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趙雲, 168년 ~ 229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자는 자룡(子龍)이다. 관우, 장비, 황충, 마초와 더불어 오호대장군으로 불렸다. 주대황의 대체역사소설 [반(反)삼국지]나 이케가미 료이치의 만화 [초(超)삼국지]에는 마등의 딸이자 마초의 동생인 마운록과 결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마운록은 작가가 창작한 가상의 인물로 조운의 부인 이름은 알려진 바 없다.
조운은 상산군 진정현 출신이며, 신장은 거의 8척(약 184cm)에 가깝고, 모습과 얼굴 생김새가 두드러져 근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고향에서 추천되어 관민 의용병을 이끌고 공손찬의 부하로 들어갔다. 원래 조운은 원소의 부하로서 졸백으로 임관했으나 원소가 그릇이 작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공손찬에게 찾아갔다.삼국지연의에서는 창술의 명수로 되어 있으며, 처음에는 원소의 부하였으나 스스로 공손찬 밑으로 달려가고 공손찬을 궁지에서 구하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무렵 유비 또한 공손찬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공손찬이 전해를 지원하도록 유비를 파견해 원소를 막을 때 조운도 유비의 기병으로 종군했다. 이 무렵 조운은 공손찬의 난폭한 성격에 기가 질려 있었고 같이 공손찬의 부하로 있던 유비를 눈여겨 보게 된다. 유비 역시 조운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서로 깊은 유대를 맺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때 조운이 유비의 가신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하지만 유비는 공손찬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
그 뒤 조운은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절대로 당신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는 조운이 공손찬 밑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유비 또한 그것을 깨닫고 마음을 담아 악수를 교환하고 조용히 전송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에게 위압감을 느낀 유비가 원소에게 의지하자 조운은 유비를 접견하고 부하로 들어갔다. 이때 삼국지정사에서는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의형제를 맺은 관우와 장비처럼 똑같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관우와 장비가 유비의 동생의 신분인 것에 비해 조운은 유비에게는 친구의 예우로서 대우를 받았다.
마침내 조운은 유비를 따라 유표가 지배하는 형주로 나아가는데, 당시 형주에서는 권력 승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그에 편승해 조조가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유비는 피난길에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에게 대패, 남쪽으로 도주할 때 조운은 단신으로 적군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유선과 감부인을 구출하는 대활약을 펼쳐 아문장군으로 승진한다.
이 전투 중에 “조운이 아군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고 고하는 자가 있었으나 유비는 “조운은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다” 고 말하며 그 자를 때려 눕힌다.[1]
《삼국지연의》에서는 위나라의 하후은을 죽여 청강검(靑舡劍)을 손에 넣고 유선을 가슴에 품고 적군 한가운데에서 분전, 그것을 본 조조가 생포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운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211년(건안 16년) 익주목 유장이 법정을 파견해 유비를 맞아들이고 북방의 장로를 공격했다. 그러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장과 대립하게 되어 가맹관에서 퇴각해 유장을 공격하지만 군사 방통이 전사하는 등 궁지에 빠진다. 그래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서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을 평정, 강주까지 도착하자 조운은 다른 하천을 통해 강양으로 올라가 제갈량과 성도에서 합류하도록 명령받고 제갈량,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한다. 성도 평정 후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將軍)에 임명되었다.
219년 한중 쟁탈전에서 조운은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지만 조조는 다시 병사를 모으고 군세를 강화해 조운의 진영까지 추격해 온다. 이때 조운은 문을 활짝 열고,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적 진영에 도착한 조조군은 그 정적에 놀라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퇴각했다. 그것을 본 조운은 북을 치도록 지시하고 쇠뇌를 쏘아 배후에서 조조군을 공격하자 깜짝 놀란 조조군은 북새통이 되고 한수에 빠져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다음날 아침 유비는 몸소 조운의 진영을 방문하고 전날의 전장을 시찰하면서 “조운의 몸은 모두 간(肝)덩어리다”라고 칭찬하였고, 군졸들은 조운을 호위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손권이 형주를 습격해 관우를 살해하자 유비는 크게 노하여 손권을 타도하려 했다. 조운은 “먼저 위나라를 멸망시키면 오나라는 자연히 굴복할 것입니다. (중략) 위나라를 방치하고 먼저 오나라와 싸워서는 안 됩니다. 전투가 일단 시작되면 쉽게 풀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유비를 만류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동쪽으로 진군하고, 조운을 뒤에 남겨 강주를 단속하게 했다. 유비가 자귀에서 패배하자 조운은 구원에 나서 영안까지 진군하지만 오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223년(건흥 원년) 중호군 정남장군이 되어 양창정후에 봉해지고, 계속 승진해 정동장군이 되었다. 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고, 228년 함께 위나라로 출병, 제갈량은 사곡 가도를 통과한다고 크게 선전하고, 조운과 등지에게 위나라의 조진을 상대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 틈에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 등은 미끼였지만 조진은 제갈량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기곡에 대군을 파견했으므로 중과부적으로 조운의 군대는 패배했다. 그러나 군병을 잘 수습해 대패를 모면한다. 조운의 군대가 철수한 뒤 패전 책임을 물어 조운은 진군장군으로 좌천된다.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장병의 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등지는 “조운 스스로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장병들은 흐트러짐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고 대답한다. 그리고 조운이 군수품 견사(명주실)를 남겨놓아 제갈량은 그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게 했지만, 조운은 “전쟁에 진 자가 어찌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군수 물자는 모두 창고에 모아 10월 겨울 준비 물품으로 하사받을 수 있도록 하라” 고 명령해, 스스로에 대한 규율을 지켜 패전 책임을 바로잡았다. 이것을 보고 제갈량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229년에 사망하고 261년에 대장군 순평후(大將軍 順平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장남 조통(趙統)이 그의 후사를 이었다. 조운은 관우나 장비와는 달라서 이치에 맞는 행동만 하고 사람들에게 골고루 예를 갖춰 대했기 때문에 유비에게도, 제갈량에게도 인정받았다. 실제로 제갈량이 촉한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조운이었으며 조운이 일생을 마감하자 제갈량은 태어나서 가장 서럽게 통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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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은 위키백과에서...
삼국지정사에서는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정사에서는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정사에서는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되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