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 나라 사람들에게 효유하여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하면 우리 군사가 곧 돌아오겠지만, 만일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신 뿐 아니라 처자까지 포로로 하겠다.""... 라고 황제께서 명령하셨다."1. 시작쿠빌라이 칸이 내린 명령과 그와 함께 딸려준 병력은 원종에게는 압박이자 지원군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온 마당에 원종이라고 강화도에 남을 생각이 없었을 테니까요. 아니, 그 자신이 굳이 북경까지 간 이유가 그거였겠죠. 전쟁이 끝났음에도 개경 환도를 10년 넘게 못 하다가 폐위됐고, 다시 몽고군의 무력과 황제의 명령을 빌려 실행해야 했습니다. 그 자신으로는 국가를 정상화시킬 힘조차 없었던 것이죠. 임연도 죽은 지금, 동녕부라는 인질까지 있는 상황이니 빨리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임연을 이은 아들 임유무는 제대로 대응을 못 합니다. 아니 이건 그 최충헌이 와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죠. 자신의 심복조차도 이 명령을 따라야 된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억지로 산성방호별감과 수로(水路)방호사, 야별초들을 보내 백성들을 섬으로 보내니 하긴 했지만 이미 여론도 떠난 뒤였죠. 경상도 안찰사 최간과 동경 부유수 주열은 이런 명령을 받고 온 야별초를 잡아 가뒀고, 전라도 안찰사 권단, 충청도 안찰사 최유엄 등도 임유무의 명령이 아닌 돌아온 왕의 명령을 울며 반깁니다. 강화도 코 앞인 서해도(황해도) 안찰사 변양도 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는데, 임유무가 사람을 보냈지만 잡지 못 했다고 하죠. 결국 그는 김문비에게 야별초를 거느리고 왕사(왕의 군사)를 막게 합니다. 이제 개경 환도를 둘러싸고 왕과 무신정권 간의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원종이 그대로 강화도에 있었다면 어떻게 압박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육지에 있었죠.이런 대치는 삼별초가 임유무를 죽임으로써 끝 납니다. 이 때 동원된 송송례와 홍문계는 임연의 사위, 임유무가 임연의 측근이었던 그들 대신 송군비 등에게 기대서 불만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임유무의 측근조차도 세상이 바뀐 걸 알았다는 쪽이 맞을 듯 합니다. +) 최씨는 이에 대해 제대로 죄를 묻지 못 하고 한두 신하를 시켜 겨우 죽였다면서 비판했지만, 원종이 가진 게 그 정도였는데 뭘 어쩌겠어요 -_-;임유무가 죽자마자 개경 환도는 탄력을 받습니다. 임유무를 죽인 것은 1270년 5월 14일, 이틀 후에 임유무를 죽인 홍문계 등이 원종에게 찾아갔고, 23일에는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방이 강화도 곳곳에 고시됐으며, 27일에는 원종과 왕비, 빈들이 개경에 도착합니다. 이 때 건물도 의관도 없어서 군복을 입고 천막에 거처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때, 강화도에서는 삼별초는 창고를 마음대로 텁니다.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재물이라도 모아 놓자, 자기들 고생한 거 있는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지 + 개경 가도 우리를 잊지 말라, (이전 편에서 전 이 쪽으로 잡았습니다)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다, 뭐라도 준비해야 된다 이런 것들이겠죠. 물론 고려사에 적힌대로 이 때 이미 "딴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32년에 강화도로 천도해 70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였습니다. 거기다 삼별초는 강화도를 지키는 데 일등공신이었죠. 아무리 임유무를 죽였다 한들, 그들이 이런 변화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순 없었을 것입니다.누가 먼저 한 것일까요? 원종이 바로 삼별초까지 없애겠다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시간이 빠릅니다. 물론 임유무 죽인 여세를 몰아 바로 삼별초도 처리하자고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삼별초의 기세가 커지고 어쨌든 최씨의 잔당일 뿐인데 임유무를 죽인다는 어마어마한 공을 세웠기에 더욱 부담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더라도 이들에게 그런 불안감이 선동으로 변하는 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닐 겁니다. 그들을 이끈 배중손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가 정말 자기는 죽은 목숨이라 두려워 해서였을 수도 있고, 단순한 불안감이 선동으로 이어진 것일 수도 있죠. 거기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랑캐 군사가 온다"는 소문 역시 퍼지기가 어렵지 않죠. 실제 몽고군은 그들이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들어왔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강화도에 들어올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구요.어느 쪽이든 양 쪽의 틈은 벌어져 있었습니다. 원종은 우선 상장군 정자여를 강화도로 보내 그들을 달랩니다. 하지만 그 직후 (정확한 날짜는 없습니다) 원종은 곧바로 삼별초를 해산한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정자여에 이어 김지저가 파견됐고, 그들은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명단을 가져 옵니다. 이런 부분에서 저는 먼저 일을 벌인 쪽은 기록대로 삼별초로 봅니다. 원종이 애초에 그들을 숙청할 마음이었다면 어떻게든 다독여서 육지로 오게 한 후 했을 테니까요. 어느 쪽이든 원종의 대처는 너무 서툴렀습니다. 환도가 성공해서 들떴기에 그럴 수도 있고, 몽고의 압박에 급히 한 것일 수도 있죠. 반대로 임유무를 죽인 삼별초니 자기 명령을 들을 줄 알았는데 이상 행동을 벌인다니 "삼별초까지?" 이러면서 계산 안 하고 바로 해산령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숙청이었든 아니었든 잘 했다고 보기는 힘든 거죠.2. 반란설령 원종이 그저 좋은 마음으로 해산 후 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 주려 했더라도 삼별초에게 곧이 들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힘은 곧 그들의 조직력이었고, 이걸 한 번에 깨뜨렸다는 것, 그것도 임유무를 죽인 지 한 달도 안 돼서 깨뜨린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거기다 그들의 명단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제 원종의 한 마디에 그들 이름 하나하나가 국가의 반역자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6월 1일,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배중손이었습니다. 그는 지유 노영희를 설득해 난을 삼별초를 끌어모은 후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오랑캐 군사가 크게 이르러 백성을 죄다 죽이니, 나라를 돕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구정(연병장인데 격구장-_-으로 쓰였습니다)에 모이라!"그 말을 듣고 강화도 내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얼마 안 가 그들은 진실을 알게 됩니다. 강화도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 육지로 가지 못 한 관리와 가족들이 많았고, 돌아간다고 해서 그들에 해가 될 건 없었죠. 강화도에 있던 백성들 역시 고향으로 가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전쟁이 지긋지긋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지금 반란군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의 말을 따르기를 기대할 순 없었죠.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강화도를 벗어나려다 바다에 빠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삼별초는 급히 금강고(병기창)을 열어 무장하고 염하를 점거해 사람들의 탈출을 막습니다.
"배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는 다 베겠다"
+) 고려사 반역열전 배중손 부분에는 그 대상을 "양반"이라 하고 있습니다. 조선식으로 쓰여진 것일테니 대충 상류층을 뜻 하는 거겠죠. 어차피 그 많은 사람들의 탈출을 다 막을 순 없으니 자신들의 명분을 위해 높은 관리들의 탈출만 막은 게 아닌가 싶네요.
배중손, 노영희가 설득하려 했던 장군 이백기는 거절하여 죽었고, 삼별초 출신이었던 현문혁은 가족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삼별초가 4, 5척의 배로 쫓으니 그가 홀로 활을 쏘아 싸웠는데, 그의 실력이 좋았던데다 아내가 옆에서 바로 바로 화살을 뽑아 주니 쉽게 접근하지 못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배가 얕은 여울에 좌초되고 팔에 화살을 맞아서 다시 끌려가야 했죠. 이 때 그의 아내는 "쥐 같은 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 없다"고 하며 두 딸을 데리고 바다에 뛰어듭니다. 현문혁은 붙잡혀 오고도 포기하지 않아 다시 육지로 도망갔구요.
한편 최의를 죽이는 데 함께 하고 후에 여러 번 귀양을 갔던 유경은 미리 구입했던 배 두 척을 타고 도주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삼별초가 이들을 붙잡았고, 유경은 더위 먹은 것 같다며 작은 배에서 쉬게 해 달라고 했죠. 그는 작은 배로 가자마자 바로 육지로 도주합니다. 삼별초가 그를 잡지 못 했다고 하는데, 큰 배에 온갖 재물이 다 있어서 속도가 느려 못 잡았을 수도 있고, 애초에 거래가 있었거나 재물을 얻었으니 놓아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탈출은 계속됐습니다. 삼별초에 의해 승선을 맡아야 했던 직학 정문감은 "적에게 붙어서 부귀를 누리느니 차라리 지하에서 몸을 깨끗이 하겠다"면서 아내 변씨와 함께 바다로 뛰어듭니다. 이외에도 참지정사 채정, 추밀원부사 김연, 도병마녹사 강지소 등이 기록에 남아 있으며, "강화에서 지키던 군사가 많이 도망하여 육지로 나가니"라는 구절로 보아 일반 군사나 백성들 사이에도 도망간 사람은 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화도는 정말 넓고, 수천명으로 이걸 모두 관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이 중에는 후에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도 끼어 있었습니다.
삼별초는 그렇게 강화도를 점령한 후, 승화후 왕온을 협박해 왕으로 삼고, 대장군 유존혁과 상서 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아 나름의 정부를 꾸밉니다. 여기에 호적 문서를 불태워 노비와 천민들의 마음을 삽니다.
+) 이 때문에 삼별초가 신분해방을 하는 쪽으로 갔다고 추켜세우기도 하는데... 일회성 이벤트죠 -_-; 그래도 이 말을 듣고 육지에서 강화도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승휴는 그들을 "까마귀 떼"로 비유했다는군요.
이렇게 일을 저지른 상황, 하지만 많은 백성과 병력이 육지로 도망간 뒤였고, 수천명으로 지키기에는 강화도는 너무 넓었습니다. 거기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진짜 몽고군이 언제 올 지 몰랐죠.
결론은 얼마 안 가 나왔습니다. 강화도를 버린다는 것이었죠.
3. 대탈출
삼별초가 준비한 배는 무려 1천 척, 여기서 강화도에서 긁어모은 재물과 자신들의 가족은 물론 인질로 붙잡은 관리들의 처자식까지 모두 태웁니다. 강화도에서 안전하게 살았던 "선택된 사람들"은 이제 인질이 되어 끌려가게 되었죠. 뒤의 내용을 보면 삼별초에 찬동하지 않은 다수의 백성들은 그냥 섬에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실상 강화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겠죠.
많은 배들이 한꺼번에 떠나니 구포에서 항파강(강화도 사시는 분 지리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__))까지 배머리와 꼬리가 이어졌고, 인질이 된 관리의 처자식들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합니다.
+) 이렇게 이산가족이 된 관리의 아내들의 운명이야 뭐... 다들 예상하시겠죠?
그들이 떠난 후 중서사인 이숙진과 낭장 윤길보는 노예들을 모아서 구포에서 미처 도망가지 못 한 적 5명을 죽이고 부락산에서 시위하니 삼별초는 "오랑캐 군사가 이미 이르렀다"고 하며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숙진은 그들이 간 것을 확인한 후 낭중 전문윤 등과 함께 강화도의 창고 등을 봉쇄하고 섬 내의 혼란을 다시 안정시키죠.
원종의 반응도 늦진 않았습니다. 능력이 없었을 뿐이죠 -_-; 도망쳐 온 이승휴가 염하, 강화해협을 막자는 건의를 했지만 그러진 못 했고, 대신 60명의 군사를 내어 몽고의 송만호와 합류해 삼별초를 추격하게 합니다. 이 때 역적추토사로 임명된 장수가 바로 김방경입니다.
저 옹진군이 있는 섬이 영흥도입니다.
삼별초가 있던 곳은 영흥도, 김방경은 이들을 공격하려 했지만 송만호는 오히려 "두려워서" 말렸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삼별초는 도망갔죠. 헌데 그 틈을 타 도망 온 이들이 천여명이나 됐는데 송만호는 이를 모두 포로로 잡아갑니다. 후에 이들을 풀어줄 것을 계속 요청했지만 돌아온 이는 소수였다고 하구요.
한편 강화도에서는 정말 몽고 군사가 들이닥칩니다. 몽고에서 파견된 두연가 타라대에게 2천을 보내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니니, 원종은 강화도에 남은 이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일까봐 말렸지만 기어이 들어가 버렸죠. 그 걱정대로 타라대는 강화도에 남은 백성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 했다고 합니다.
+) 본편에서 까먹고 얘기 안 했는데 차라대는 1259년 여름, 원종이 몽고로 갈 무렵 죽습니다.
그나마 7월에는 강화도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라 명령했지만, 8월에는 강화도의 민가를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참, 이 고급 샌드위치는 끝이 없네요. 이렇게 강화도는 고려의 피난수도에서 일개 섬으로 돌아갑니다.
조정이 삼별초의 난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는 동안, 몽고에서는 두연가와 홍다구를 보내 고려 땅을 순시하는 동안, 삼별초는 줄곧 바다에 떠 있었습니다. 6월 3일에 떠나 8월까지, 약 70여일을 이런저런 섬을 떠돌아다녔죠. 그들이 머물 곳을 찾고 있었을 겁니다.
마침내 그들이 배를 댄 곳은 서해의 끝, 진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