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제를 전공한 홍원탁 교수는 ‘한일 고대사 연구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경제학자가 어떻게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세간의 호기심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자신에게 그러한 관심을 쏟느니 한일 고대사 문제 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라는 쓴 소리였다.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일간지에서 나를 인터뷰해서 나온 기사를 보면 ‘경제학자가 한일 고대사를 연구했다’ 이런 식으로만 난다. 내가 한일 고대사를 연구한지 20년도 넘었는데 아직 그런 식으로 기사가 나온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국제 역사학계에서 내 책을 어떻게 리뷰 했고,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가 초점이 되어야 한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의 본질에 대해 너무 모르고 정확한 역사를 알려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역사소설 수준의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일본이 역사를 왜곡 한다고 떠든다. 무엇을 어떻게 왜곡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옆에서 화가 나서 볼 수가 없다. 책을 아무리 쓰고 좀 보라고 해도 안 본다. 일본정부와 합의하에 우리정부도 20억을 들여 우리 쪽 한일관계역사 연구위원회를 만들었다는데 그 위원회에 한일 고대 관계사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뭐 하겠는가.
현재 두 가지가 큰 이슈인데 하나는 한일관계 역사 왜곡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역사의 왜곡이다. 일본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역사를 왜곡해왔다면 중국 사람들은 수천 년간 중국 위주로(Sinocentric) 역사를 왜곡해왔다. 내가 고대한일관계에 대해 88년에는 영어로만 책(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Early Period: Paekche and Yamato Wa)을 냈다. 94년에는 영문판(Paekche of Korea and the Origin of Yamato Japan)과 한글판을 함께 냈다(百濟와 大和日本의起源). 그런데 그 한글판은 아무도 안 보더라. ‘내가 국문으로 글을 쓰는 스타일이 나빠서 사람들이 많이 읽지 않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작년에 출판된 책(古代韓日關係史: 百濟倭)은 특별히 한글세대를 염두에 두고 썼다. 하지만 교보문고에서 한 달도 안돼 안 팔리는 책이라고 서가에서 빼버리더라. 다시 영어로 써서 외국학자들이나 읽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사람들은 사대사상이 굉장히 강해서 서구 사람이 영어로 한 말이라면 무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방식대로 서구학자들이 내 연구결과를 우선 받아들이도록 해 일본사회에 내 연구결과가 반영되게끔 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학계에 반영이 된다는 건 기대할 수 없는 얘기일 것이다.
고대 야마토 왕국은 백제가 세웠다
- 고대 한일 관계는 어떤 것인가?
핵심만 말씀드리겠다. 일본 고분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을 보면 대략 기원 후 375년경을 전후로 해서 그 성격이 확 바뀐다. 예를 들자면, 375년 이전 유물에서는 말뼈, 안장 등 말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375년경 이후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내몽골-북중국의 유목민족을 연구해온 동경대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이렇게 급격하게 유물의 성격이 바뀌는 건 자연발생적 변화가 아니라고 봤다. 그는 아시아 대륙에서 말 탈 줄 아는 어떤 민족이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1948년에 발표된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이다. 1945년 이전에는 이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학설을 감히 발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국주의가 종식된 후에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발표를 한 것이다. 에가미는 기마민족설에 관한 책과 논문들을 계속 쓰면서 2003년에 죽을 때까지 줄기차게 이를 주장했다. 하지만 에가미 교수는 그 정복민족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갈팡질팡했다.
그런데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 교수가 에가미가 정복민족에 대해 지나치게 횡설수설한다고 보고 1975년에 자기가 정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레드야드 교수는 346년 경 부여가 선비족한테 공격받아 대판 깨진 뒤 그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또 곧바로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나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검토해 보면 부여사람들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이라는 주장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여 사람들이 아니라 백제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하고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여러 번 읽어보면 직관적으로 그런 확신이 생기게 되어있다. 물론 주몽이 동부여(혹은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고, 온조가 졸본부여로부터 한강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고,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 남부여라고도 불렀으니 백제사람을 부여사람이라고 부를 만도 하기는 하다. 하지만 347년경에 선비족한테 깨진 부여사람들이 한반도를 무인지경처럼 휩쓸고 또 현해탄을 건너 야마토 왕국을 세웠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내가 88년에 영문으로 처음 출판한 한일고대사 책은 고작 5년 정도의 연구 결과물이었다. 어떤 말이던 좀 제대로 된 말을 하려면 최소한 10년은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서 한 5년 정도 더 연구를 하면서 개정판을 썼다. 그런데 내 동생이 국문으로도 번역을 해서 함께 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해서 직접 번역을 하고 자비를 들여 94년에 영문과 국문판을 동시에 출판했다. 영문판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도서관들에 모두 보내 주었다. 그런데 국내에서 국문판을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글을 쓰는 스타일에 문제가 있다고 반성을 하고, 다음번에는 특별히 한글세대를 염두에 두고 책을 써야겠다고 작정을 하고 ‘고대 한일관계사, 백제왜’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을 썼다. 하지만 여러 출판사들이 수지타산에 안 맞는다며 출판을 거절했다. 다행히 일지사 김성재 사장께서 ‘내가 돈을 보고 출판하는 사람이냐’며 2003년에 출판을 해 주었다. 이 책 역시 별로 판매가 안 되었기 때문에 김사장님께 미안한 생각이 든다.
중국 한족이 이민족에게 지배 받은 기간은 2천년, 중국 역사의 절반
- 동아시아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어 있나?
20년 넘게 고대 한일관계 자료를 찾다보니까 여러 가지의 역사책들을 들여다보게 됐다. 내 생각으로는 동아시아 역사는 중국 중심으로 이천년 이상 왜곡이 되어 왔다. 객관적인 사실은 중국 한족이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은 기간이 지난 2천년 중국역사의 절반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보아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등 세 지역 간 작용-반작용의 역사다. 만리장성 남쪽의 중국대륙은 한족, 만리장성 북쪽은 투르코-몽골족의 본거지였다.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만주의 서부 초원지역은 선비-거란족의 본거지였고, 중부 평원지역은 예맥족, 동부 산림지역은 숙신-말갈-여진족의 본거지였다.
지난 이천년 동안 중국 땅에 다섯 개의 정복왕조를 수립한 이민족들이 있었는데, 그 중 네 개가 만주 출신이었고, 한 개가 몽골고원 출신이었다. 이 다섯 왕조가 천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했다. 5호16국의 혼란기 중 선비족의 전연(349-70년)이 화북의 동쪽지역을 잠시 점령했었다. 하지만 북중국 전체를 점거한 최초의 이민족 왕조는 선비족의 북위(386∼534년)다. 그 다음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916-1125년)다. 거란족은 선비족의 후예다. 그 후 금나라(1115-1234년)가 북중국을 지배했다. 금나라는 만주 동부의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여진족은 요를 깨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냈다. 그 다음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1271∼1368)이다. 마지막으로 청나라(1616∼1912년)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라이름을 후금이라 했다. 모두 합치면 이민족 통치가 869년 간이다. 여기에 5호16국(302-439년)과 5대10국(902-960년)의 혼란기를 감안해야 한다.
동아시아 역사는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간의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
- 중국 한족이 동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많은 사학자들이 220년에 후한이 멸망한 후 618년에 등장한 당나라를 중국한족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시대로 간주하는데, 사실을 좀 보아야 한다. 당 고종(618-26)이 수나라를 승계하고, 당 태종(626-49년)이 사방을 정복할 때 고구려에게는 크게 패했다. 660년에 정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고종(649-83)을 내세워, 혹은 자신의 아들들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하다가 690년에는 아예 주나라를 세워 710년까지 자신이 직접통치를 했다. 그 후 755-63년의 안록산-사사명 난을 전환기로 907년에 완전히 망할 때까지 당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그런 당나라를 온 세상의 사학자들이 얼마나 미화를 했나? 그 이후를 보면, 명나라가 276년간 통치한 것을 빼고 한족이 제대로 중국대륙의 주인노릇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분석의 틀은 나 혼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는 이 비슷한 내용도 없다.
- 그렇다면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세 지역 사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진시황 이후 한족 중에서도 몇 차례 무력정복의 위업을 세운 황제들이 나오는데 전한 무제(전141-87), 당 태종(626-49), 명 영락제(1402-24) 등이다. 이들 당대에는 북방 이민족들이 꼼짝을 못했다. 그렇지만 잠시 뿐이었다. 이들이 죽고 나면 다시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고 각종물자를 바쳤다. 당나라 때에는 위구르-터키족에게도 온갖 물자를 갖다 바치면서 내란이나 다른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통사정 했다. 안록산의 난 때도 위구르-터키족이 와서 평정을 도와줬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주-중국대륙 관계와 몽골고원-중국대륙 관계의 성격상의 차이다. 몽골고원의 흉노-돌궐 유목민족들은 인구가 조밀한 만리장성 이남의 정주농경지대를 정복하고 통치한다는 것이 체제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단순히 한족을 약탈하고 겁줘서 필요한 물자를 갈취하는 전략을 택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살육-파괴를 하면 한족들이 화친-조공이란 체면치례 하에 매년 비단, 술, 양곡, 돈, 공주까지 바치면서 화해를 했다. 이는 만리장성 국경을 지키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만주족들은 기회만 생기면 중국대륙을 점령하고 직접 통치하려했다. 역사학자들의 이론 전개가 재미있다. 몽골 고원은 농경사회가 아닌 유목사회여서 정주 농경민족을 다스리는 법을 몰랐는데 만주에 사는 민족은 송화강-요하 유역의 농경문화 존재 덕분에 정주농경사회를 통치하는 비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만주 서부 목초지의 선비족이 강성할 때는 요하 유역의 도시와 농촌을 점령해 중국식으로 관료적 통치를 했었다. 군사조직은 유목민족 고유의 시스템을 지키고, 비군사 관료조직은 중국식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선비 모용씨가 요하지역을 다스릴 때 개발하고 모든 만주정복왕조가 애용한 이원체제(Dual System)이다.
이와 같은 이원체제를 발전시키니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농경민족을 통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북위가 이 방법으로 북중국을 통치할 때, 몽골고원의 유목민족들은 만리장성 부근에 접근도 못했다. 막강한 북위 기병이 오히려 몽골 유목민들을 계속 핍박 했었다. 북위가 망한 것은 너무 중국화 되어 군조직과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을 때였다. 선비족 후예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웠을 때도 이원체제를 고수했다. 여진족의 금나라,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몽골고원 유목민족 중 예외가 있다면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다. 과거 흉노-돌궐 족이 만리장성 아래 중국한족을 협박하면 겁을 먹고 알아서 온갖 물자를 받쳤는데, 징키스칸이 쳐들어 올 당시에는 만주 출신 금나라가 북중국을 점거하고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동부만주 산림 속에서 보통 독하게 산 족속이 아니었다. 몽골족의 협박에 굴복하기 보다는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 와중에 몽골족은 금나라의 시스템을 배우고 중국을 통치하는 법을 터득했다. 몽골은 당시 중앙아시아를 이미 정복했었는데. 그 곳에서 위구르-터키 족 전문가들을 데려와 중국통치 관료조직에 이용할 수 있었다. 원나라가 중국 전 대륙을 정복한 것도 당시 몽골의 유라시아대륙정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고 나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할 수 있느니 없느니 하는 얘기가 나올 여지가 없다. 중국 한족은 이민족한테 침략과 통치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지금처럼 영토가 커진 것도 원나라의 쿠빌라이칸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청나라 건륭, 옹정, 강희 세 만주족 출신 황제들의 활약 덕분이다.
억지부리는 중국 한족
- 말씀을 듣고 보니 중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한족이 만주 전체를 먹은 건 1912년 이후다. 그 이전에 요동 근처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기는 했다. 한 무제가 고조선 치고 한사군을 설치했지만 오래지 않아 대부분 쫓겨났다. 수나라 때도 요하까지는 몇 번 왔었다. 그 다음 당 태종이 시도를 해보았고, 나중에 측천무후가 백제, 고구려를 정복하고 도독부들을 세웠지만 신라에 의해 678년에 한반도로부터 모두 쫓겨났고, 요동은 발해의 땅이 되었다. 안록산의 난 이후에는 당의 영향력이 발해에 밀려 산해관의 만리장성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한족이 요동 근처를 얼쩡댄 게 얼마나 된다는 말이냐. 지난 3천년간 900년도 안된다.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 중국을 점령한 것이지 한족이 만주를 차지한 게 아니다. 청나라 때 만주족들은 중국한족들이 만주에 얼쩡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수 백리에 달하는 도랑을 파고 제방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한족진입을 금지했다. 만주 땅은 만주족들이 말 타고 사냥하면서 상무정신을 키우는 곳이지 한족이 가서 농사를 지으라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는 18세기 말까지 거의 무주공산의 빈터 같이 보였다. 청나라가 쇠망하면서 중앙정부 통제력이 사라지니까 한족들이 만주로 대거 진입했다. 그래서 만주 인구의 90% 이상이 한족이 되어버렸다. 옛날에는 100-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땅이었다. 우리나라 중고등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다.
만주지역의 영향은 현재 중국의 표준어라는 만다린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중국어의 표준말인 만다린어는 원래 요동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중국말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알타이어 계통에 속하고 본래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어들은 중국-티벳트 어족 계통으로 분류된다. 청나라 사람들이 처음 만주족을 동원해 만든 군사조직이 팔기군인데, 후에는 몽골족, 한족의 팔기군도 만들었다. 한족 팔기군은 전체 청나라 병력 중 사분의 삼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한족 팔기군의 핵심은 원래 요하 유역에서 살던 한족들인데 만주 땅에서 만주 민족들과 오래 어울려 살다보니 자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자체도 상당히 알타이어화 됐다.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하고 중국대륙을 통치를 하려고 보니 이들 요동의 한족들이 사용하던 중국어가 가장 귀에 익고 의사소통이 편하기 때문에 청조의 상용어로 쓴 것이다. 즉 청나라가 요동에서 가지고 온 말이 만다린어다. 알타이어 특징이 중국어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고 또 어미변화가 굉장히 많다는 것인데, 만디린어 역시 중국방언 중 어미변화가 가장 많다. 그래서 일부 언어학자는 이 만다린어를 중국어가 아니라 만주어로 분류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한다.
홍교수는 1981년 오사카대 모리시마 경제학 교수가 쓴 ‘왜 일본은 성공했는가(Why Japan has succeeded)’란 책을 읽다가 일제 때 국민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왔음직한 얘기를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모리시마가 고대에 마치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 같이 서술하는 것을 보고 한일 고대사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왜 관심을 가졌는갗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또 잘 모르고 있는 고대사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게 할까 하는 고민으로 각종 역사서적을 탐독하며 한일 고대사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은 백제가 세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북아는 한바탕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감정을 앞세워 대응하다가는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왜곡된 논리에 어이없이 당하기 십상이다. 홍교수가 한일 고대사와 동북아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만이 21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구현한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홍원탁 교수 약력 -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1962년) -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 경제학 박사 (1966년) - KDI 수석연구원 (1971-77년) -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부 교수 (1977년-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