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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영조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들이 본 일본은 의외로 꽤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이 왜 통신사를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통신사 외교 형식에 있어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 관동(關東)에 원가강(源家康)이란 자가 있었는데 바로 뇌조(賴朝)의 후예로서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었으며, 용모가 잘생긴데다가 날래고 사나워 싸움을 잘하였으므로 감히 그와 칼끝을 겨룰 자가 없었다.
수길이 이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그와 강화를 맺고 그 아들 수뢰(秀賴)를 가강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수길이 죽으매 가강이 꾀를 써서 그의 딸을 빼내고 군병을 일으켜 수뢰를 쳐서 죽이고 따라서 평씨를 멸망시키고 다시 관백이 되었으니, 실은 원씨의 옛날 직책을 회복한 것이다.
이때부터 정이대장군을 세습(世襲)하되 혹은 종1위(從一位)가 되기도 하고, 혹은 정1위(正一位)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로 승습(承襲)하여 아홉 사람에게 서로 전하였는데, 지금 관백 가치(家治)는 가강의 6대손이 되는 것이다. 간혹 국왕이라고도 일컫다가 길종(吉宗)에서부터는 일본대군(日本大君)으로 고쳐 일컬었으니, 이는 바로 임금도 신하도 아닌 명호(名號)가 바르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미 부득이해서 교린한다면 왜황(倭皇)과 동등한 교제를 해야 옳다. 임금도 신하도 아닌 관백과 그 예의(禮義)를 동등히 하는 것은 더욱 수치스럽고 분한 일이다.
들으니, 관백이 새로 즉위한 뒤에 반드시 우리나라의 통신사를 청하는 것은 대개 남의 힘을 빌려 군중의 마음을 진압하려 함이라 하니, 더욱 한심하다. 또 들으니, 옛적에는 관백이 오히려 왜황에게 더러 조근(朝覲)하였는데, 백여 년 뒤로는 이 예절 또한 폐지하고 행하지 않는다 한다. 그러므로 조금 지각이 있는 자들은 울분한 뜻이 없지 않고, 더러는 비웃는 말도 있다.
만약 참다운 영웅이 그 사이에 나온다면 쟁탈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들으니, 그 배치한 규모가 매우 치밀하여 66주(州)의 절반 넘게가 관백의 심복이며, 또 백성에게는 전세(田稅) 외에 다른 징수하는 것이 없고 사역(使役)하는 일이 있으면, 곧 삯을 지급하므로 백성에게 원망하거나 배반하는 뜻이 없다고 한다.
또 궁벽한 해도(海島)에 위치한 나라여서 군장(君長)의 분별이 처음부터 밝지 못하고 누추한 풍속의 그 유래가 이미 오래므로, 풍습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루아침에 하기 어렵고, 명분(名分)을 바루는 일은 반드시 밝은 식견이 있는 자를 기다려야 하니, 이로써 말하면 반드시 옛일을 변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 사절단은 이미 일본에 천황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조선군주와 일본의 정이대장군이 대등한 관계로 맺어진 것은 잘못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언젠가 정이대장군을 무너뜨리고 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임금도 신하도 아닌데 위엄과 복을 만드니 / 匪辟匪臣作威福
관백이란 도대체 어떠한 벼슬인지 모르겠네 / 不知關白是何官
어찰을 전할 적에 심장이 찢어지는 듯 / 親傳御札心如碎
임진년을 추억하니 눈물이 쏟아지네 / 追憶辰年淚欲瀾
동래(東萊) 시장 삼초는 부질없는 무역(貿易)이라 / 萊市蔘椒徒日易
교릉의 송ㆍ백은 봄이 아직 차가운 걸 / 喬陵松栢尙春寒
화융 정책 본래부터 왕의 뜻이 아닐진대 / 和戎本自非王意
한 질의 《춘추(春秋)》를 밤 깊도록 읽노라 / 一部麟書乙夜看
사신의 명칭 회답사라 통신사라 붙여 / 使名囘答更通信
애써 화친하려는 한관이 부끄럽네 / 辛苦和戎愧漢官
통역에만 의지하니 욕(辱)을 참는 일도 많아 / 象舌徒凭多忍垢
마도(馬島) 정세 자못 험해 파란이 또 일까 두렵네 / 馬情殆甚恐推瀾
해마다 교린하느라 인삼(人蔘)도 없어지고 / 交隣蔘貨年年盡
별 부딪치는 무지개 빛은 밤마다 싸늘하구나 / 衝斗虹光夜夜寒
시인의 잠계는 예전부터 절실하여 / 從古詩人箴戒切
이릉의 비바람을 수심 속에 바라본다오 / 二陵風雨帶愁看
부사(副使)
이렇듯 사절단은 막부가 통신사를 요청했던 목적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외국사절단을 통한 국내정치적 입지의 고취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조선에 별로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절단에 참여했던 원중거는 오사카, 교토, 에도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 그리고 활기에 크게 놀랐고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돌아가서 임금에게 보고할 때는 나쁜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일종의 허위보고를 합니다.
임금은 저들이(일본이) 조선의 문무(文武)를 따라가기 어렵다지? 라고 묻자 귀국한 사절은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일본에 대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어필하지 않았던 것이죠.
사실 임란 후 통신사를 재파견한 이래 사절단은 꾸준히 일본 도시들의 화려함과 활발함을 논하고, 일본에 왜황과 쇼군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차이와 모순을 도대체 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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