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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21920
    작성자 : 불편한진실2
    추천 : 14
    조회수 : 2805
    IP : 110.15.***.193
    댓글 : 46개
    등록시간 : 2015/07/06 21:37:16
    http://todayhumor.com/?history_21920 모바일
    한국현대사 최악의 살인마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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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고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근현대사를 쭉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대던 교과서에서도 근현대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맙니다.

    덕분에 우리가 아는 건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 민족은 고생했고, 더러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도 했고, 더러는 이완용처럼 친일파가 됐다는 선에서 근대사는 정리됩니다. 현대사는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됐고,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 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독재를 했고, 더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굼으로써 현대사는 끝이 납니다. 흡사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창가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한국을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해서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다 숨어 버렸습니다. 해방 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수많은 민중에 대해서도 ‘시대가 그랬다’는 막연한 논리로 덮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악랄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 그자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악인들이 취재대상입니다.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오늘 첫 번째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은 김.종.원이라고 합니다. 약관의 나이에 말 그대로 지옥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은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기사입니다. 후원금은 취재비와 자료구입비 등에 사용됩니다.


    1. 지옥에서 살아온 사람


    김종원은 1922년 7월 8일 경북 경산군 중방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학교를 정확히 어디 다녔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40년 일본군에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한다. 당시 일본 육군 하사관은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김종원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전투에 임했다. 특히 김종원이 참가했던 파푸아뉴기니는 일본군과 연합군(미군+호주군)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던 곳으로 1942년 5월부터 1944년 8월 까지 2년 넘게 전투가 이어졌다. 일제는 파푸아뉴기니에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군징집자 4410명이 동원했는데, 그 가운데 4076명(92.43%)이 사망했다.

    열대우림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은 질긴 소모전을 이어나갔고, 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을 끊는 방법을 자주 썼다. 원숭이를 잡아먹고 인육을 먹으면서 버텼지만, 일본군 내에서 굶어죽은 이가 속출했다. 김종원은 이런 곳에서 살아남았다. 김종원은 이후 인육을 먹었던 것을 자랑스레 얘기하고 다녔고, 참혹한 전쟁터에서 길들여진 잔악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 김종원.

    일제 패망 이후 김종원은 조선으로 복귀한다. 1946년 서울 동대문경찰서 교통과장으로 근무하다 같은 해 남조선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가 창설되자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일본군 복무 당시 형성된 그의 잔악한 기질로 한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이미 경찰에 있을 때부터 부하경찰과 체포된 사람을 심하게 폭행하는 등 악행으로 원성이 높아 자주 보직에서 해임되곤 했으며, 1947년 9월 25일부터 1948년 6월 20일까지는 파면상태에 있기도 했다.

    잔악한 기질로 미국 군사고문단에게도 미운털이 박힌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사람은 초대 국군 총사령관인 송호성이다.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국군 창군의 주역이었다. 국방경비대 육군 총사령관을 거쳐 1948년 11월 20일까지 국방경비대 최고사령관을 지냈다.

    송호성의 배려로 군에 복귀한 김종원은 때마침 일어난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


    2. 김종원의 살육


    1948년 10월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여수와 순천일대를 장악한다. 당시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경남 마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14연대에게 장악당한 여수시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그러나 김종원은 무모하게 상륙하려다 많은 부하를 잃었다. 진압군은 이후 전열을 정비해 10월 27일 장갑차와 박격포 포격을 앞세우며 여수신항을 통해 여수시내로 진입했다. 그때 김종원은 박격포 공격을 했는데, 진압군이 미처 작전을 전개하기도 전에 박격포탄을 쏟아부어 국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이때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의 작전능력을 형편없다고 평가했다.

    여수시내에 5연대가 진입했을 때 이미 14연대는 지리산 일대로 퇴각한 상태였다. 손쉽게 여수시내를 장악한 진압군은 ‘부역자 처벌’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김종원은 잔악한 기질을 마음껏 드러낸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


    당시 여수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모아 놓고 부역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때 젊은 남성 가운데 손바닥이 투박하거나 군용 팬티를 입고 있거나 머리가 짧은 사람은 부역자로 몰려 죽었다. 학교 운동장 한 켠 버드나무 밑에서 김종원은 시내에서 따로 끌고 온 사람들을 일본도로 목을 베고, 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사격시험을 하듯 죽였다.

    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어느 골목에서 마주한 청년들을 모두 김종원이 현장에서 일본도로 베는 등 마치 분풀이를 하듯 사람들을 죽여댔다.

    여순사건 당시 부역자 색출.jpg
    여순사건 진압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시민들을 집결시킨 모습.
    여순사건 당시 부역자 색출을 위해 중앙국민학교에 주민을 모아둔 모습.jpg
    여순사건 진압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시민들을 집결시킨 모습.

    여수·순천 사건을 진압한 그는 이듬해(1949년) 소령으로 승진해 부연대장을 맡았고, 그해 8월에는 연대장에 오르게 된다. 그는 3사단 휘하 23연대 지휘를 맡았는데, 23연대는 영남지역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한 부대였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여수, 제주도, 지리산 일대, 거제, 양산, 포항, 영덕, 경주, 울산, 고령 등을 돌면서 빨치산을 토벌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이 가운데 영덕, 거제, 산청에서는 그가 저지른 학살이 기록돼 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일부의 증언이 남아 있다. 구체적인 피해자 숫자와 기록이 남아있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950년 3월 그는 23연대를 이끌고 영덕에 주둔 중이었다. 영덕~영해 등 경북 동부지역에서는 김달삼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으나 1949년 대부분 토벌당한 상태였다.

    1950년 3월 14일 영덕 중곡동에서 김종원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된 3명을 처형했다. 당시 현장에서는 영덕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33명이 처형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 심문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는데 겁을 주기 위해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처형당하던 한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이에 분노한 김종원은 보고 있던 33명 가운데 31명을 학살했다. 군인이 뒤에서 총을 쏘면 파놓은 구덩이에 한 명 씩 떨어지도록 했는데, 그는 이것이 답답했는지 별안간 직접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신의 내장이 튀면서 현장은 난장판이 됐고, 그걸 지켜본 사람은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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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지역 시찰 중인 이동석 대령과 마중나온 16연대 김종원 부연대장이 촉석루 앞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왼쪽 철모를 쓴 사람이 김종원이다./사진 제공 전갑생 서울대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제공

    1950년 5월 30일 김종원 부대는 빨치산을 토벌하고 퇴각하다 거제시 마전동 공동묘지에서 43명을 집단 학살했다.

    또한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15일에는 김종원 부대에 의해 보도연맹원 160여 명이 영덕읍 화개리 뫼골에서 학살당했다. 한때 ‘김종원이 영덕에서 수천 명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영덕에서는 민간인 피해가 컸다.

    김종원은 1950년 7~9월 일어난 마산·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에도 개입했다고 한다. 김종원은 만약 북한군이 부산까지 쳐들어오면 형무소 재소자 3500명을 죽여야 한다고 미국 군사고문단에게 주장했으며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를 만류하면서 ‘적이 부산 외곽까지 쳐들어오면 기관총으로 사살해도 된다’고 허락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부산형무소에서 1500명, 마산형무소에서 최소 717명, 진주형무소에서 최소 1200명 등 3400명의 재소자와 구금 중인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당시 김종원은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지구위수사령관, 부산지구 헌병대장, 경남지구계엄사령관을 역임했다.

    끌려가는 부산형무소 재소자.jpg
    끌려나가는 부산형무소 재소자·구금 민간인들. 이들은 곧 학살당한다.

    1950년 8월 24일 양산 동면,원동면,물금면,웅상면,북면,양산면,하북면 등 7개 면 20~50대  주민 약 700여 명이 김종원 부대·23연대·경찰에 의해 학살됐다고 한다. 

    1951년 3월 김종원은 11사단 예하에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김종원 부대는 피난민 약 500여 명을 버스 11대에 태우고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점동 사이에 있는 소정골짜기에 내리게 한 뒤 모두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이를 ‘산청 외공리 학살’이라고 한다. 당시 오랜 빨치산 활동과 토벌의 반복으로 피난민 가운데 성인남성은 거의 없었고 아녀자와 어린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김종원은 빨치산 토벌을 하면서 자신을 ‘백두산 호랑이’로 자칭하고, 자신의 부대를 맹호부대라고 칭했다. 이에 미국 군사고문단도 그를 ‘타이거 김’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김종원 부대가 머문 지역 시골 어르신들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을 기억할 정도로 그의 악명은 높았다.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그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3. ‘골로 간다’는 말을 만든 사람들


    김종원의 산청 외공리 학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11사단을 이끌던 사단장 최덕신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최덕신은 누구였을까?


    "우리 말도 옳게 할 줄 모르는 놈"


    한국 현대사 비사를 많이 알고 있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은 최덕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최덕신이? 그 얼빠진 놈? 우리말도 옳게 할 줄 모르는 놈”이라고 일갈했다. 채 이사장 말 대로 최덕신은 1913년 평북 의주 출생으로 9살 때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최동오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는 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최덕신은 묘하게도 중국군에 입대했다. 광복 때 그의 직위는 상교(대령)에 이르렀다. 1946년 귀국한 그는 우익진영에 몸담았다. 육사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길에 올랐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1950년 8월 귀국하고 9월 11사단장에 취임했다.

    11사단장 최덕신은 지리산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소위 ‘견벽청야’라는 작전을 수립한다. 이는 중국군 백승희 장군이 항일전 당시 쓰던 전술이었다. 이 작전에 따르면 전략적 거점은 견고하게 쌓고, 나머지 인원과 물자는 모두 불태우고 철수해 사실상 적이 어떤 물자도 노획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적을 말려 죽이는 작전이다. 산간지대에서 물자가 부족한 빨치산을 대상으로는 최적의 작전이지만, 산간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작전이었다. 자신의 터전을 송두리째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곳곳에서 주민들을 향한 학살이 빈번하게 이어졌다.

    최덕신의 11사단은 1950년 11월 전북 남원에서 90명, 12월 함평에서 524명(함평학살사건), 1951년 2월 7일부터 9일까지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123명)과 방곡마을(210명)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에서 62명,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310명 학살했다. 이를 산청·함양 학살사건이라 한다. 이어 거창으로 넘어간 이들은 9일부터 11일까지 신원면에서 719명을 학살했다. 거창학살사건이다. 그리고 3월 김종원이 산청군 외공리에서 500명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11사단의 견벽청야 작전으로 인해 내륙지역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이 중 거창학살사건에서 용케 생존자가 있었다. 생존자는 11사단에게 학살당한 사실을 알렸고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꾸러져 현장에 내려왔다. 김종원은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국군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위장해 현장으로 가던 국회의원들을 기습했다. 빨치산을 토벌한 그가 빨치산 시늉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어설픈 작전은 곧 들통 났고, 김종원은 징역 3년 형을 받게 된다.

    사단장인 최덕신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최덕신은 이후 정전회담 한국대표,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지내고 1955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1961년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1963년 주서독대사로 있다 스캔들을 일으켜 해임됐다. 1967년 천도교 교령이 됐다가 느닷없이 1976년 미국으로 도망쳐 박정희 정권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황당하게도 1981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8기 대의원(국회의원 격),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엮임하다 북한에서 죽었다. 죽은 뒤 북한 건국공신들이 묻힌다는 ‘혁명 열사릉’에 묻혔다.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중국, 남한, 북한 모두에서 고위직을 거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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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북 당시 최덕신./한국학중앙연구원

    김종원과 최덕신 등이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골로 간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곧 골짜기로(골로) 끌려가 죽는다는 말로써, 한국전쟁 시기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학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이후 ‘골로 간다’는 말은 손쉽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골로 간다는 말이 신문 지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1956년 12월이었다. 시계밀수사건을 조사하던 검사에게 협박장이 날아왔는데 “모 의원을 잘 봐주지 않으면 골로 갈 줄 알아라”고 적혀 있었다. 어쨌든 ‘골로 간다’는 말을 대중화 시키는데 김종원과 최덕신은 일조를 한 셈이다.


    4. “충무공 이순신 같은 사람”


    김종원의 총부리는 단순히 민간인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하들도 서슴없이 죽였다. 그는 즉결처분을 즐겨 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영덕에서 23연대장을 하고 있을 때 영덕 남방의 고지를 빼앗기자 고지 탈환 명령을 내렸다. 소대장이 고지탈환에 실패하자 소대장과 사병 1명을 즉결처분했다.

    또한 육사 8기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23연대에 일본군식 ‘반자이 돌격(전멸을 각오한 단순한 정면 돌격)’을 지시하자 작전장교였던 중위가 이를 반대하고 우회돌격을 제안했다. 그러자 김종원은 옆에 있던 헌병에게 바로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작전장교는 바로 권총을 뽑아들고 헌병과 권총을 겨누고 대치하기도 했다. 부하들끼리 총을 겨누게 한 지휘관이었다. 심지어 미국 군사고문단이 보는 앞에서 부하를 죽이기도 했다.

     “김종원이 자신의 부하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있다. 어젯밤에는 미군전초기지에서 총질을 했다. 총 개머리판으로 부하를 구타하고 영덕에서 후퇴하는 사이 실종됐던 장교를 사살했다. 부하들이 김종원을 먼저 제거하지 않는 한 또 다시 총질할 것으로 보인다.”

    -1950년 7월 26일 미군 군사고문단 에머릭 대령 보고서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


    그렇다면 이것저것 다 떠나서 그의 작전능력은 어땠을까? ‘노병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이라고 했으며, 미국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부하에게 가혹하였고 전투에 비겁했던,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장병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지키고 있던 영덕은 한국전쟁 때 하루 만에 북한군에 뺏겼으며, 미국 군사고문단의 기록에 의하면 “(김종원이)끝없이 후퇴하여 전투 때마다 어디론가 사라진 연대장을 찾느라 힘들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 시절 김종원은 차를 타고 다니다가도 자신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인을 가혹하게 폭행하기도 했다. 미국 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는 무능하지만 포악하기만 한 그의 실책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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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원(왼쪽)과 이승만(오른쪽). 사진 제공 전갑생 서울대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제공

    1950년 7월, 영덕을 빼앗기고 전투에 무능하고 부하들을 죽이는 행동을 더는 덮어둘 수 없었다. 김종원은 23연대장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바로 다음달인 1950년 8월 김종원을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헌병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고작 28살이었다.

    김종원은 언론사에게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자신의 부대 기사를 반드시 챙겨보고 자신을 ‘타이거 김, 백두산 호랑이’로 쓰도록 했다. 1950년 부산에서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계엄지구 민사부장으로 있을 당시 부산 언론은 김종원과 관련된 기사를 항상 1면에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언론들은 김종원의 기사를 전진 배치시키지 않았을 뿐더러, 김종원이 병사 단속을 잘 못한다는 비판 기사를 쓰기도 했다. 격분한 김종원은 당시 연합신문 부국장과 기자를 불러 중태에 이르도록 폭행했다. 결국 기자들의 항의로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 사과를 해야 할 정도로 기자들의 김종원에 대한 반감은 높았다.

    하지만 그의 든든한 후원자로는 이승만이 있었다. 이승만은 김종원이 부산에 있을 때 그에게 직접 보고를 받는 일도 많았다. 이승만은 김종원을 아꼈고, 1952년에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한 김종원을 특별사면하고 경찰 간부로 채용한다.


    "당장 인플레 잡아와!"


    김종원이 특별사면으로 석방될 때 군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다. 특히 당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김종원 석방을 놓고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고 초안을 마련했다. 초안에는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 하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종찬은 이 내용을 듣자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김종원을 석방하는데 동의했다고 한다.

    이후 김종원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전북경찰국장, 경남경찰국장, 경북경찰국장을 거친 후 1956년에는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격인 치안국장을 지냈다. 경찰에 있을 때도 그는 말썽을 일으켰다. 순시 도중 파출소장의 계급장을 떼어 내 안면이 있는 순경에게 달아주고, 부하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찰서장을 폭행하기도 했다. 경남경찰국장(경남지방경찰청장 격) 시절 참모회의장에서 ‘인플레 때문에 시민들이 힘들다’는 말을 듣자,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김종원 치안국장이 소환조사를 받는다는 신문기사.jpg
    장면 부통령 피습 사건으로 김종원이 소환된다는 당시 기사.

    1956년 9월 28일 오후,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면 부통령은 총탄에 왼손을 다쳤다. 민주당원을 구속하는 선에서 사건이 수습되는 듯 했다. 그러던 중 구속된 이덕신이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다’고 폭로했다. 김종원은 이를 극구 부인했으며 당시 이승만 정권이 공고하던 시절이어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됐다.

    승승장구하던 김종원에게 먹구름이 드리워진 것은 1960년 4·19혁명이었다. 그를 아끼던 이승만이 망명하고 그를 지켜줄 보호막이 사라지자 다시 장면 부통령(당시 국무총리) 피습사건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다. 김종원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왔고 결국 김종원도 피습사건을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종원은 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출감했고, 1963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1살이었다.

    사람 목을 잘라 이웃 지휘관에게 ‘선물’을 주는 게 장난이었던 김종원. 그런 그가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에 거의 무차별적인 권한을 받았고, 그는 살육으로 그 권한에 응답했다. 그것은 결국 이승만과 권부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 땅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김종원과 같은 비정상적으로 날뛰는 존재가 꼭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원의 이름과 악행은 영원히 기억돼야 하겠지만 그를 비호하고 이용한 이승만, 신성모(당시 국방부 장관), 최덕신(11사단장) 이들의 이름 또한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김종원 연표

    -1922년 7월 8일. 경북 경산군 중방동 출생

    -1940년~45년. 일본군 하사관 자원입대. 파푸아뉴기니 전투와 필리핀 전투에 참여.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 1연대 A중대 소대장.

    -1948년 10월. 5연대 1대대장으로 여순사건 진압에 나섬.

    -1949년 2월. 마산에서 16연대 창설, 김종원 부연대장.

    -1949년 11월 18일. 23연대장 취임. 경남, 경북 일대 빨치산 토벌에 나섰으나 민간인 피해 극심.

    -1949년 12월. 일시적으로 부산 주둔 356부대장 맡음. 이후 23연대장으로 복귀.

    -1950년 7월. 영덕지구 전투에서 수 차례 무능함을 드러내 23연대장에서 해임.

    -1950년 8월. 이승만 대통령, 김종원을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헌병부사령관 겸 경남지구계엄사령관 임명.

    -1950년 9월 23일.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북구사령관에 임명.

    -1951년 9월. 거창학살사건 조사하러 온 국회 조사단 습격. 군법회의 회부.

    -1951년 12월 16일. 거창학살사건 국회 조사단 습격으로 징역 3년 선고 받음.

    -1952년 3월.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석방.

    -1952년 7월 28일. 이승만 대통령 김종원을 경찰 특별채용. 전북경찰국장 임명.

    -1953년 7월.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사령관.

    -1953년 11월 28일~1954년 8월 26일. 경남경찰국장.

    -1954년 8월 28일~1955년 2월 15일. 경북경찰국장.

    -1955년 2월 16일~1956년 5월 26일. 전남경찰국장.

    -1956년 5월 26일~1957년 3월 11일. 치안국장(경찰청장 격).

    -1956년 9월 28일. 장면 부통령 피습 사건. 배후인물로 지목.

    -1960년 5월 장면 부통령 피습 배후조종혐의로 구속. 서대문형무소서 복역.

    -1962년 12월. 서대문형무소서 복역하다 당뇨병으로 병보석.

    -1963년 12월 17일. 사망.

    ※취재 자문 :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전갑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출처 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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