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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부정할수는 없다...
이건 나의 인턴시절 이야기...
담배케이스만큼 큰 호출기에 내 생명을 걸 때 겪은
믿을 수 없는
하지만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다.
겨울은 인턴에게 지옥의 계절...
무뎌지는 정신력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한파는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든다.
20세기의 마지막 날이었다...
ER 대기중 수간호사의 호출받아서 내려간 곳에서.
쾡한 눈의 어머니와 병에 걸렸다는 꼬마를 만났다...
"우리 영훈이가 귀머거리가 됐어요"
증상은 아이의 청각장애...
얼마전부터 아들의 귀가 안들린다며
자신의 아이를 벌레보듯 쏘아보는 아이엄마의 말에.
측은함과 의아함을 느끼며 들을리 없는 꼬마에게 말했다...
"귀가 아프니?"
"아니요..."
"뭐?"
뭔가 이건...이상하다...
하지만 꼬마는 분명히 대답했다...
"그럼 내 말 들려?"
"들려요..."
또박또박 말하는 꼬마를 보며 어리둥절한 수간호사와 나는 아이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아이는 제 말이 들리는걸요?"
한심하다는듯 날 쳐다보던 아이엄마가 대답했다...
"다른 말은 들을수있어요..단지 할머니말이 들리지 않을뿐이에요.귀머거리가 된것같아요."
'뭐?.정신과 문제인가?'
할머니와 관계의 심적부담이 아이에게 어떤 장애를 일으킬수도있다 판단한 나는 그쪽에 대해 물었다.
"아...평소에 할머니와 아들분의 사이가 어떻죠?혹시 할머니께 꼬마가 최근에 혼나거나 그런적있나요?"
"아니요..그럴리 없죠...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착하신데요...그러니까 할머니말을 듣게 해달라구요!!!"
"할머니랑 같이 사시나요?"
"네...원래 떨어져 살았는데 죽고나서는 우리랑 같이 살아요"
이건...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게 아니었다...
'수간호사님...아이엄마랑 아이랑 잠시 떼놔야겠네요.남자 간호사들 좀 불러주세요'
내 호출에 들어온 남자간호사들에게 엄마를 잠시 격리병동으로 데리고 가라고 부탁하고 난 바로 정신과 전문의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으아아!!엄마!!!미안해...내가 잘못했어요!!앞으로 말 잘들을께요!!엄마!!
엉엉..."
내 가운 끝자락을 흔들며 우는 꼬마아이와 아들이름을 부르짖으며 남간호사에게 끌려나가는 아이엄마...
난 최선을 다했다...아이엄마의 치료가 빨리끝나서 서로 일찍 만나게 해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난 울고있는 아이를 외면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엄마의 격리치료가 시작되고 생긴...
꼬마의 실어증...
연고자가 없는 아이를 위해 병원에서 단독병실 한칸을 아이의 숙식과 요양을 위해 비워줬지만 한번 닫힌 꼬마의 입은 열릴줄 몰랐다...
'나때문에...'
죄책감과 측은함으로 아이에게 매일 틈날때마다 꼬마에게 찾아가봤지만...
말과 함께 감정을 잊어버린듯한 무표정한 꼬마의 눈에 나조차 멍청해질 뿐이었다...
보름쯤 지났으려나...수간호사가 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유 선생님...302호 아이요..."
"아~예..."
"어제 회진때 지나가다 봤는데요..."
"예..."
"말을 하던데요..."
"네?"
"아니...제가 들어가니까 말을 안하던데...분명히 제가 병실 밖에서 유리창으로 보니 말을 하고 있었어요..."
"아! 정말입니까? 말을 시작한건가요?"
"아니요...사실 그동안 저나 다른 간호사들도 몇번 봤는데 혼잣말을 심하게 하면서 사람이 들어가면 딱 입을 다물어요. 새벽에도 그런 증상을 보여서 어린 간호사들이 꼬마가 무섭다고 그러네요"
"예?..아...그런가요?제가 다시 가보죠..."
강한 자극으로 생긴 정신질환의 종류인가...아니면 단지 일시적으로 자폐아적 성향을 보이는건지...수많은 고민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설때였다...
"까르륵...진짜요?"
꼬마의 목소리였다...
"응...얘기안할께.."
누군가 있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문을 여니 침대에 가지런히 앉은 꼬마말고는 텅빈 병실...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누구와 얘기한거지?
"영훈아 너 누구랑 얘기한거니?"
"......"
"선생님이 들어오다 들었는데...영훈이 말소리...선생님한테는 얘기안해줄꺼니?"
"......"
"음...그래?..영훈이가 다시 말을 잘하게 되야 엄마랑 빨리 볼수있을텐데...엄마도 이제 많이 좋아지셨단다..."
"......"
여전히 묵묵부답인 아이를 두고 혼자서 무슨말이라도 해야했다...
뭔가 다른 병실의 퀴퀴한 냄세를 맡으며...
더럭 겁이 났다...
"2월 13일이 생일이지? 영훈이는 무슨 선물 받고싶니?"
"......"
"영훈이 착하니까 보답으로 선생님이 뭐든지 줄께~뭐 갖고싶어?"
꼬마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 두 눈을 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
"진짜 준다니까?"
"정말요?"
꼬마의 첫 대답...
"엄마 돌려주세요...엄마는 아파서 거짓말한거 아니에요..."
"뭐?"
"돌려주세요........"
이말이 마지막이었다...
다시금 말문을 닫은 꼬마...
여전히 간호사들의 두려움과 나의 죄책감은 사그러들지않고...
그렇게...
꼬마의 생일은 다가왔다...
2월 13일 저녁...
마침 비번으로 부족한 잠을 청하던 날 깨우는...
호출번호 "8858282"(ER로빨리빨리)
상황판을 볼새도 없이...
1층으로 달려가보니 새파랗게 질린 간호사들 곁으로 경악할 모습이 담겨왔다...
양쪽 귀에...
모나미 하얀 볼펜이 꽂혀 누워있는..
꼬마였다...
"왜이래요!!누가 이런거에요!!"
"저도 잘...방에 들어가니까 흑흑"
수많은 환자를 봐온 간호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일것이었다...
내 머리 속은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때...
실눈을 뜬 꼬마가 나에게 손짓했다...
"아저씨..."
너무 작은 소리라 들리지 않을 정도다...
꼬마의 입에 귀를 바싹 대고 물었다...
"영훈아!!!누가 이런거니?"
"......내가..."
"내 생일..."
"이제 엄마 돌려줘요..."
눈물이 났다...
이 아이는 엄마가 미치지않았다는걸 보여주려고...
진짜 귀머거리가 된거란 말인가?
모르겠다...정말...
죄책감에 눈물만 흘리는 내게 꼬마는 속삭였다...
"선생님...
이제 나 귀머거리에요...
근데 다른사람소리는 안들리는데
할머니말은 들려요...
어제부터는 엄마 목소리도...
들려요..."
*내가 못봤던 상황판의 포스트잇...
2월 12일 21:37
302호 영훈 어린이 어머니 격리병동에서 자살
시체보관실 9305번에서 확인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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