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인 것 같다.
친하게 지내던 중학교 동창이 자기네 학교에 새로 국어 선생님이 오셨는데
연극도 하시고, 사람도 좋으셔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최고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숨 막히는 입시 제도에 <왜불러>같은 노래조차 금지곡이 되는 유신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정말 우리 학교에도 그런 선생님이 계셨으면 하고 부러워하며 친구의 자랑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매일 아침 등굣길에 내가 탄 버스가 그 학교 앞을 지나갔던지라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선생님을 떠올렸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몇 달 안가서 그 친구는 선생님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셨다고 코가 쏙 빠져 있었다.
그 선생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2년쯤 지나서 10.26사건이 나기 얼마 전이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진 '반국가단체'가 적발되어
남민전 사건이란 명칭으로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연루자들의 이름 속에서 나는 남민전의 주요 간부가 된 그 선생님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선생님과 직접 인사하게 된것은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88년이었다.
6월항쟁 이전에 군사독재의 험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린
공개 대중 강좌는 서울민중연합의 민족학교밖에 없었다.
당연히 민족학교는 우리 청년학교 준비팀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본보기가 되었고,
청년학교가 출범하게 되면서 우리는 민족학교로 인사를 갔다. 거기서 그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이다.
운동 진영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귀동냥한 터에
고등학생 때의 설렘을 그대로 간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선생님께 직접 인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아주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때 그분이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이다.
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해도 징역을 살리는 긴급조치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1970년대 말,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있기전인 1960년대부터 극히 일부지만 학생운동 출신의 선구자들은
결국은 기층 민중인 노동자들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한 대량 제작 사태를 겪으면서 일부 제적생들은
학생 신분에 대한 미련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기름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들이 이른바 '위장취업'의 효시인 셈인데, 학생운동의 계보를 따진다면
'과학적 사회주의' 그룹을 줄여서 '과사'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과사'에 속한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 운동을 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고통받는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전설처럼 소문으로만 듣는 것이었지만
무언가 있는-그게 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본받을 만한 선배로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현정에 들어간 선배들 중에서 후배들 사이에서
제일 많이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은 '과사' 그룹의 창시자 격인 김정강이었다.
15년간 현장 노동자로 활동하며 멀리 대학가에까지 풍문으로 전해지던 김정강은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전두환의 민주정의당 전문위원이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조 하나 만들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던 시절,
'학출(학생 출신)'이 노조위원장까지 되어 신화를 남긴 이가 있었다.
경찰이 그를 빨갱이라며 잡으로 왔을 때 노동자들이
"우리 위원장님"이 왜 빨갱이냐며 감싸고 나섰다는,
대중사업이란 모름지기 저렇게 해야 한다는 모범으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 뒤 그는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으로서, 서노련의 지도부로서,
그리고 유명한 인천 5.3사태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이어나갔다.
복잡한 운동판에서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노동운동의 대부'라는 칭호를 들으며 그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는 그 전설적인 선배와 정식으로 인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1985년쯤 한 번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 적은 있다.
나와 아주 친한 선배가 밤 12시가 다 되어 전화를 하더니
"너희 집에 지금 손님 없지?"하고 물었다.
여기서 '손님'이란 다른 수배자 혹시 와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없다는 말에 그럼 집 좀 쓰자 하더니 내가 제대로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20분쯤 지나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꾸역꾸역 한 열 명쯤 들어왔다.
선배에게는 안 물어보았지만 아마도 서노련 지도부쯤 되지 않았나 싶다.
밤샘 회의를 하기로 했던 장소가 문제가 생겨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다.
그중 안경을 낀 한 사람은 유달리 내 책장에 꽂힌 책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일제 시기 간행된 <동아일보>의 축쇄판을 꺼내 유심히 보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가 바로 유명한 그 노동운동가 선배구나 하고 직감했지만,
그 당시의 예의상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가 비로 지금의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이다.
-한홍구 [대한민국史]中
"변절의 역사, 변질의 역사 : 허공을 가르지른 명패의 슬픔"-
소드펌..
인생의 아이러니..ㅋ...ㅋ... 웃음도 안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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