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4일, 23세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사건.
당시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서울대학교의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의 소재 파악을 위해 박종철을 조사, 물고문하던 중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렀으나 오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가자 가혹행위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비춰졌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다음은 당시 치안 본부장이 발표한 내용의 일부이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16일 신문에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다는 부검입회 가족의 증언이 실리고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박종철, 그는 누구인가? - 그 끈끈하고도 치열했던 21년의 삶을 돌아보며
박종철은 1965년 4월1ㅣ일 부산에서 공무원을 하는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씨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 도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혜광고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보통의 공부 잘 하는 학생이 걷는 평범한 길을 걸었다. 하얀 얼굴과 재치 있는 언행으로 주위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1979년, 부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의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그는 막연하게나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잡았다. 1983년 서울대학교에 응시했다가 실패, 재수를 하면서 당시 서강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형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또 형의 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책들을 틈틈이 보면서 나름대로의 뜻을 세우게 되었다.1984년, 그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해서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오직 억압박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몸소 농촌 생활도 체험했고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일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억압 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그들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위해 한 치의 타협 없이 치열하게 싸워 나갔다. 그는 대학 1학년 등 저학년 학생이 흔히들 가질 수 있는 두려움과 회의를 자기와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극복하면서 1984년 봄의 도서관 철야농성, 4.19기념식을 마치고 4.19희생자 묘소가 있는 수유리에서의 투쟁 등 학교에서, 거리에서, 농촌에서 싸웠다.2학년에 들어서는 언어학과 2학년 대표가 되어 선배, 후배와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면서 과 구성원들을 굳게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는 1985년 5월, 사당동 가두시위와 관련 구류 5일, 6월의 구로 가두시위로 구류 3일을 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는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오히려 그가 막연하게 설정했던 삶의 방향을 한층 구체화시키고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는 항상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서 고민했으며,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이 땅위에 축적되고 있었던 모든 모순을 척결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노라 다짐했으며,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3학년이 되면서 과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인문대학의 제반 학생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86년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와 그 시위에 참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감옥에서도 학습(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한 독서)을 멈추지 않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심신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쉬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밝히면서 투쟁의 의지를 강고히 했다. 7월 중순에 집행유예로 나와서는 3개월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다.1984년 봄부터 86년 4월 그가 구속되기까지 그의 행적은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였으며, 오직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이 땅의 모순을 직시하는 삶이었다. 우리는 그의 짧았던 생의 편린들을 통해 우리 사회 안의 첨예한 모순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그것을 개선 광정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처절한 투쟁을 볼 수 있는 것이다.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우 일동 이상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우 일동이 엮은 박종철 군의 일대기다. 간략하지만 그의 일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재수하면서 서강대학교에서 가톨릭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던 형 종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재수 끝에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학생운동에 관하여 순수한 새내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이미 전태일의 전기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고, "열사라는 단어는 저를 비장하게 만듭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성숙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일에서 솔선하는 원칙주의자였다.
농촌활동에서는 식사할 때는 그 자신 기꺼이 주방장이 되어 동료들의 식사를 챙겼고, 정리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철저한 호랑이 감독이 되었다. 농활 때 농민이 차려주는 새참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을 때 농민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새참 먹기를 끝까지 반대했다. 국수가 불면 버려야 한다면서 성의를 받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음에도 그는 한사코 새참 먹기를 거부했다.
학생들의 마지막 투쟁이라 할 시험 거부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단호히 시험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에 확고히 섰고, 또 그것을 관철했다. 85년 두 차례에 걸쳐 구류를 살면서도 거리투쟁에는 어김없이 참석, 가장 열렬하게 싸웠다. 그래서 그에게는 '억세게 재수 없는 싸움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성동구치소 수인번호 80번으로 감옥을 살 때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감옥에서는 단전호흡과 요가를 익혔고, 그것을 그는 또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는 사회 현실을 알면 알수록,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이 사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더욱 짙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내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서클의 표어요 목표였던 "먼저 인식한 자가 먼저 실천한다"는 데 철저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던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세미나를 하려는데 책이 없어 고생하는 후배에게 선뜻 책을 사준다거나, 1986년 말 건국대에서의 농성으로 구속된 과 후배에게는 한 벌밖에 없는 자신의 겨울 외투를 선뜻 차입시켜 준 일도 있었고, 한겨울에도 얇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후배에게 두터운 겨울 바지를 사다준 일 등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베푸는 삶에 익숙했다. 그와 하숙생활을 같이 했던 한 동료는 박종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늘 바쁜 종철은 그렇게 '부자'였습니다. 그의 서클 사람들은 그를 '운동권의 자선사업가'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자신을 위해 뭔가를 끝까지 소유하려 하고 집착하는 일은 종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그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것이겠지요. 우리는 박종철과 박종운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종운이라는 이름은 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모든 동지를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박종운의 거처와 관련해 빌미를 줄만한 말을 끝까지 아니한 것은 그의 강한 책임의식을 엿보게 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살아서의 품성이었다.
평전에 의하면, 박종철이 박종운을 처음 만난 것은 85년 1월, 팀 동료들과 함께 겨울 합숙을 하던 때였다고 한다. 오류동의 자취방에서 합숙을 했는데,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어둠을 피해 간 곳에 박종운이 있었다. 운동권의 사람이었던 박종운은 후배들에게 그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종철에게 그 얼굴은 알 만한 사람,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들은 인사를 주고 받았고, 그 이름도 형제 같은 두 사람은 이내 친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85년 여름, 박종운은 민추위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몸이 된다.
86년 11월말, 박종철은 하숙방에서 서클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종철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엉뚱하게도 박종운이었다. 박종운은 얼마 전 호구조사 때 동사무소 직원과 경찰에게 신분이 노출되자 책과 옷가지를 남겨둔 채 도망쳐 나와 아는 사람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하룻밤씩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런 생활 중 박종철이 하숙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다.
박종운이 다시 찾아온 것은 87년 1월 8일이었다. 박종운은 한 차례 구속 사태가 몰고 간 뒤끝,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의 연결을 박종철에게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종철이는 기꺼이 박종운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종철은 한사코 마다하는 그에게 꼬깃꼬깃한 1만원과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주었다. 목도리는 누나 은숙이가 털실로 직접 짜 준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1987년 1월 14일 새벽, 전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신 종철이는 자고 있었다. 그 하숙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종철을 억지로 깨운 후 차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남영동 대공수사2단 5층 8호실로 끌고 갔다. 바로 9호실로 옮겨졌고 고문을 당하다가 14일 오전 11시 20분, 박종철은 숨졌다.
그와 부산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월 12일이었다. 13일부터 일본어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로 간다면서 하직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때 아버지는 직장의 숙직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 저 올라갑니다."
"응, 그래라."
그것이 부자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박종철이 물고문 끝에 숨진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김근태 고문사건으로 고문에 몸서리치고 있던 국민은 자신에 대한 혐의가 아니라 수배자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끌려간 한 대학생이 주검으로 나온 데 대하여 치를 떨었다. 그것이 언제 내 일, 내 자식의 일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http://blog.daum.net/socialist_party/8003247 열불 나는 세상이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가 익사했다
뜨거운 정열과 불타는 의지가 물속에 잠겼다
우리 아이는 대학 3학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그만
짐승의 발톱에 물려 죽었다
우리는 분노 한다
이 시대의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
- 1987년 2월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의 '박종철' 습작시 일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배웠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정권의 암울했던 시기, 이 나라에 민주주의를 만들고자 피를 흘린 국민이 있었기에 지금 현재 제가 이렇게 글을쓰고 있는 거겠죠..?! 올해의 작은 목표 하나가...전부는 할 수는 없지만 열사를 뒤돌아보자는게 있는데...요즘 대한민국을 보면...선배들의 피와 땀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