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죽창앞에서는 한방이지!
하지만 전화번호부책을 배에 두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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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3개! 남은 면접생은 4명!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간 면접실에는 대X그룹 출신의 임원진 3명이 앉아있다.
세월의 폭풍을 무수히 헤치며 나아간 그들의 얼굴을 보라! 그들의 얼굴에 흐르는 땀은 더위를 식히기 위한 액체가 아니라 그에게 실낱같은 피해도 주지 못한 또 다른 시련이리라. 회사생활이라는 정글속 가장 밑바닥부터 지금까지 살아올라온 베테랑 중에 베테랑! 그런 그들이 햇병아리를 바라보는 구렁이의 눈으로 남은 면접생들의 이력서를 스캔하고 있었다.
"에이스 포 카드군......"
가장 왼쪽에 앉아있던 임원진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전체적인 풍채는 작다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나 그의 각진 턱, 부릅 뜬 눈은 마치 이스터섬의 모아이를 보는 듯 했다. 정말이지 그의 각진턱은 놀라울정도로 잘 다듬어진 바위와도 같았다. 설령 회사에서 그의 책상이 치워지더라도 그는 책상보다도 더 모서리진 턱으로 책상을 대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X그룹 임원 K. 그는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버텨왔다. 젊은 나의 패기가 쾌도난마라면 그의 패기는 나와는 성질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여기 있는 사람들 하나 하나가 모두 다 에이스인데, 그 중 에서 우열을 가려봤자 무얼하겠는가."
그는 내 옆옆자리에 있는 면접생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자네는 남은 면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는가?"
짧게 다듬어진 머리에 눈썹보다도 더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면접생이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아직 정확한 사항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거기까지"
마치 마법과도 같은 합이었다. K가 손을 휘저으면, 면접생은 입을 다문다. K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룰은 간단하다. 자네들은 여기 있는 면접관의 시험을 통과해야한다. 한 면접관 당 가장 먼저 시험을 통과하는 한 사람만이! 대X그룹 정규직 사원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것이다."
K의 무게실린 목소리에 나는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조용히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들어보니 기에 짓눌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첫번째 시험은...마법천자문이다."
응?
천자문? 그런게 있었던가? 하는 순간
"질문에 답하라! 물을 문(問)!"
이라 외치며 아까 그 뿔테안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 아니 임원K는 냉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통과"
"喜喜喜喜喜喜喜喜喜!"
뿔테안경은 무서운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갔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라 벙찐 표정을 지은 채, 남은 면접생들은 뿔테안경이 떠나간 곳을 지켜보았다. 순간 임원K는 멀어져가는 그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남은 면접관 두명 역시 뿔테안경이 박차고 떠난 자리를 지켜보며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방심하지 않는군. 내 시험은 이것으로 끝이다."
거대한 바위골렘이 임무를 마치고 다시 잠이 들듯, 온 사방을 압도하며 흩뿌린 그의 패기는 오후의 낮잠에서 자다 깬 사람처럼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태산과도 같던 K의 기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K가 있던 자리에는 그냥 멀굴이 네모진 폄범한 사람이 맍마밌멌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야차 한 마리.
중앙에 앉아있던 임원 L은 오랫동안 노려왔던 먹잇감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포식자가 지을법한 그런 비열한 웃음을 면접생들에게 흩뿌렸다.
임원K와의 승부가 난공불락의 산성을 뚫는 것 같은 무거운 기와 젊음의 패기의 충돌이었다면, 임원J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앞에 놓인 내 마음은 마치 굶주린 사자에게서 벗어나야할 임팔라 같은 인상을 주었다. 대단한 요력이고, 엄청난 살기다! 방심한다면 누구라도 그의 먹잇감이 되리라!
옆에 앉아있던 면접생 하나가 뿌득 소리를 내며 무릎위에 놓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들역시도 최후의 4인까지 남은 몸, 이까짓 프레셔에는 나자빠지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굶주렸지만 눈빛에서 대단한 관록이 느껴지는 사자는 노란빛 안광을 흩뿌리며 면접생들에게 다가왔다.
핫 하며 숨을 들이쉴 새도 없이, 임원 L은 어느새 면접생들 앞에 서서 지독한 오만으로 면접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같은 사람에게 내 딸을 줄 수는 없어!"
그가 사자같이 울부짖었다. 무슨 소리지? 이것도 또 다른 시험의 하나인가? 과연 대기업의 최종면접이란 이만큼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구나!
생각해야한다. 생각해야한다. 생각하자! 집중! 무슨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 냉철하게 파악해야한다! 단 하나의 실낱같은 빛줄기라도 악착같이 붙잡아야한다. 27년간의 노력의 세월아 내게 실마리를 다오!
그 순간 여자 면접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리 중 유일한 여자 면접생.
이전 면접에서 여자의 몸으로 회사생활 버틸 수 있겠어? 라는 조소를 들었을지도 모를 그런 짜증스런 반응이 그녀의 얼굴에 옅게 배여있었다.
짜악
한 번의 타격, 순간의 정적.
놀랍게도 그 여자 면접생은 손을 들어 임원L의 따귀를 후려쳤다. 일순간 나와 내 옆에 앉아있던 면접생은 여기가 면접장이라는 것도 잊은 채 경악스런 표정을 지어버렸다. 따귀를 후려친 여자 면접생의 반응도 가관이었지만, 그 여자면접생에게 얻어맞고 주저않은 임원 L의 모습도 놀랄 노 자 였다.
이미 그의 안경은 뺨을 맞은 순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그의 뺨은 여자의 온기가 담긴 듯,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은 갑작스런 헤프닝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뒤이어 다가올 무엇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 면접생이 소리쳤다.
"미X놈아! 여기는 면접장이야!"
기적을 본 것인가, 야차와도 같던 임원L의 표정이 인자한 동네 아저씨마냥 급속도로 누그러들었다. 그 순간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예상못한 나와 옆자리 면접생은 그냥 멍하니 두 사람의 상황을 지켜보기에 급급했다. 우리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임원L은 땅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들은 다음 고쳐쓰며 여자 면접생에게 말하였다.
"훌륭한 츳코미다......통과."
데헷 데헷 거리며 여자면접생은 면접장을 뛰쳐나갔다. 그때까지도 어안이 벙벙해져있던 우리를 말 없이 지켜보던 마지막 임원 J가 우리에게 말하였다.
"자네들은..."
핫 하며 나와 옆자리 면접생은 동시에 임원J를 바라보았다. 이때까지와 다르게 임원 J의 인상은 처음부터 푸근해보였다.
"이 시험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옆자리 면접생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수....수....순발력입니다! 회....회사의 업무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정성의 연속!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순발력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겼다
라는 눈으로 옆자리 면접생은 득의양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떨어진 것일까. 어떤 회한의 감정만이 내 곁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27년간 쉬지 않고 공부하며 스펙을 쌓아오면서 이런 것 하나 가르쳐주지 않던 학교나 학원들이 원망스럽기보다
학교나 학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저 멀리 아득한 경지 어딘가가 현실이요 삶이라는 것을 느낀것만 같았다.
늘 1등만을 해오며 주변 사람들을 쓸어담아버리던 나의 모습조차도 결국 큰 무대에서는 부처님앞에 손오공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닐세"
쿵 하는 무언가가 나와, 옆자리 면접생의 가슴속에서 울려퍼졌다. 나에게는 역전의 북소리, 옆자리 면접생에게는 나락으로 향하는 구멍이 뚫리는 소리.
임원J가 이어서 말하였다.
"병신같은 상황에서조차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게. 그 상황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거야. 모두가 함께 즐기면 그것뿐이지 않은가."
밈뭔K와 임원L이 그의 말에 이어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과연, 무모함에 가까운 두 면접생들의 행동의 끝은 어떤 기쁨 그 무엇이 아니었는가. 또 다시 부처님에게 농락당한 손오공의 꼴이 된 것만 같아
나의 모습이 또다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옆자리 면접생은 멎적은듯 자리에 앉아 뒤통수만 긁적긁적 긁고있었다.
"자네 두 사람 모두 합격일세. 이미 마지막 4인으로 남은 시점부터 이력서상으로는 아무런 우열을 가릴수가 없더군"
그러면서 임원J는 우리 둘에게 종이 하나씩을 쥐어주었다.
"펼쳐서 읽어보게. 그것으로 면접을 끝낼테니"
나와 내 옆에 앉아있던 면접생은 기쁜목소리로 종이에 적힌 말을 큰 소리로 읽었다.
“우리는 세월호를 아직 잊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