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식인 문화 -
고대 중국인들은 인육을 장에서 내다 팔 정도이며, 아무럼 거리낌없이 인육을 즐겼다.
중국 은나라 때는 해라는 끔찍한 형벌이 있었다고 한다. 죄수의 살점을 도려내어 다른 죄수에게 먹이는 형벌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도 그런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얼마전 TV에서 방영된 '공자전'이라는 만화에서도 나온 바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자로가 해가 되어, 자신의 밥상에 올라오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젓갈을 모조리 엎어버렸다고
한다( 해라는 음식은 일종의 젓갈 종류인데 인육을 조리할때도 이 해라는 방법이 많이 쓰였다. 즉 당시로서는
다른 고기이외에 인육을 이용한 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수호지(이문열氏가 번역한 10권짜리 수호지)에서도 중국의 식인 풍습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1권 끝 부분에 가면 한지흘률이란 별호를 가진 양산박의 주귀란 자가 자기들 양산박의 법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숨어 있다가 부자가 오면 뛰쳐나와 잡아 재산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잔불을 밝히는 데 씁니다.'
란 구절이 나온다. 즉, 의적이란 양산박 무리들은 사실은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극악 무도한
악인들이란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송강의 아우인 흑선풍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 인육을 먹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인육을 먹어서인지 눈알이 붉게 충혈되었다고 한다. 무송이 유배가는 과정에서 들른 주막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해서 파는 끔찍한 주점이었다(그런걸 흑점이라고 한다. 최근에 중국 정부에서 폐지 하기까지 그런 곳이 많았다고 한다).
또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한 99가지 이유 라는 책에 이런 고사가 있다.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착한 며느리가 살았는데, 때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다. 그때 며느리는 시부모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놀란 나머지 친정으로 도망을 친다.
그러자 친정 아버지는 '아니. 누구 딸을 마음대로 잡아먹어!' 라고 분개했다. 하지만 그 딸을 잡아먹은 건 친정 아버지였다(참고로 중국의 경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상당히 무관심하다고 한다. 딸을 시집보 내는게 아니라 돈 받고 파는 것이다. 중국의 여인이 전족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사타구니의 근육이
발달해 성교시 남성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비싼 값에 딸을 팔려고 하는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절정기였다. 장에서는 인육을 팔았고(두발 달린 양고기라 불리우며, 팔렸고, 인육이 너무 많이 돌아 다른 고기의 값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한다)철경록, 조야첨재에 나오는 친구를 해로 만들어 먹은 설진, 첩을 삶아먹은 고찬,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모두
측천무후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황소의 난 때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를 끌고 다녔고, 절도사의 군대는 마을을 종종 습격해 절도사의 군대가 휩쓴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명나라
말기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 조의 계략으로 처형당한 뒤 군중들이 몰려 와 그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려 온 사람들은 그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악질관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민중 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 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 라고 전해진다. 참으로 끔찍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
그밖에 인육은 납취,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다고 한다. 또 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 상황으로봐서 상당히 불평등하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루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만 큼 튼튼하지 못하면, 인육이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으나 생략하겠다.
이런 야만적인 중국의 식인 문화는 문화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 식인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 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 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와 인의를 강조하는 유교도 이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왜냐면, 공자 역시 정당한 복수를 칭송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왜 유교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식인문화와
관련 깊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그만큼 식인문화가
널리퍼져 있었고 모든 중국인이 사람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다.
# 중국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
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또한 유비가 인육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아내를 죽여 요리해 바치자 그 충심에 감동했다는 내용도 있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출처 : 네이버 오픈 백과사전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128524 # 덧붙임
중국의 식인문화는 대부분 20세기초 군국주의 일본학자들에 의해 심도있게 연구되어 중국의 식인풍습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되고
왜곡된 면이 있다는 주장도 많다. 사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식인이 없었던 나라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만큼 식인이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국가 존속 이후에도 아예 민중의 문화처럼 자리잡았던 나라는 문명국중에는 없다.
특히 자국의 사료들에 저만큼 광범위하게 식인에 대한 사실이 적혀있다는 것은 식인문화 자체가 어떤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당당히 사료에 적힐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중국의 가장 최근의 식인기록은 1930년대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면서 일본에 의해 완전히 고립된
몇몇 마을에서 먹을 것이 없자 이웃집끼리 자식을 교환한뒤 잡아먹었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자식 을 바꿔 잡아먹는 현상이 고립된 마을에서 마구 번져가자 당시 중국
에 들어와있던 타임지의 기자가 이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모택동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모택동이 크게 노하여 그러한 행위를 멈추도록 명령했다는 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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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를 표방하며 자신들이 세계최고인줄 알고 주변 국가들을 속국 소수민족으로 보려
하는 중국. 그러나 그들은 책상빼고는 다 먹어치운다는 게걸스러운 먹성 아래 식인풍습이라는
야만적인 뿌리를 가지고 자국민이고 가족이고간에 상관없이 먹어치운 미개인 들인 것이다.
저러한 야만적인 뿌리를 가졌기에 그들의 외교 역시 무식하고 야만적일수밖에 없다.
식인문화가 만연한 것도 모자라 부인과 자식까지 가리지 않고 잡아먹은 그 습성은
세계의 어느 나라의 악습과 비교해도 (아니 미개한 식인종들도 가족은 안잡아먹는다)
당할 수 없는 최악의 풍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