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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 정보 : 한성민 - 사랑하면 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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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1917. 11. 14 ~ 1979.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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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현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에서 출생하였다.
박정희의 어머니인 백남의는 45세에 박정희를 임신했는데 백남의는 이를 창피스럽게 여겼다.
박정희의 형제에는 15세의 나이로 시집을 가 임신한 박귀희가 있었는데,
이런 딸과 비교하여 자신이 늙은 나이에 임신한 것을 주책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에 백남의는 박정희를 유산하려 하였다.
간장 한 사발 마시기, 밀을 끓여 마시기, 섬돌에서 뛰어 내리기,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
수양버들 강아지 뿌리 달여 마시기,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 언덕에서 굴르기...
그러나 박정희는 낙태되지 않았고 백남의는 '태어나면 포대기에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 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는 끝내 태어나게 되었다.
어머니인 백남의가 젖을 물리지 못 하자 박정희는 백남의가 만든 죽을 먹거나 누나인 귀희의 젖을 먹으며 성장했다.
(사진은 장택상)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동학 농민 운동의 접주였다.
그로 인해 관직에서 박탈당하여 경기도관찰사인 장승원(장택상의 아버지)에게 찾아가 소작농으로 일하였다.
훗날, 박정희가 정권을 잡게 된 후에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박정희와 장택상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1926년, 구미공립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정희는 공부를 매우 잘 하여, 3학년 때 부터 한번도 빼먹지 않고 급장(지금의 반장)을 맡게 된다.
박정희의 성적은 항상 매우 우수하였으며, 급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뛰어났다고 한다.
체육 시간이 되면 선생이 나오기도 전에 준비를 마쳐놓는 등 리더십도 뛰어났다고 한다.
소년 시절에 나폴레옹, 이순신을 존경하였고 이광수가 쓴 소설 <이순신> 을 읽고서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초등학생 시절, 집이 가난하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던 때가 많았는데 한약방집 아들인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점심 시간에 그의 집으로 가 점심을 얻어먹기도 했다.
후에, 이준상의 아버지가 죽고 이준상은 병이 들어 가세가 기울게 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에 초선된 후에 곧장 이준상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지프에 태우고 자신의 생가로 이동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동네 사람들은 장애인 이준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1932년,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대)에 진학하게 된다.
하지만, 박정희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다만, 군사 과목과 체육 과목에 대해서는 상위권이었다.
1936년, 아버지인 박성빈의 강요에 의해 김호남과 결혼하게 된다.
(박성빈이 죽기 전에 박정희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림)
하지만, 박정희는 부친의 강요에 의해 강제적으로 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김호남에게 애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 부임한다.
박정희는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는데, 재직 와중에 사건 하나가 터진다.
어느 날, 학교에 급이 조금 높은 일본인이 방문하기로 하여 대접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박정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에 문경소학교의 일부 교사들이 박정희를 구타하였는데 박정희는 이 때 분노를 느끼고 출세를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2기생으로 입학한다.
민족주의자인 박상희는 동생 박정희를 말렸으나,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5.16의 동지들이 될 인맥을 형성하게 된다...
이 때, 방원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박정희보다 3년 늦게 출생하였으나
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박정희보다 선배였던 사람이었다.
방원철은 군기를 잡는답시고 박정희에게 박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으며 결국에 방원철은 박정희를 인정하게 된다.
1942년 10월,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학하였고 1944년 300명 중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다.
박정희는 육사 졸업 후, 문경으로 돌아와 옛 제자들을 찾았고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와라." 라고 하였다.
박정희에게 불려온 사람들은 박정희가 성공한 것을 보자, 저절로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고
박정희는 "한낱 조선인에게 무릎을 꿇다니 어쩐 일이십니까!" 라고 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만주군에서 복무하다가 일본의 패망, 한반도의 독립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귀국하였으나 가족들은 빈털터리 군인으로 돌아온 박정희를 환영하지 않았다.
박정희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친형 박상희는 말하기를,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 그저 교사로 지냈으면 이런 꼴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
1946년 9월,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고 1946년 12월에 194명 중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박정희는 사관학교 졸업 후 소위로 춘천 제8연대에 임관하였는데, 경비 초소 문제를 두고 미국 고문관 브라운이 간섭하자 그의 앞에서
"웬 미국놈이 우리 나라 문제에 간섭을 하느냐?" 고 소리쳤다.
'미국놈' 이라는 표현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박정희를 고소하고,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연대장인 원용덕은 브라운을 적당히 달래고 박정희를 징계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1946년 10월, 대구폭동사건이 발생했는데 박상희는 중재를 위해 나섰다가 우익청년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한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아꼈던 친형 박상희가 죽자 박정희는 분노한다.
박상희는 공산주의자였는데, 군인 동생인 박정희가 박상희의 죽음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서는 박정희를 포섭하려 한다.
형의 죽음으로 분노해 있던 박정희는 남로당 인사 이재복에게 설득당하였고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다.
(사진은 백선엽 장군)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터지자 박정희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을 받고 구속된다.
하지만, 이 때 백선엽 장군이 힘써 박정희를 구명했고 박정희는 사형을 면하게 된다.
훗날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백선엽은 박정희 정권에 기용되어 활약하게 된다.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0년 11월, 본처인 김호남과 이혼하고 12월에 육영수와 재혼하였다.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은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는 어머니와 몰래 집을 나와 박정희의 집 근처로 이사 한다.
결혼식 당시 주레는 대구시장인 허억이 보게 되었는데
박정희의 이름, 육영수의 이름을 보고 성별을 착각하여
"신랑 육영수, 신부 박정희 입장!"
말하여 초청객들과 박정희, 육영수를 폭소케 했다...
육종관은 끝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육영수의 손을 잡고 식을 치루게 한 사람은 대구사범 스승 김영기였다.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육종관이 임종할 때 박정희가 방문하자
"위대한 분을 몰라 뵈었습니다..." 라고 하며 사죄하고 사망한다.
1952년 5월, 이승만이 부산에서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 개헌을 하려고 하자
박정희는 분노하여 정변을 계획한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 세력은 장면을 이승만 대신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장면의 측근인 선우종원이 거부하여 무산되고 만다.
1957년 3월, 박정희의 소장 진급 심사가 있었는데
22명의 심사 위원 중 18명 찬성, 2명 반대, 2명 기권으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승만 정권의 실세인 곽영주(3.15부정선거 총책임자)가 나타나서는
"저 사람, 예전에 사상 문제로 구속된 적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혼 경력도 있고..."
라고 딴지를 걸어 소장 진급이 불가할 것으로 보였지만, 김정렬이 나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을 도와준다.
5.16군사혁명 후 곽영주는 3.15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사형당한다.
1960년, 3.15부정선거로 대한민국이 들끓자 박정희는 제2차 정변 모의를 한다.
박정희는 5월 8일, 정변을 계획하였으나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대를 몰아 군사혁명을 일으킨다.
내각 수반(실질적 대통령)인 장면은 무서워서 성당으로 피신하고
내각 대통령(상징적 존재)인 윤보선은 박정희가 찾아오자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혁명을 인정한다.
혁명 후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에서 활동하던 정치깡패들을 모두 사형시키고 개혁에 나선다.
박정희는 스스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매달 연금을 보내어 삶을 무난히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 후, 1963년 대장으로 예편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1963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한민국 제 5대 대통령 선거>
유권자 : 12,985,015 명
투표자 : 11,036,175 명 (85%)
박정희 후보 : 4,702,640 표 (46.6%)
윤보선 후보 : 4,546,614 표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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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3일,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에 당선, 연임에 성공한다.
<대한민국 제 6대 대통령 선거>
유권자 : 13,935,093 명
투표자 : 11,645,215 명 (83.6%)
박정희 후보 : 5,688,666 표 (51.4%)
윤보선 후보 : 4,526,541 표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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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7일,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에 당선, 연임에 성공한다.
<대한민국 제 7대 대통령 선거>
유권자 : 15,510,316 명
투표자 : 12,417,816 명 (79.8%)
박정희 후보 : 6,342,828 표 (53.2%)
김대중 후보 : 5,395,900 표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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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 후인 1972년, 유신 헌법을 국민 투표에 부쳐 투표율 91.9%, 찬성율 91.5%로 통과시키고
1972년 이후부터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 연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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