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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압 하르는 거대한 흰색 암반 위에 새워져 있습니다. 태고부터 행성의 지하에 머물러 있었을 이 암반은 그 길이가 남쪽 출신의 건장한 흑인 노예가 쉬지 않고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할 정도고, 그 한 쪽 끝은 일찍이 신의 권능에 맞서다 죽임을 당한 거인의 척추라 알려진 산맥에, 다른 한 쪽은 페르시아산 수정만큼 맑아 바닥이 훤하게 빛나는, 그리 깊지 않은 해안에 걸쳐 있습니다.”
“바다는 바람이 항상 일정하고 물살이 거칠지 않아 일 년 내내 상인들로 북적이고, 물에 닿으면 물러지는 이 흰색 암반으로 정교하게 깎아낸 부둣가는 선원 삼백 명이 타는 거대한 갤리선을 마흔 척 가까이 동시에 정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군선이 이 항구에 정박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동방인 사절단과 상인들, 그리고 이들이 부리는 남쪽 출신 흑인 노예들로 가득하온데, 동방인들이 사용하는 향수의 종류만 수백 가지며, 흑인 노예들은 각자 소속된 부족의 냄새를 풍기는데다가, 그중에는 역한 짐승의 냄새를 풍기는 부족도 더러 있어 그야말로 각종 냄새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역겹네요. 좀 더 깔끔한 구역에 대해 이야기 해 줘요.”
“압 하르는 도시 전체가 암반 위에 지어진지라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도시 북쪽의 산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들을 모아 세 개의 큰 수로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사온데, 이 수로들에는 작은 나룻배가 위아래로 충분히 돌아다닐 만큼 넓으며, 아이들이 날마다 물장구를 칠 정도로 물이 맑사옵니다.”
-“수로라면 분명 집집마다 오물을 버리는 장소일 텐데 어린아이들이 물장구를 칠 정도로 맑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군.”
“도시의 각 집에는 오물을 버리는 수로와 연결된 시설이 있는데, 이 오물용 수로는 도시 전체를 돌아서 족히 수십 리는 떨어진 바다와 이어지나이다. 또한 사람이 내다버리는 오물은 물고기와 해조류에게 이로워 인근의 고기는 모두 굵기가 성인 남성 팔뚝만하며, 미역은 크게 펼치면 범선의 범포만큼 넓습니다.”
-“웩, 결국 자기가 싼 똥을 다시 먹는다는 거네요.”
공주는 역겨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잠시 퉤퉤거리더니 손짓으로 모험가의 이야기를 끊었다. 비가 막 개인 저녁하늘은 오렌지 껍질을 던져놓은 듯한 구름들이 가득했고, 정원에서는 콤콤한 초목냄새가 피어올라 그 냄새를 맡는 사람에게 어떤 아련한 향수 비슷한 것을 불러 일으켰다.
해질녘의 봄바람이 아직은 차가웠는지 공주는 하인들을 시켜 정원으로 난 커다란 창을 닫게 했다. 남방의 이국적인 문양이 수놓인 커튼이 쳐지자 침실을 은은하게 밝히던 램프의 불꽃이 좀 더 뚜렷하게 빛을 발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 도시에 갈 수 있을까요?”
“마마,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 속 도시에 가실 수는 없습니다. 도시 그 자체의 이야기는 저 같은 하찮은 모험가 혼자서 입으로, 때로는 몸짓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게 아니옵니다. 제가 뛰어난 언변으로 도시의 하늘을 가득 매운 알루미늄 첨탑들에 대해, 또는 도시의 둥근 모스크 지붕들을 번쩍이며 빛나게 만드는 크롬 칠에 대해 설명을 한다 한들, 제 입은 고작 그것들을 표현하는 단어를 뱉어낼 뿐이지 그 지붕의 귀퉁이라도 직접 때어 오는 것은 불가능하옵니다.”
-“하지만 오늘 점심엔 크롬을 칠한 지붕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조각을 가져오지 않았나요?”
공주는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서 은빛 나는 금속편 하나를 꺼내보였다.
“마마, 신은 분명 그 도시에서 지붕의 조각 하나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이제 그 조각은 마마의 침실에 보관된 기념품일 뿐이지 실제로 그 도시에서 빛나고 있는 지붕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외람되오나 마마, 제가 만일 이 침실에서 무언가 값나가는 물건을 하나 들고 장물아비에게 간다면 그 또한 역시 몇 푼의 흔한 금화가 아니옵니까.”
공주는 귀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어찌 됐든 그녀에게는 값비싼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도, 또 그 도자기 수백 개를 가득 채울 만큼의 금화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일찍 잠에 들기 싫은 마음에 부른 모험가였는데 그의 목소리는 너무 단조롭고 때로는 졸리기까지 해서 공주의 자제력은 슬슬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그녀는 잠을 자기로 결정하고 자기만큼이나 큰 실크 베개를 껴안은 채 방 안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쳤다.
-
공주는 백단향의 묵직한 향기에 눈을 떴다. 커다란 황동제 향로 앞에는 어제와는 달리 제법 깔끔한 모습의 모험가가 손부채질을 하며 백단향의 향을 몸 구석구석에 끼얹고 있었다.
-“.......지금 허락도 없이 제 방에 무단으로 들어온 건가요?”
마마께서 아까 사람을 시켜 소인을 불렀사옵니다. 침대에 엎어지신 모습 그대로 향을 피워 달라 하시어 분부를 받들던 차였습니다만.
공주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이야기였다. 평소 자기에게 잠꼬대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철 들 무렵부터 혼자 잠들었던 공주의 잠버릇을 알고 있을만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공주는 중얼거리며 속옷을 벗어던지고 반투명한 옥양목 가운을 걸쳤다.
모험가는 시종에게 받아온 공주의 아침식사를 하나씩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구름처럼 폭신한 빵과 동방에서 수입한 무화과 잼, 농민들도 종종 만들어 마시는 탄산이 들어간 가벼운 도수의 사과주가 마호가니 식탁 위에 은식기들과 함께 가지런히 놓였다.
-“.......더워서 입맛이 없어요.”
공주가 식탁에 턱을 올린 채 중얼거렸다.
“그럼 대양을 항해할 때 만난 식인종들에 대해 이야기해드릴까요. 입맛을 돋우기에는 더 없이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모험가가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사과주를 잔에 따랐다. 탄산거품이 음료의 표면에서 간헐적으로 터지며 백금빛 방울들을 식탁 위에 뿌렸다.
잠이 덜 깬 공주는 사과주를 그대로 단숨에 마시고는 목을 몇 번 켁켁거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강렬한 햇빛이 공주의 밤색 머리칼을 통과하며 한 층 더 강렬한 적갈빛을 뿌렸다.
공주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뒤로 넘기고는 잼을 크게 한 술 떠 빵에 펴 발랐다.
“그럼 잠도 다 깨신 듯 하니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가려던 모험가의 등에 무화과 잼이 잔뜩 발린 은수저 하나가 날아와 찰싹, 붙었다.
-“식인종 얘기, 해봐요.”
-
가을의 왕궁은 분주하여, 시녀들은 작년에 담군 사과주통을 굴리며 어딘가로 향하고, 각 대신들의 전령들은 각자의 주인을 나타내는 색상의 화려한 옷을 입고 사방에 퍼져 있는 사무실들로 달려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매년 수도에서 열리는 수확제의 준비였다.
이 시기는 비단 시종들만이 아닌 왕족들과 그 손님들에게도 바쁜 시기였다. 왕궁 곳곳에서 백작들의 부인들과 영애들이 입을 드레스가 한 수레 씩 돌아다녔는데, 한 벌에 사금 한 줌씩이나 하는 드레스들이 어찌나 흔하게 돌아다녔는지 가끔 하녀들이 드레스를 걸레나 그 비슷한 걸로 착각해 린넨실에서 뜨거운 증기세탁을 해버리는 상황도 벌어지고는 했다.
-“어때요? 좀 어른 같은가요?”
공주는 붉은색 공단으로 만든 드레스의 어깨끈을 붙잡으며 말했다. 드레스는 공주에게 너무 커서 어깨끈이 흘러내리는데다가 가슴 부분은 아예 풀썩 꺼져있어 마치 허수아비에 입힌 셔츠 같은 느낌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길게 헝클어진 금발을 검은 비단리본으로 묶어 단정히 정돈한 모험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별로인거 알아요. 이건 색깔이 나랑은 좀 안어울리죠?”
공주는 드레스를 휙 벗어 던지고는 바다빛의 가벼운 천으로 된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이건 내 머리색이랑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아요.”
모험가는 이번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씩 웃어보였다. 그가 보기에도 공주의 밤색 머리칼과 바다빛 드레스는 썩 어울려보였다.
공주가 거울 앞에서 드레스를 이곳저곳에 대어보며 말했다.
-“이 바다빛 염료, 우리나라에서 안 나는 거죠?”
“동방의 먼 땅에서 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상인들은 주로 화약과 종이를 팔고 이 염료를 사오지요.”
-“그 나라, 가 봤어요?”
“언젠가 가보고 싶군요.”
모험가는 정원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어딘가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불안함과 활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공주가 던진 드레스가 모험가의 머리로 날아와 사뿐히 얹혔다.
-“잘 됐네요, 그럼 나도 데려가요.”
공주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드레스 너머로 얼핏 보였다.
-
-“쉬, 쉿- 아이참, 말 좀 들어라!”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달빛이 왕궁을 들여다보는 어느 밤. 하얗게 쌓인 눈밭 위에서 공주가 각설탕처럼 하얀 말 한 마리와 씨름하고 있었다.
-“거 참,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요!”
“코, 코를 잡으세요. 코.”
마치 동상처럼 서 있는 밤색 말 위에 올라탄 모험가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착하다 착해.”
“말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뭐, 승마시간 외에는 거의 볼 일이 없으니까요. 사실 이 아이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요.”
공주가 탄 말이 신경질적으로 푸르릉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 말이 화난 모양인데요? 말은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거든요.”
-“예? 정말요? 그럼 이 아이는 이제부터 [각설탕]이라고 불러야겠어요. 말은 각설탕을 좋아한다면서요?”
공주는 이렇게 말하며 안장에 걸린 가방에서 거의 주먹 만 한 각설탕 하나를 꺼내 말에게 먹였다.
이튿날 아침, 궁전에 있는 모든 경비병들과 경비대장의 정강이를 최소 두 번씩 까대느라 왕은 발가락이 부러지고 말았고 왕비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그런 왕에게 깁스를 해주고 있었다.
“그 뺀질이 노숙자 자식이, 감히 우리 딸을 꼬드겨서 야반도주를 해?”
왕은 집무실을 절뚝이며 돌아다니면서도 분노를 멈추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의 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살펴보고 있었고,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공주를 어릴 때부터 업어 키웠다던 육군대신은 웬만한 용기 있는 자도 쉽사리 접근하기 힘들 정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
“폐하, 저에게 날랜 기병 오백을 주소서, 신이 직접 말을 몰고 나가 그 개간놈의 머리를 잘라오고 공주님을 안전히 모셔오겠나이다!”
도저히 어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거친 욕설에 심약한 대신들이 몸을 움츠렸다. 특히 유약하기로 유명한 재무장관은 거의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아닐세, 날랜 기병 오천을 주겠네, 나와 함께 그 XX할 XX자식을 잡으러 가세!”
“아뇨, 두 분 다 날랜 기병은 접어두시고 머리를 좀 식히시지요.”
도저히 왕의 언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 포악한 욕설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후세에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서기의 뒤편으로 왕비가 들어왔다.
갑작스런 왕비의 등장에 놀란 서기는 회의록 한켠에 [왕비등장!]을 큰 글씨로 써 넣었다가 황급히 지웠다.
대신들은 모두 살았다는 표정으로 왕비의 뒤로 우르르 몰려갔고, 왕비는 발걸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으로 날렵하게 육군대신의 귀를 잡아 당겼다.
“오라버니, 내 딸은 잡아도 내가 잡아옵니다. 이만 진정하시고 정무를 돌보러 가소서.”
육군대신은 한 쪽 귀를 잡아당겨진 채로 주인에게 끌려가는 강아지 마냥 집무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육군대신을 집무실 밖으로 내쫓은 왕비는 이번에는 왕의 귀를 잡아당길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서 왕이 서 있는 자리로 왔다.
“와, 왕비! 잠깐!”
“한 나라의 국왕께서 체통을 지키고 또 지켜도 모자랄 판에 저런 멍청이와 어울려 대신들 앞에서 상스러운 욕설을 행하시다니, 페하의 남자답고 호탕하신 모습에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왕비는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말투로 왕의 귀를 잡고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재무장관을 밀어내 왕을 자리에 앉혔다. 일련의 흥미진진한 사태를 기록하고 있던 서기는 왕비의 서슬퍼런 손가락질에 그만 지금까지의 기록을 몽땅 찢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왕비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심약한 대신들을 순식간에 휘어잡았다. 남들이 말했다면 반드시 한 번은 의심해볼 만한 이야기도 왠지 왕비의 화려한 언변과 강렬한 제스처가 합쳐지면 도저히 의심 할 수 없는 진실처럼 보였다.
결국 이 날의 비상 회의는 공주의 가출은 단순한 해프닝이며, 사실 공주는 괘씸하게도 아무런 통보 없이 조부모가 살고 있는 시골의 작은 별장용 성에 놀러 간 것으로 결정 났다.
물론 공주의 가출소동 뒤에 모험가와 공주, 왕비의 비밀스러운 결탁이 숨겨진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공주님, 말 위에서 주무시면 위험합니다. 이 쪽으로 건너와서 주무시겠어요?”
새벽동이 트는 바닷가를 배경으로 공주가 말 위에 앉아 위태위태한 자세로 졸고 있었다.
-“네....... 밤잠을 설쳤더니 좀 졸리네요....... 잠깐 실례할게요.......”
공주가 모험가의 앞에서 중얼거리며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내 작은 공주님과 배낭(가제)]입니다.
알아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프롤로그 전체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본문 역시 각각의 계절을 하나의 챕터로 구성하여 총 4화 + 에필로그로 마무리 할 계획입니다.
현재 봄 챕터와 여름 챕터를 완성했으며, 각각의 분량은 본 프롤로그보다 살짝 긴 정도입니다.
내용은 보시다시피 공주님과 모험가의 여행기이며, 각 화의 자세한 내용은 한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3~4개정도의 짧은 단편들을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하는 식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도착-관광-떠남] 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위 점을 염두에 두시고 비록 갓 퇴고한 프롤로그지만 기탄없이 의견이나 느낀 점을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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