사실임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침탈 당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영철 위원장이 전철연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고 부의장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안암동 주민들이 훈련이 덜 됐으니까 적당히 싸우다 말아라"며 태연히 대답했다.
침탈소식을 듣고 안암동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전철연측 간부들이 입구에서 막았다"는 학생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규찰부장의 증언대로라면 "안암동 침탈"은 전철연의 "자작극"이라는 이야기다. 더욱이 그는 전철연이 철거투쟁 때마다 골리앗 설치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주장했다. "건설회사와의 합의과정에서 골리앗 철거비용으로 3천만원을 받아낸다고 한다. 2천만원 정도는 주민들 주고, 1천만 원 정도는 저희들끼리 먹는다고 전철연 의장단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철연이 주민들에게 카드빚을 내서라도 골리앗 건설비용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고 있다.
이게 빈민운동인가.
" 가난을 파는 운동의 추악함 기자는 이번 사건을 취재하며 놀라움과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복마전"을 연상케 하는 전철연의 실체에 놀랐고, 이들이 여전히 "비타협적 빈민해방투쟁"을 이끄는 "운동조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데에 참담했다.
전철연으로부터 "타협적 개량주의자"로 비난받고 있는 "전국철거민협의회"의 이호승 회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철거민이 목숨을 잃는 데에는 철거민운동진영의 책임이 절반은 된다"며 "철거민을 노숙자, 범죄자로 만드는 도시게릴라전 같은 철거투쟁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라고 개탄했다.
지난달. <말>의 취재요청에 전철연 간부는 "철거민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에 흥밋거리 같은 이야기를 취재해서야 되겠느냐"며 취재를 거부했다.
이제 이 사태는 "흥밋거리"의 도를 훨씬 넘어섰다. 전철연측은 이 사태에 대해 "조직의 생명"을 걸고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2002년 현재. 전철연의 "그물망"에 노출돼 있는 개발지역의 세입자들이 전국적으로 2백만명에 이른다는 현실이 비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