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반, 소프트맥스란 회사가 만든 창세기전이란 게임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산 게임들이란게 퍼즐이나 슈팅게임 내지 파이널 파이트 같은 벨트스크롤 액션 위주였고 롤플레잉 게임의 경우 그래픽이나 스토리 수준 모두 일본, 미국의 동인게임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었는데 그런 수준을 뛰어넘어 슈퍼패미컴, 메가드라이브 같은 게임기로 발매된 일본산 롤플레잉 게임들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세계관과 스토리, 일러스트 등으로 무장한 창세기전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버그가 우글거리는 게임이었지만 어쨌든 한국도 이정도 수준의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게이머들은 놀라움을 느꼈고 이듬해 일종의 완전판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전2가 발매되면서 창세기전은 강력한 브랜드로 자리잡습니다.
올망졸망 파라다이스(1995년 패밀리 프로덕션)
소프트맥스가 나왔으니 당연히 손노리도 나와야겠죠.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포가튼 사가로 유명한 손노리는 각종 패러디 및 패스맨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개그센스로 무장한 게임 회사였고 특히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외전격이라 할 수 있는 포가튼 사가는 당시 게임답지 않은 상당한 자유도와 여전한 개그센스 덕분에 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시절부터 악명높았던 버그는 여전해서 수차례의 패치에도 버그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두 회사의 게임들은 질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물건이었습니다. 재미가 없는건 아니고 분명 제법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임이었지만 그것도 제대로 플레이 할 수 있을때 이야기 아니겠습니까.(특히 포가튼 사가 같은경우는 당시 PC통신에서 어마어마하게 욕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게이머들은 열악한 당시 게임개발 환경과 외산게임이 판치는 현실등 여러 이유로 두 회사의 게임에 대해 성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포가튼 사가, 창세기전이 각각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자 이 새로운 형태의 산업에 투자자들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롤플레잉 게임을 주력으로 한 소프트맥스외에도 실시간 전략게임을 주력으로 하는 HQ팀 같은 개발사가 생기는 등 한국 게임도 점차 장르가 다양해지기 시작합니다.
임진록(1997년 HQ팀 개발, 삼성전자 유통)
이렇듯 점차 게임계는 커져갔지만 게임사들의 마인드는 여전히 옛날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제대로 버그 테스트도 안하고 일단 게임을 내놓고 보는 배짱장사는 기본이요 유통망 구축과 같은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게임가격은 중구난방이었고 지방 소도시의 경우는 당시 세진 컴퓨터랜드 같은 곳 구석에서 게임을 팔았는데 그러다 보니 최신게임은 들어와 있지도 않은 비일비재했고 외려 복사CD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에서 최신게임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죠. 여기에 2000년대 들어 ADSL등의 초고속 통신망이 보급되면서 불법복제가 더더욱 쉬워집니다.
거기에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의 성공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아류작들을 비롯 당시 인기있던 개그맨이나 만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급조한 게임들은 게임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기본명제마저 충족시키지 못한 물건들이 대다수였고 이런 게임들의 등장은 가뜩이나 정품구입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진 유저들에게 한국 게임에 돈 쓰는건 돈아까운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밉스 소프트에서 발매했던 RTS게임 아마겟돈, 기본적으로 무료지만 멀티를 하려면 돈을 내고 아이디를 만드는 방식을 택했는데 인터넷에서 게임을 무료로 배포하고 오프라인 상에서도 CD를 그냥 뿌렸지만
말 그대로 쫄딱 망했습니다. 극악한 버그, 엉망인 밸런스, 말도 안되는 그래픽과 사운드까지 말 그대로 망하는 게임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춘 게임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한국 게임들이 저 수준까진 아니라도 저기에 근접한 게임들이 많았다는게 문제였습니다.
저질 게임들의 범람. 예, 그렇죠. 미국콘솔게임계에 들어왔던 자본이 일거에 빠져나갔던 아타리 쇼크의 원인이 바로 저것이었습니다. 물론 아타리쇼크가 터졌을때도 개중에 훌륭한 게임이 있었겠지만 한번 굳어진 흐름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고 그것은 한국게임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피나 화이트데이, 씰 같이 괜찮은 게임들이 있었지만 스타크래프트,디아블로 아류작과 치고 빠지기 식으로 만들어진 게임들의 틈바구니 속에 쓸려내려가 버렸고 그런 흐름에 가장 먼저 휩쓸린건 손노리였습니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속에 결정적 한방이 터지는데 바로 소프트맥스의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창세기전이 아닌 독자적 브랜드, 거기에 3D 그래픽의 도입 등으로 유저들의 기대감을 한껏 높인 마그나 카르타는 예약구매판의 경우 인스톨 파일이 제대로 실행이 안되서 설치 조차 안되는 경우가 발생했고 초회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기에 첫 전투에서 공격을 하면 튕기는 버그를 비롯 한국 게임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버그는 그 문제가 절정에 치달았고 몬스터나 스킬간의 밸런스 역시 엉망이었습니다. 게임 시스템 역시 말도 안되는 수준의 볼륨이었구요. 창세기전 시리즈를 통해 선보인 소프트 맥스만의 깊이있는 시나리오와 스토리전개는 오간데 없고 막장 드라마식 구성과 어이없는 반전으로 얼기설기 땜빵된 스토리는 소프트 맥스라는 회사에 대해 마지막 남은 팬들의 신뢰마저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보루라던 소프트 맥스가 내놓은 기대작이 처절하게 실패하면서 가뜩이나 어렵던 국내 패키지 게임시장은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이후 게임 제작사들은 온라인 게임으로 건너가 버리면서 국내 패키지 게임시장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일종의 한국판 아타리 쇼크라고 해도 될 사건이었던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