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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포기한 것을 나열해 볼까요?
우선 그림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릴 수 없었던 그림이요.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없이 관두었던 그림 말입니다.
아십니까. 저는 그때 아버지께 대꾸하지 못했기에 더 후회가 됩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왜 화를 내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후회 때문에 경영학을 관두겠다고 한 것이었고
잘하지도 못하는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겁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동생이 그림에 훨씬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재능이 전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동생은 재능을 갖고 있었음에도 제게 그림을 공부하지 않겠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굶어 죽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동생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이나 하실 수 있으십니까.
동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유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던 제가 틀린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가깝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눈물을 흘리며 가족을 포기하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상냥하게도 제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라 타일렀습니다.
저는 더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제 울음소리가 아직도 이따금 저를 미치게 합니다.
그녀와 제가 나란히 앉아 있었던 침대, 방 밖의 찌는듯한 더위, 에어컨의 시끄러운 작동소리.
그 모든 게 생생합니다.
하지만 전 그때 그녀에게 그 말을 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제 삶에서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감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저는 당신의 그 말 덕에 모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의 말 뒤에 감춰진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포기하게 하고 싶으셨겠죠.
그림이라든지 글이라든지, 돈이 되지 않는 저의 모든 걸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가장 먼저 당신의 이해를 포기했고 그다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포기했습니다.
우습죠.
저는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말입니다.
기억하고 싶어서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친구분 차 안에 있었고,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운전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조수석에 앉아 계셨고,
전 아버지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리고 저는 궁금했습니다.
내 시선은 분명히 창밖을 향해 있는데 어째서 아버지의 인상을 쓰고 있는 얼굴이 보이는 건지 말입니다.
몇 년이 지나 당신은 제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너는 왜 자신감이 없니?’
당신은 또 ‘돈이 전부는 아니지’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신은 바로 며칠 전에 ‘문학은 돈이 안 되지’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저를 비웃듯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왜 나를 믿냐? 너 자신을 믿어야지.’
아버지, 저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열아홉 살 때부터 지금까지 겪은 슬픈 순간들이 제겐 너무나 거대합니다.
전 스무 살이 된 이후로 나이를 세는 걸 관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혼자 밥을 먹고 익숙한 얼굴을 못 본 척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몇몇 친구에게는 따뜻한 이가 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제가 좋은 사람인 줄 압니다.
저는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주지 않았냐?’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매번 저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기도 전에 저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제가 외교관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들이 다 아는 큰 회사에서 일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국제관계학, 법학, 경영학.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제 미래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그 미래엔 그림을 그리는 저도 글을 쓰는 저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속이는 데에 능숙하셨습니다.
‘넌 언어에 소질이 있어’.
그러나 아버지의 칭찬은 당신이 제게 제안하신 미래에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그림과 글은 아버지의 칭찬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쓸모없는 재주였습니다.
‘넌 글을 잘 쓰니까 대학 총장한테 직접 글을 써서 보내라’.
아버지께서 제 입학 문제에 관해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 때 저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총장에게 쓴 글로 인해 전 아버지가 바라시던 대학의 경영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원하실 때만 저는 글을 잘 쓰는 딸이었고,
당신이 원하시지 않을 때는 전 그저 한국어를 한국에서 자란 사람만큼 하지 못하는 이민자였습니다.
한국어로 글을 써서 작가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꿀 이민자 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도 한국어로 글을 씁니다.
아버지껜 허튼 꿈일 지도 모르겠지만 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될 겁니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겁니다.
제가 한국어를 한국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잘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은 한국어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이것만큼은 언젠가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글의 전부는 아버지십니다.
제가 글을 통해 한 것이라곤 결국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한탄하지 못한 말들을 한탄한 일뿐입니다.
출처 | “My writing was all about you; all I did there, after all, was to bemoan what I could not bemoan upon your breast.” (제 글의 전부는 아버지십니다. 제가 글을 통해 한 것이라곤 결국 아버지의 가슴에 안겨 한탄하지 못한 말들을 한탄한 일뿐입니다.) - Franz Kafka. Letters to His Father 여기저기 의식의 흐름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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