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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 후 한 번도 온적 없는 책게, 들어오니 나갈수가 없네영! 다들 책게 오세요!(찡긋!)
#01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밤부터 계속 내려 소복이 쌓인 눈 덕분에 세상은 온통 새하얀 얼음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뽀드득-뽀드득-
창문을 열자 보이는 순백의 광경에 마치 이 세상에는 존재할 리 없는 얼음나라의 주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리마저 새하얗게 변해 눈 속에 파묻혀 버려 주위가 적막하였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그 느낌에 소녀는 활짝 웃으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도 상쾌하게 받아들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함박눈에도 기분이 좋아 두 손을 벌려 그들을 맞이하였다. 새하얀 눈 조각들은 손의 열기에 녹아 물이 되어버리는 그 순간마저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다.
뽀드득-뽀드득-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깨끗한 길에 하나 둘, 자신의 자국이 남는다.
오늘은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어깨 위로 느껴지는 케이스도 오늘따라 전혀 무겁지 않았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어제 애를 먹었던 곡도 쉽게 연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달칵-
케이스를 열자 부드러운 갈색 빛의 고급스러운 바이올린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안녕? 좋은 아침.”
새벽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소녀는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쳤다.
쇼팽의 야상곡(nocturn)9의 2번.
소녀가 바이올린을 든 순간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순백의 길거리는 무대가 된다.
#02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좋은 일도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었다.
164/338
한 달 전에 치룬 모의고사의 성적표가 오늘 게시판 앞에 순위대로 붙여져 있었다.
이런 행위는 철저하게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동네에서 콧대 높기로 소문난 사립 고등학교가 학생들의 인권을 일일이 생각해 줄 리가 없었다.
소녀는 그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찾아 점수를 바라본다.
자신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등 뒤의 바이올린 케이스가 무겁게 느껴졌다.
#03
저벅저벅-
아무도 없는 복도에 소녀의 발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니, 정확히는 창 밖에서 아이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무거운 발소리뿐이었다.
발소리가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듯 한 걸음 한 걸음 걸을때마다 나는 소리가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잔뜩 틀리긴 했어도 아침에 녹턴을 연주했을 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고 즐거웠었는데…….
사춘기 여자아이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위아래로 정신없이 올라갔다 떨어진다고 했던가? 지금의 자신이 딱 그런 꼴이었다.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릴 생각에 걱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어깨가 저절로 축 쳐졌다.
“……?”
처음에는 작은 소리였다. 못 듣고 지나칠 만큼 작은 소리는 이제 바이올린 부실로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이올린 소리였다. 누군가 부실에서 바이올린을 키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부실에 들리는 것은 자신 밖에 없는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소녀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그저 소리만을 쫓아 부실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거의 뛰었다고 하는 게 적당한 표현이었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봄.
흠잡을 데 없는 뛰어난 솜씨였다.
지금 여기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 라는 생각에 소녀는 잠시 밖에서 경청하였다. 그러다 문득 자신도 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곡과 같이 연주한다면…….
달칵-
봄의 악보는 이미 머릿속에 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소녀는 그 특별한 곡의 연주에 합세하였다.
같이 연주하면서 소녀는 이 곡을 연주하는 자가 굉장히 빠른 템포로 손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 속도와 기교. 자신 같은 아마추어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절정으로 비브라토가 나올 때에는 소녀는 그저 그 연주의 보조만을 간신히 맞춰줄 뿐,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연주가 막을 내렸을 때 소녀는 부실 문을 벌컥 열었다.
보고 싶었다.
이 정도의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학교에 있었다니! 누구인지 확인하여 그 얼굴을 알고 싶었다.
소녀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그 시간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하늘사이로 내려오는 햇살이 부실의 창문을 뚫고 들어와 바닥에 빛의 파편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 빛의 조각들의 한 가운데에 그가 서 있었다.
밤처럼 까만 머리칼과 그와 같은 새까만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처음 보는 그 학생의 모습에 소녀는 가만히 넋을 잃고 소년을 바라만 보았다.
‘저런 학생이 우리 학교에 있었었나?’
같은 반 동급생의 얼굴도 다 알지 못하는 그녀는 곧 무의미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생각을 지워버리곤 소년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그는 어려보이는 얼굴에 비해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오래 산 노인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모순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소년이 입을 열었다.
“멍청이.”
“……!”
내심 소년의 말을 기대했던 소녀는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지금 그가 자신에게 말한 것이 맞는 것이겠지?
소년은 소녀에게 관심도 없다는 듯이 들고 있던 자신의 바이올린을 챙겨 넣고는 소녀에게 다가왔다.
“넌 비브라토도 제대로 못하냐.” (비브라토 : 음악 연주에서 목소리나 악기의 소리를 떨리게 하는 기교)
화끈거리며 소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원 중에서 제대로 비브라토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기는 했지만 소녀는 작년 겨울방학 때부터 비브라토를 연습해왔었다. 그러나 제대로 성공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만큼 시간을 들였는데도 못한다며 내심 자책하고 있었는데 아픈 부분을 정통으로 직격 당했다.
고개를 숙인 소녀를 잠시 바라보던 소년은 그녀를 지나치며 지나가듯이 툭 내뱉었다.
“바이올린 끝을 벽에다 대고 연습해봐.”
“뭐……?”
뒤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소년은 이미 나가버린 뒤였다. 붙잡아서 이름이라도 물어 볼까 생각했지만 멍청이라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쪽팔려서 붙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소녀는 다시 바이올린을 들어 그 끝을 벽에다 갖다 대었다.
소녀는 곧 바이올린과 자신만이 있는 그녀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04
소녀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대한민국의 흔하디 흔한 수험생들처럼 소녀도 수능을 치룰 준비를 해야지 정상이겠지만 지금 소녀는 자신 만의 작은 세계에서 가상의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소년의 조언대로 바이올린의 끝을 벽에다 대고 하자 비브라토가 훨씬 쉽게 되었다. 조금만 더 연습하면 끝을 벽에서 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아침에 봤던 모의고사 성적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쉬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3월이 다가오는데 함박눈이 내린다느니 수능을 볼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된다느니…….
그러나 지금 자신만의 세계에 있는 소녀에게 그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말을 걸어도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얘!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 하는 게 예의 아니니?!”
버럭 질러오는 고음에 소녀는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짧은 단발에 둥근 안경. …아, 자신과 같은 바이올린 부의 아이다.
소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지 그 아이는 찌푸린 얼굴로-그러나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제법 상냥하게 소녀에게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부장의 전달사항이야. 아침에 회의 좀 빼먹지 말아 줄래? 너 때문에 매일 내가 이런 걸 일일이 너에게 전해야 하잖아. 그리고 이건 부원 모두 참가하는 거라 자동으로 신청이 다 되어 있는 거니까 절대 빠지지 마.”
“…고마워.”
작은 목소리라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녀는 그녀에게 감사해했다.
아침 회의…….
회의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싫어하였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목소리, 시선, 비웃음, 눈동자.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재고 있다는 또 그것이 스스로의 착각일지도 모르는데 과잉반응 해버리는 자신의 한심함까지 포함하여 그 모든 것들을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를 닮아 똑똑한 아이가 될 거에요!]
[눈에 총기가 있는데? 공부는 역시 잘 하겠지?]
“…….”
그래서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였다. 되도록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지시사항을 전달한 아이는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소녀는 자신의 손안에서 구겨진, 전달받은 종이로 눈을 돌렸다.
『전국 청소년 바이올린 연주회』
소녀도 이름을 알 만큼 제법 큰 대회다.
대회는 한 달 후.
바이올린 부실에 있으면 이런 대회 참가 전단지가 많이 오지만 정작 소녀는 단 한 번도 이런 곳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나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그리고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고 웃고(어쩌면 혀를 차거나) 떠들어댈 것이다.
소녀는 구겨진 종이를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나가지 않아.’
소녀는 바이올린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Caprice in A minor, Op. 1, No. 24.
소녀는 다시 자신만의 작은 세계로 돌아갔다.
#05
소녀는 한 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우물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제일 먼저 눈구름이 갠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 오후의 날씨는 청명하였다. 손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소녀는 옥상의 한 가운데의 환풍구 위로 올라갔다.
Caprice in A minor, Op. 1, No. 24.
수업시간 내내 자신의 세계에서 연주했던 곡을 진짜로 연주해 본다.
처음에는 바이올린 부실에서 연습을 했지만 가끔 부원들이 와서 그곳에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기에 연습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되지 못했다.(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싶어 바이올린 부에 들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한 것이 이 학교 옥상. 소녀가 학교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장소였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손을 얼어붙게 했지만 소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연주해 나갔다. 사실 손이 추운 줄도 모르고 연주했다. 어깨에서 바이올린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손이 얼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잘하네.”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소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자신의 뒤에는 아까 아침에 봤던 그 소년이 조용히 서 있었다.
“아침보다 훨씬 좋아.”
“…….”
소년은 소녀가 올라가 있는 넓은 환풍구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소녀는 언제부터 훔쳐본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애초에 소녀는 남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소녀의 생각을 알고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찌푸린 그녀의 얼굴에서 하고 싶은 말을 찾아낸 건지, 소년은 소녀의 묵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난 네가 오기 전부터 여기 있었어. 낮잠 자고 있었는데 방해한 건 너라고.”
“…….”
“나는 요 몇 달간 대회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어서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여긴 원래 내 비밀장소야.”
소녀는 고개를 돌려 철망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저 멀리 학교 주변의 정경까지 환히 보였다. 소녀는 이렇게 좋은 장소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생각을 이번에도 눈치 챘는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안을 걸어왔다.
“네가 여기를 너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장소로 두고 조용히 바이올린만 킨다면 있어도 좋아.”
그것은 소녀도 바라는 바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자 소녀는 다시 소년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려놓는다.
쇼팽의 야상곡(nocturn) No.9.
소녀는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왔다.
바이올린과 자신만이 존재하는.
#06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소녀는 소년과 옥상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새벽에 일찍 부실에 가도 그 때처럼 소년의 바이올린 연주곡은 들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내심 그것이 아쉬웠다.
“…너 말이야.”
소년과 마주친 지 일주일 째.
소녀는 처음으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어?”
“바이올린…어디서 연주해?”
듣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곡을 자신의 귀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런 소녀의 생각은 이번에는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소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집에서.”
“…전처럼 부실에선 연주 안 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소년은 잠시 키득거리며 웃더니 소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걸 듣고 싶어?”
소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너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는 생각에 곧 얼굴이 붉어져버렸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빤히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좋아, 네 바이올린 좀 빌려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부모님도 못 만지게 하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소녀는 순순히 소년에게 넘겨주었다. 그라면 괜찮을 것이다. 내 바이올린도 그가 켜주면 좋아할 것이라고, 소녀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였다.
소녀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였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op.47.
소녀의 바이올린은 전에는 내지 않았던, 소녀가 연주했을 때는 들을 수 없었던 음을 내었다.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바이올린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 소리를 이끌어낸 소년이 신기하였다. 존경스러웠다.
“어때?”
연주를 마친 소년이 과장되게 두 팔을 벌리며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굉장해!”
소녀는 순수하게 감탄하였다.
소년이 그런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 왜 그래?”
소녀의 질문에 소년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바이올린을 돌려주었다.
“뭐야, 큰소리도 잘 내잖아.”
“어…어?!”
그 날은 봄을 알리는 신호라도 보내듯이 날씨가 무척이나 포근한 날이었다.
따사하게 내리쬐는 햇살아래에서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세계에 쉽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소년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으로 감추며 소녀는 다시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소녀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너, 비브라토는 잘 돼가고 있냐?”
“…어?”
“내가 요령 가르쳐 줬잖아. 연습 잘 하고 있냐고.”
“아…응…….”
최근 소년의 말대로 연습을 꼬박꼬박 하고 있었다. 이젠 조금씩이나마 벽에서 바이올린을 떼고도 비브라토를 할 수가 있었다.
“핑거 비브라토 정도는…….”
“그래? 생각보단 빠르네. 더 연습해서 암(arm) 비브라토 까지는 연습해 놔.”
“응.”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소녀는 왠지 모르게 아쉬워서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제 갈 길을 향해 가버렸다.
“아 참 그렇지. 이거 받아!”
“아…!”
하마터면 떨어트릴 뻔했다. 소중히 받은 그것은 따뜻하게 덥혀져 있는 커피였다.
“오늘은 햇볕이 나도 옥상 날씨는 춥더라. 그걸로 손이라도 녹여.”
“…….”
고마워-라는 말은 혀끝에서 맴돌다가 사라졌다. 문이 닫히고 소년은 나가버렸다.
소녀는 커피를 볼에 대 보았다.
소년의 온기가 따뜻했다.
#07
소녀는 열쇠로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막혔다. 집 안의 공기가 바늘이라도 되듯이 온 몸이 콕콕 쑤셨다. 실수로 부실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다가 집에 늦게 들어오고 말았다. 학원도 빠졌다. 그리고 소녀가 상상하는 상황은 최악의 형태로 현실에 나타났다.
“잠깐 이리로 들어오렴.”
냉랭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눈을 꾹 한 번 감고는 마른침을 삼키고 거실로 들어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계셨다.
“여기 앉으렴.”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소녀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꽉 쥔 채 부모님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불편하다.
“학원에서 전화가 왔더구나. 오늘 학원에 안 갔다며?”
“…….”
“게다가 학교에서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다는데 왜 보여주지 않은 거니? 일주일도 더 전에 나왔다면서?”
“…….”
목이 졸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바이올린 케이스를 꽉 쥐었다.
“게다가 성적이 아주 형편없더구나. 그걸로 어떻게 의대에 합격할 생각인거니?”
엄마, 나는 의대에 가고 싶지 않아요.
목구멍 끝까지 그 말이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도대체 넌 커서 뭘 할 생각인거니? 집에서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하루 종일 바이올린만 붙잡고 있고. 역시 바이올린을 취미로 붙여주는 게 아니었는데…….”
엄마, 나는 바이올린이 하고 싶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가 허락할 리 없었다. 조용히 엄마가 소녀를 혼내는 것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원까지 빠지면서 뭘 하고 싶은 것이냐.”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정당한 이유와 실력을 보여야 한다.
“내가 돈을 얼마나 들여가며 널 가르치는지 알고나 있는 거니?”
소녀는 눈을 꽉 감았다.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아버지의 맹렬한 질타는 계속되었다.
“뭐라고 말을 해보렴. 응?”
‘뭐야, 큰소리도 잘 내잖아?’
왜 이럴 때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소녀는 눈을 떴다.
“몇 주 뒤에…구에서 전국 청소년 바이올린 대회 예선전이 열려요.”
소리는 작았지만 부모님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였다.
“저희 바이올린 부원들이 모두 참가해요.”
부모님의 표정이 놀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녀가 의견을 이렇게 피력한 적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때 제 연주를 들으러 와 주세요.”
소녀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꽉 쥐었다.
“뭘 하고 싶은지는 그 때 말씀드리겠어요.”
#08
“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줘.”
다음날 점심시간 옥상.
소년은 소녀의 발언에 놀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못들을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네…뭐라고?”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표정은 퍽 멍청해보였다.
“너의 도움이 필요해.”
소녀의 목소리는 크고 또렷하였다. 소녀는 소년에게 어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이 다 끝나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바이올린 참 좋아하는구나.”
소년의 말에 소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좋아하지 않아?”
“…어렸을 때는.”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도록 싫었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소년이 나간 뒤 소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왜 바이올린을 좋아 했더라……? 너무 까마득히 오래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긍정할 수 있는 건 자신이 바이올린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한번 연주해 본 곡의 악보는 전부 외울 정도로. 그 정도로 바이올린과 그 속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사랑하였다.
잠시 후 다시 올라온 소년의 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가 들려져 있었다.
“나도 바이올린이 필요하겠지. 좋아. 비브라토는 연습 많이 했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정말 열심히 연습했고 이제는 암 비브라토도 제법 속도가 붙었다.
“내가 네 바이올린을 들으면서 느낀 건데 너는 바이올린을 켤 때 꼭 네 세계 속에만 있는 거 같더라.”
사실이었다.
정곡을 찔리자 소녀는 깜짝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소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너무 자신만을 위한 곡이니까. 느낌이 달라.”
소년이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렸다.
“나도 내 세계가 있지만.”
소년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소녀를 향했다. 소년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할게.”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
그렇게 멋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음색이었다.
대회까지는 앞으로 15일 남았다.
#09
소년의 레슨을 받으면서 소녀는 독학으로 연주했을 때보다 실력이 확실하게 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도 훌륭하지만 가르치는 자질도 뛰어나서 소녀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 네 이해가 빠르긴 해.”
연습 10일 째 소년이 소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비브라토의 솜씨가 많이 늘었어. 연주도 많이 부드러워졌고. 그래도 많이 부족해. 좀 더 자유자재로 비브라토를 할 수 있도록 연습해놔.”
“응.”
소녀는 소년과 하는 레슨이 좋았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이 자신의 심장을 건드려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다.
수업이 파하고 소년에게 방과 후 레슨을 받기 위해 책을 가방에 집어넣던 소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 즐거운 적이 도대체 얼마만이더라? 살아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 것 같았다.
“……려?”
“…어?”
“내 말이 안 들리냐고!! 왜 혼자서 웃고 있는 거야!”
“아…….”
또 못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바이올린 부의 부장이 자신의 옆에 있었다.
이름이 하린이었나? 자신과 같은 학년의 음대 지망 학생이라고 알고 있다.
“여전히 기분 나쁘네. 너 지역 예선대회에 나올 거야 안 나올 거야? 그거 물어보러 왔어. 도대체가 아침 회의에 나와야지. 요즘 부실에도 잘 오지 않는 거 같은데 바이올린 부는 뭐하러 들었니?”
빠르게 쏘아지는 말에 소녀는 잠시 말을 삼켰다. 하린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이미 소녀가 대회에 나가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회에 안 나갈 거면 지금이라도 취소해야 하니까. 너 참가비용도 안 냈지?”
“…얼만데?”
“칠…잠깐, 너 나갈 거야?”
소녀는 지갑을 열어 그녀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응. 그렇게 됐어.”
소녀는 멍하니 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소년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소녀는 씨익 웃으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10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고 마침내 대회당일 날이 되었다.
소녀는 부모님보다 먼저 도착해 대기실에서 자신이 오늘 연주할 곡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대기실에는 소녀와 같은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잔뜩 하였다.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한 번도 이런 대회에 나와 본 적이 없는 소녀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진정하자…연습 많이 했잖아? 괜찮아…….’
가만히 자신만의 세계에서 연습을 하고 있다가도 이따금 튕겨져 나왔다. 긴장 때문에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봤을 때 들어오던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일까? 부모님도 보시고 있는데, 기회인데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별의 별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녀는 더 이상 대기실에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곳을 뛰쳐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침에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슥거렸다. 불편했다.
“…말이야 나왔다면서?”
아는 목소리가 칸 밖에서 들렸다. 학교의 바이올린 부원 중 한명이었다.
가만히 내용을 들어보니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왜 여길 나왔나 몰라.”
“그러니까. 깜짝 놀랐다니깐. 걘 어차피 이런데 나와 본 경험도 없지? 아마?”
“그럴걸? 바이올린 실력도 형편없고…뭐, 그러니 안 나오는 거 아니겠어?”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이런 대회에 나오기엔 내 실력이 부족한 걸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린이가 1등으로 통과할거야.”
“맞아. 하린이는 대회에 나가서 상도 많이 타왔잖아. 그 애랑은 비교도 안 돼.”
그 뒤로도 그들은 한참을 더 수다를 떤 뒤에 밖으로 나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안내방송소리가 들려왔다. 대회가 시작되었지만 소녀는 대기실로 가고 싶지 않았다.
떨리는 다리로 조금씩 밖을 향해 걷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소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도망치는 거야?”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내…연주를 들으러 와 준거야?”
“어…?! 왜 울어?”
모른다.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소녀는 그저 소년을 본 순간 한 없이 눈물이 나왔다. 아무 이야기가 막 튀어나왔다. 생각도 정리하지 않은 채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소년을 붙잡고 다 쏟아내었다.
“이 대회에 네 실력이 어울리지 않는다니 그럴 리가 없어.”
소년이 소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소녀가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무려 나한테 레슨을 받았는 걸? 좀 더 자신감을 가져.”
소년이 소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나는 네 연주를 들으러 왔어.”
소년의 목소리가 소녀의 세계에 닿았다.
“네 세계에 나를 초대해줘.”
#11
소녀의 앞 번호는 하린의 차례였다.
그녀가 연주한 곡은 비발디의 사계 중 봄 1악장. 그러나 소녀는 너무나 긴장해서 그녀의 연주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소녀의 차례였다. 계단에서 하린과 마주쳤다. 그녀는 소녀를 비웃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 소녀는 더욱 심장이 죄어듦을 느꼈다.
잘 할 수 있을까?
무대는 크고 자신은 너무 작았다.
정 중앙에 서자 수많은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이 보였다. 저 많은 사람들 중 소녀의 부모님도 계실 것이다. 소녀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 소녀는 긴장돼서 손을 덜덜 떨었다. 마치 그들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거 같아 부끄럽기 까지 하였다.
잠시의 침묵.
그 수많은 인파들 가운데서 소녀는 소년을 찾았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소녀는 소년만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소녀는 소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맨 뒤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이 소년과 마주쳤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소녀는 소년이 웃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네 세계에 나를 초대해줘.’
‘응…이번엔 네가 너를…나의 세계로…….’
파헬벨 캐논 d장조.
처음으로 소녀의 세계에 관객들이 초대되었다.
#12
하늘은 높고 떠다니는 구름은 평온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 새 봄의 기운이 완연하였고 자신이 왔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지 봄은 그 향기를 이곳저곳에 뿌리며 다니고 있었다.
소년이 다니는 학교도 그 사실은 피할 수가 없었는지 교정에는 심어놓은 벚나무들이 화려하게 새하얀 꽃잎을 펼쳐내었다. 그래도 가끔은 불어오는 바람과 인사라도 하는 듯이 손짓하며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내려오는 햇살이 따사한 것이 정말로 봄이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소녀는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누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부드러이 내려앉고 있는 꽃잎들 사이로 소년이 걸어왔다.
그 날로부터 어느 새 1년이 지났다.
소녀는 구 예선전을 1등으로 통과하고 본 대회에서는 간소한 차이로 2등을 차지했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인 덕분인지 소녀는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부모님으로부터 정식으로 허락받았고 1년 뒤인 오늘, 대학 입학이 결정되었다.
소녀는 다른 누구보다 소년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합격 통지서를 우편물에서 발견한 것을 가장 먼저 소년에게 직접 말해주고 싶었다. 선생님보다, 부모님보다, 그 누구보다 먼저에게.
오랜만에 보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콩닥콩닥 뛰는 가슴만 누르고 있는데 소년이 그런 소녀를 가만히 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야,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
소녀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소년은 1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소녀를 보며 소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모님이랑 점심 먹다가 네 전화에 나왔단 말이야. 꼭 해야 될 말이 있다며. 빨리 말해.”
소녀는 그런 소년이 고마웠다.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소년이 소녀를 보았다.
“나 대학에 합격했어.”
“…….”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흩어져있는 꽃잎들을 휘날렸다.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마워.”
“…뭐가.”
“네 덕분이야. 이렇게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있었던 거.”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
“정말 고맙다면서 말 한마디로 끝낼 생각이야?”
예상치 못한 소년의 말에 소녀는 그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뭘 해줘야 하는 거지?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한 소녀의 얼굴에 소년은 잠시 한심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는 소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나무에 매달린 벚꽃들과 인사하며 바닥에 있는 꽃잎들을 잠시 휘감다가 소년의 속눈썹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에 놀라있는 소녀의 붉어진 볼을 장난스레 건드리고는 다시 날아가 버렸다.
소년의 까만 눈이 소녀의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밤하늘과도 같은 그 눈에 소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소녀가 재미있는지 소년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
소년은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대로 돌아가 가버렸다.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로 소녀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소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져보았다.
데인 듯이 뜨거웠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소녀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이 마지막에 해 준 말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저 나무들만이 그 비밀을 안다는 듯이 조용히 웃으며 바람결에 맞추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
소녀가 수시로 합격한 그 유명한 음악대학에 소년은 장학특차로 입학했다는 것을 소녀가 안 것은 지금으로부터 훨씬 더 후의, 아껴두어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외전 - 소녀가 모르는 소년의 이야기
소년의 집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를 많이 배출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이 싫었다.
아이들과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지루한 악보를 읽는 법을 배워야 했으며 손이 아프도록 매일매일 바이올린 연습을 해야만 했었다.
이것은 소년이 8살일 때의 이야기.
학교가 끝나면 바이올린 학원에 가서 바이올린을 켜고 집에 와서는 또 과외 선생님께 바이올린을 배운다. 그런 쳇바퀴 같은 생활에 서서히 질려가 바이올린을 때려치워 버릴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 때 학원에 새로운 아이가 들어왔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운다는 작은 소녀였다.
자기 이름도 제대로 말하지 못할 정도로 내성적인 데다가 바이올린은 ‘정말로’ 처음이었는지 학원 선생님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아이였다.
“어떻게 몇 번을 가르쳐 줘도 잘 못하는 거니?”
어린아이에게 너무 심한처사가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모인 아이들은 모두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아이들이 모인 이 일대 최고의 바이올린 학원이었다. 학원에서도 아이들이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기에 학원이 끝나고 나서도 다들 1대 1로 비싼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저 작은 소녀는 여기 학원에 다니는 게 전부인 모양인데 당연히 학원에 과외까지 받는 다른 아이들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여기 선생님들에게는 그것이 답답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얼마 안 있어 포기할 줄 알았는데 소녀는 선생님께 혼날 때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절대 포기하지는 않았다. 소년은 그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자신이 보기에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속도도 자신보다 빠른 것 같았다.
제대로 된 한 곡을 연주하는데 자신은 무려 1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소녀는 그것을 석 달 만에 해내었다.
소년은 문득 어느 순간 소녀가 자신을 추월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자신은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해 가며 바이올린을 잡았는데 처음 배우는 소녀가 자신을 곧 따라잡을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소년은 바이올린을 배우는 것에 불을 붙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연습했고 스스로 물어가며 배웠다.
과외 선생님도 부모님도 놀라워하며 소년을 칭찬하였지만 소년은 아버지처럼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작은 소녀는 벌써 자신이 반 년 전에 겨우 끝낸 모차르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년의 불안은 몇 달 뒤, 현실로 나타났다.
그 작은 소녀는 어느 새 학원의 몇몇 아이들의 실력을 훨씬 웃돌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자신도 연습을 전처럼 게을리 했다면 저 아이들처럼 됐을 거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승부욕에 그 날도 소년은 소녀와 함께 남아 학원에서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었다.
바치니 요정의 론도.
일주일 전부터 과외선생에게 받고 있는 곡이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잘 풀려서 기분 좋게 연주를 끝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작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참 대단해.”
“어?”
처음으로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질투가 아닌 정말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듯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바이올린을 그렇게 잘 켤 수가 있지?”
…과외선생에게 돈을 많이 들여서, 라고 대답하는 것은 소녀의 환상에 금을 내는 것만 같아서 소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소년은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볼 땐 너도 바이올린을 충분히 잘 하고 있어.”
“…정말? 선생님들은 날 혼내기만 하는 걸?”
소년은 네가 바이올린을 켤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거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왠지 그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럼 왜 하는 거야?”
“어……?”
“그렇게 혼나면서 왜 바이올린을 하냐고.”
소녀는 아닐지 몰라도 소년은 소녀를 질투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더 빨리 배우고 있고 자신보다 언젠가 더 잘 연주할 것만 같았다. 소년은 소녀의 재능이 부러웠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재능이 아니야 그저…난 바이올린이 무척이나 좋은걸?”
“…바이올린을 좋아한다고?”
“응. 세상에서 제일 좋아.”
소녀의 목소리는 작지만 맑고 또렷했다.
소년은 여태까지 바이올린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살짝 웃고 있었다.
소년이 소녀와 대화를 나눈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소녀의 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소년이 하루 종일 바이올린만 연습하고 나갈 수 있는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가보게 된 것은.
혹시나 라도 그 때의 소녀를 다시 만날 까 기대하며, 외국으로 나갔나 싶어 해외의 대회까지 출전해보았지만 10년도 더 지난 지금, 소년은 소녀를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김 기사. 나 여기서 내려줘.”
“네? 그치만 도련님, 눈도 오는데…….”
“됐어. 그냥 좀 걸어갈래.”
소년은 기분이 심란하였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을 까맣게 잊고 있을 것이다. 자신만 너무 목메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 한숨이 새어나온 바로 그 순간 눈으로 새하얀 세상이 순간 반짝였다.
“……?!”
소년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느낌이었다.
쇼팽의 야상곡(nocturn) No 9.
잔뜩 틀리면서도 즐겁다는 듯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이 그 곳에 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던 반짝거림이 그 곳에 있었다.
“찾았다.”
소녀는 여전히 바이올린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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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
출처 | 5년도 더 전에 썼던 자작 단편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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