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당한 세대
퇴근 후 걷는 이 길은 언제나 젖은 듯 습하기만 하다. 하루 종일 말리지 못한 내 마음이 안쓰럽다만 별 도리가 없다. 샤워 후에 차게 식은 캔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며 홀로 자위한다. TV는 언제나 3포, 5포를 외치며 나와 내 또래들을 습한 지하로 내 몰기만 한다. 얼마나 슬프고도 무서운 말인가 사랑도 포기하고 삶을 살아가야 하다니.
문득 옛 그녀가 생각난다. 대학 시절 그녀는 09학번 신입생이었고 고3티를 못 벗은 통통한 단발머리의 생기 넘치는 여자였다. 그때의 난 잃을 것이 없어 자신감에 차 있었고 지나간 실수에 뒤돌아보며 민망함에 고개를 떨굴 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학생이라는 공통된 신분이 너에 대한 사랑을 제약 없이 붙들었고 4번의 고백 끝에 우린 연인이 되었다. 여느 대학생 커플처럼 난 군 입대를 고하며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훈련소로 향했다. 망할 특급 우편은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광주에서 철원까지 2주의 시간을 내달려 네 소식을 전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난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걸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내 꿈, 내 젊음, 내 사랑. 거기서 부터일까? 나도 모르게 많은걸 포기 당하면서도 수긍하게만 된 듯하다.
가슴이 또 저린다. 붙잡지 못한 그녀를 이제는 잡을 수 없음을 알지만 이것만큼은 추억하게 해달라며 가슴이 절절히 매달린다. 13시간을 일하고도 고작 연봉 2000인 내가 추억이라도 곱씹지 않으면 어찌 살 수 있겠냐며 동정을 구한다. 맞는 말이다. 침대에 누워 알람을 6시로 맞춘다. 뉴스는 아직도 청년 실업 문제를 내뱉지만 난 그래도 직장이 있지 않나 라고 말해보지만 이내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루의 비겁했던 일과가 스친다. 병사 시절 포기 당했던 것을 난 오늘도 포기했다. 아니 포기 당했다. 눈이 시리다. 오늘은 유독 지난 일에 대한 후회가 가득하고, 사랑마저 포기했던 내 신세가 가엾다. 이불에선 늦 여름비의 쿱쿱한 발자국 냄새가 난다. 6년째 홀로 살았지만 이 밤의 빈자리가 너무도 커서 잠들기 힘들다. 이제는 희미해진 고등학교 친구들의 모습을 핸드폰 속 작은 액정을 통해 염탐질 해본다. 그들은 행복한 웃음에 하루하루 활기차 보이려 한다. 하지만 다들 눈치 챘을 것이다. 불안함에 뒤집어쓴 가면의 어색함과 보이지 않는 내일이 다가옴에 조급해하는 20대 늦자락 인생이란걸.
결코 ‘아프니깐 청춘이다’란 말은 우리를 대변해 주지 못한다. ‘포기당하니깐 청춘이다’란 말이 더욱 와닿는 오늘날. 난 오지 않을 듯 했던 새벽의 치맛자락에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