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은 삼한/삼국인들이 일본열도에 분국을 세웠다는 주장으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1963년에 주장한 설입니다.
당시 이 설은 당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에 반박하기 위한 학설로서, 일본서기의 기록이 모두 열도내의 분국간의 일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습니다 ( 한반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
여기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의 金錫亨은≪일본서기≫와 일본고고학 자료들을 가지고 일본열도내에서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고대한일관계사 영역을 개척하여서 이른바「分國說」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4∼5세기의 일본 고분문화는 백제·가야 등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고 그 주체세력들은 모두 한국 계통 소국 즉 분국이었으며,≪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한반도 관계기사는 일본열도 내부의 한국 계통 소국들 사이의 일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들은 고고학적 문화 전파의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여 일본고대사 자체 및 임나일본부설의 취약성을 입증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일본학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분국설은≪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사료들을 이용할 때 거의 모든 사료를 무리하게 일본열도에서의 사실로 억측함으로써 오히려 한반도내의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들은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 속에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이른바 "유물"로서 얘기되는 칠지도와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칠지도의 경우 "백제가 왜왕권에 대한 우위에 서고자하는 외교적의도는 확인이 가능하나 실제관계에 대해 칠지도를 기반으로 확언하기는 어려움. 명문에 대한 해석에 대해 여전히 이견이 존재",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의 경우 "명문에 틀린 글자와 자획의 배열에 의문이 많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백제-왜 관계에 대해 확정하기는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와 일본이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있는데에는 모두 동의하나
누가 "우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증거가 없으므로 말할수 없으니까요.
1. 칠지도
핵심쟁점인 칠지도 전면과 후면에 적힌 명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면
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百鍊鐵七支刀 [出]辟百兵 宜 供供侯王□□□□作 (1)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聖音 故 爲倭王旨 造 傳示後世 (2)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귀하게 성음聖音으로 태어났다. 그런까닭에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1) 의공후왕 해석
칠지도의 제작 주체, 칠지도의 전체적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은 ‘의□공후왕(宜□供侯王)’이다.
백제헌상설의 입장에서는 후왕을 신분이 높은 고관이나 부귀한 사람을 뜻하는 상용의 길상구로 보아 ‘□공(□供)’을 ‘바친다, 공헌한다’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반면, 백제하사설이나 동진하사설에서는 이를 군신관계를 나타내는 신분질서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백제하사설은 후왕을 이면의 왜왕과 동일시하여 백제왕이 신하된 지방왕인 왜왕에게 칠지도를 내려준 것으로 해석했다.
(2) 백제왕세자 기생성음 고위왜왕지도 해석
칠지도 명문에서 가장 다양한 판독과 해석이 가해진 부분은 ‘백제□세□기생성음[진] 고위왜왕지조(百濟□世□奇生聖音[晉] 故爲倭王旨造)’이다. 앞부분은 현재까지의 판독상 ‘백제왕세자기생성음(百濟王世子奇生聖音)’이 가장 타당한 듯한데, 성음을 불교용어로 볼 것이냐 구체적인 인명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인명으로 볼 경우는 ‘기생’ 또는 ‘기생성음(奇生聖音)’ 전체를 귀수(貴須)ㆍ구수(仇首)와 동일시하여 ‘백제왕[근초고왕]과 세자 구수’로 보기도 하고, ‘백제왕의 세자 구수’로 해석하기도 한다. 칠지도의 제작시기인 4세기 후반의 백제왕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종래 왜의 5왕 중의 하나인 ‘찬(讚)’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던 ‘왜왕지(倭王旨)’의 ‘지’가 인명이 아니라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부사어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기생(성음)’이나 ‘지’ 등을 반드시 구체적인 인명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칠지도 명문의 표면과 이면은 그 자체로 체재를 갖춘 완결된 문장으로 되어 있어 별개의 독립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면의 ‘차도(此刀)’가 표면의 칠지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면의 ‘왜왕’이 표면의 ‘후왕’에 해당되는 존재임이 분명하므로 상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여전히 논란이 많은 칠지도는 4세기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므로 명문의 내용은 물론 서체나 형상, 제작기법, 용도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명문의 전체적인 내용상 백제측이 왜왕권에 대해서 한 단계 위에 서고자 하는 외교적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해 보이나,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백제가 왜와 외교관계를 맺게 된 배경 및 이후의 상황전개라는 측면에서 칠지도의 성격을 규명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할 것이다.
2.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
일본 스다하치만 신사에 있는 청동거울인데, 이 형태가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거울과 형태가 유사하고
이 명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사마왕이 아우님의 장수를 위해 보내주는것) 백제 무령왕이 게이타이천황의 형이라는 주장의 일환으로 인용됩니다.
이에 대한 금석문 종합정보시스템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503년) 8월 10일 대왕의 연간에 남동생인 왕을 위하여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는 것이다.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보내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내연외측(內緣外側)의 명대(銘帶)에 48자의 명문이 있는데 뒤집혀진 문자[반전문자(反轉文字)]가 많으며 문자의 크기는 일정치 않다. 문장은 일본식 한문체이며 한자음을 차용하여 일본어를 나타냈다.
양질(良質)의 동(銅)을 사용해서 만든 비교적 큰 거울이지만 그 만든 방식은 조잡하고 오자(誤字)나 자획(字劃)의 배열에 의문이 있는 글자가 많기 때문에 제작자는 주형(鑄型) 제작 경험이 부족하고 한자 사용에 익숙치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