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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보고 말로만 싸운다고하는데 말이라도 미국한테 대드는국가는 세계에서 북한뿐입니다.
의문이 생깁니다.무슨 배짱으로 저럴까? 그것부터가 저는 시작이었어요.하루에 한편씩 총5부까지는 올릴게요.총7부까지니 볼만하면 6,7부는 알아서 찾아보세요 찾을려면 찾아질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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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전쟁전략 제1부]
Journal by Whang Kil Gyoung
2010년 3월26일 새벽 1시26분
여러분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북핵대결. 이제 제가 생각하는 북핵대결의 줄기(프레임)을 여러분께 선보일 때가 되었습니다. 40년간 진행된 거대한 공정(프로세스)은 결말이 임박하였는데 판이 큽니다. 재미있게 보아 주십시오. ^^*
저는 덧글에서 북핵대결의 당사자는 북한과 유대자본임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미국만을 상대로 대결하였다면 오늘의 승리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돈키호테가 풍차와 싸우는 모양과 같아 실체 없는 상대를 향해 싸우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제국주의(=유대자본)라는 숨어 있는 실체를 정확히 조준하며 대결을 벌여온 것입니다. 그 승패의 현장, 치열한 대결의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핵확산방지조약(NPT)에 따라 핵보유국으로 공인된 나라는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로서 5개국입니다. 이들 5개국을'핵국' 이라 칭합니다. 인디아 와 파키스탄은 NPT에 공식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핵실험이 확인 됨으로써 핵 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핵실험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핵을 보유한 것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은 2007년, 2009년 각각 핵 실험에 성공 하였으므로 역시 핵 보유국 입니다. 북한을 포함해 핵 보유국은 모두 9개국으로서 '5 + 4' 의 형태입니다.
이 9개의 핵 보유국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라엘과 더불어 1970년대 핵개발 여부를 두고 관심을 끌던 국가 입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외형적으로 핵 무기를 개발하여 1993년 자진 폐기 할 때까지 폭격기에 탑재할 수 있는 핵폭탄 6개를 만들어 보관 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그 실체는 무엇일까요?
핵 무기 개발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1)우라늄 농축, 2)원자로 에서의 연소, 3)플로토늄 정제, 4)고폭화약 기술,5)기폭장치의 기술, 6)금속기술 등의 기반이 있어야 가능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핵 실험을 해야 합니다. 파키스탄과 같이 고농축인 경우 2)와 3)은 제외됩니다. 핵 무기는 의지가 있다고 해서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초과학이 최상급에 이르러 있어야 하고, 기초과학을 실현하는 응용과학이 역시 최상급에 이르러 있어야 하며, NPT 체제 하에서 강대국에게 발각되더라도 자기를 지킬 힘이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NPT(Non Proliferation Treaty) 체제에서 인정되지 않았음에도 핵 무기를 보유하거나 보유하려 했던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디아, 파키스탄의 유사점은 모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초과학 및 응용과학의 기반을 갖지 못했었다는 점입니다. ㅌ남아프리카ㅌ공화국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스라엘이나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 모두 그러한 기반이 없었습니다. 또 이들은 한결같이 주요 무기류를 수입하던 국가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인디아는 핵개발 과정 없이 핵무기를 획득한 국가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 국가에게 핵무기를 넘겨주었을까요? 파키스탄은 북한의 개입과 어우러져 외형적으로 핵무기 개발 과정이 존재했던 것처럼 보여집니다. 파키스탄에는 도대체 누가 핵무기를 넘겨주었을까요? 그런데 독특한 것 중에 독특한 핵개발 정황을 나타내는 나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 떠나보겠습니다.
2006년 12월1일, <노동신문>은 '죽음과 망국, 예속의 길', '한걸음 양보는 백 걸음 양보' 라는 2편의 기사를 내었는데, 그 중 '죽음과 망국, 예속의 길'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기 반제자주를 지향하던 어떤 아프리카 나라는 힘들게 마련한 자체의 무장을 제손으로 해체하거나 그것을 미국에 바치는 자살적인 행동까지 하였다. 미국이 약속하는 ‘원조’를 바라고 그렇게 하였지만 그것은 빈말뿐이었다. 이 나라 국가수반은 미국 등 서방국가들로부터 대량살륙무기를 포기한 대가로 보상을 받기로 하였지만, 그들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주먹으로 눈물을 씻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2006.12.03 16:39
이 기사에서 관심을 끌게 하는 문장은 "어떤 아프리카 나라는 힘들게 마련한 자체의 무장을 제손으로 해체하거나 그것을 미국에 바치는 자살적인 행동까지 하였다"라는 구절입니다. '어떤 아프리카 나라'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의미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였다가 포기한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지배하는 국가입니다. 이들 소수의 백인은 상당수가 유대인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유대자본의 네트워크에 줄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106,000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 종족의 구성을 살펴보면 아프리카 흑인이 79%, 백인 9.6%, 유색인 8.9%, 인디아인/아시아인 2.5% 입니다. 종교의 비율을 살펴보면 쟈이온/시온기독교 11.1%, 오순절 및 은사주의 8.2%, 가톨릭교 7.1%, 감리교 6.8%, 네덜란드 개혁교회 6.7%, 성공회 3.8%, 그외 그리스도교 36% 입니다.
당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문 흑인 토착민을 상대로 백인은 재래식 무기류와 몇대의 장갑차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는 안정적인 경우였습니다. 특히 주변국으로부터 위협이 없어 평온하기만 할 뿐 핵무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핵무기를 만들 과학 기반이나 시설 기반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핵무기 개발은 그 자체가 미스터리입니다.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1974년 어느 날, 북한의 한 외교관이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교관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됩니다. 북한 외교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나라는 핵무기를 사고 싶은 생각이 없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교관은 귀가 솔깃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즉각 본국에 보고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행정부 전화통에 불이 납니다. 북한 외교관의 한마디에 전화통이 불이 나는 이유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미국과 통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북한은 그것을 노린 것입니다. 북한 외교관의 이 한마디로 미국은 4년 전 북한 지역의 핵폭발의 진상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본국은 북한 외교관과 계속 접촉하고 구입을 추진하라고 지시를 받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교관은 만남을 지속 하고자 하지만 그 북한 외교관은 이미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온갖 수소문을 하게 되고 북한 대사관을 통해 언제쯤 돌아오는지를 알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북한 본국은 미국이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북한 외교관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교관은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교관은 그 핵무기가 북한이 제조한 핵무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핵무기를 사겠다"고 뜻을 전달합니다. 그러자 북한 외교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좀 비싼데.." 그리고 북한 외교관은 또 본국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미국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속이 탑니다.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외교관은 "비싸도 사겠다"고 구입 의사를 강하게 내 보입니다. 그러자 북한 외교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미국에 넘기면 안 되는데.." 그리고 북한 외교관은 또 본국으로 날아가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오랜 기간을 두 나라는 협상을 하게 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북한의 핵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속이 탄 나머지 내심과 달리 "미제국주의에 항거한다"느니 등의 환심을 사는 말들을 쏟아내었을 것입니다. 행여 북한이 핵무기를 팔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랬겠지요. 이러한 과거의 일을 두고 앞서 인용한 <노동신문>은 "지난 시기 반제자주를 지향하던 어떤 아프리카"라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노동신문>의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게 유대자본의 나라에서 핵무기를 판매할 나라는 없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외부로부터 어떠한 위협도 없고 핵무기를 가져야 할만한 다른 어떠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핵무기를 판매할 나라는 유일하게 북한 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이 파키스탄에게 핵무기를 이전한 경력이 있고, 이란에게 핵무기를 이전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북한이 그 당사자임을 다시 한번 단정하고 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도대체 언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을까요? 김명철 박사도 한호석 소장도 북한이 언제 핵무기를 보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을 내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시점을 찾아내는 문제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시점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중대한 변화를 보이는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일 것이니까요. 즉 반작용의 시점을 통해 작용의 시점을 찾아내는 공식입니다. 반작용의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시점입니다.
1971년, 남과 북이 한국전쟁 이후 냉전의 틀에서 어떠한 대화도 교류도 없던 시기였던 그때, 중대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7.4 남북공동성명'입니다. 1972년 7월4일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 하였습니다. 남북공동성명입니다. 성명은 통일의 원칙으로 1)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2)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3)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1971년 11월부터 72년 3월까지 진행된 회담에 대한 결과로서 그 합의 내용이 2000년 6.15공동선언과 유사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남북합의가 미국의 동의 없이 남한 당국으로 진행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합의에 이르도록 유도 하였던 것일까요? 어떤 동기가 있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1971년, 미국은 지진계를 통해 북한의 어느 지역에서 강력한 폭발이 있었음을 감지합니다. 지진계 상에 나타나는 그래프는 진앙지 및 진원지 그리고 진도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일반지진과 핵폭발은 특성이 서로 달라 지진계 그래프를 통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때 미국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핵폭발로 추정됩니다. 이일을 어찌하여야 하는가? 소련이나 중국이 핵무기를 넘겨준 것인가? 크게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시기에 세계의 이목은 온통 베트남에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으로 잠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자 베트남에서는 베트민(Viet Minh)이라고 알려진 공산주의자들은 8월 혁명을 통해 하노이를 장악하고, 9월2일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베트남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합니다.
1946년말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나면서 시작된 제1차 베트남 전쟁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9년간 지속됐습니다. 1950년대부터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프랑스는 게릴라전에 능숙한 베트민을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1차 베트남 전쟁 혹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 칭합니다.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후원을 받아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1955년 건국되었습니다. 디엠 정권은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된 베트남 남과 북의 총선 실시 조항을 거부하고 미국의 후원을 받아 남베트남 내 공산당 운동원과 그 지부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1958년 12월1일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반공법이 시행되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의 제2막은 1960년 12월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NLF)이 남베트남 내에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베트남은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하는 이른바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통해 남부로 군수 물자를 지원하고 게릴라요원을 직접 파견했습니다.
1961년, 미국이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면서 프랑스 유대자본으로부터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개입권을 인수받게 됩니다.
1964년, 미국의 8월 통킹 만 사건으로 제2차 베트남전쟁이 시작됩니다.
1970년, 전황은 캄보디아로 확대되고,
1971년, 급기야 라오스로까지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습니다.
1971년, 베트남에서 처한 미국의 이러한 역겨운 시기, 이 시기에 북한의 어느 한 지역에서 확인된 핵폭발로 추정되는 강력한 폭발은 미국에게 혼란 그 자체이고 충격 그 자체일 것입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중대한 도전에 직면 하였습니다. 미국은 2개의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한반도의 전쟁이 그것입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배비 하였다면 미국의 개입을 억제하는 효과를 발생하게 할 것이므로 국제정세는 미국에게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미국은 북한에게는 평화공세를 펴고, 북베트남과는 휴전협정을 논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1971년 비밀리에 남북 회담이 열리게 되고 1972년 7월4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입니다. 불확실한 정보 속에 미국은 북한과 정치협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부산물로서 '7.4남북공동성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6.15공동선언'과 그 내용면에서 쌍둥이처럼 보이는 당시의 '7.4남북공동성명'은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북한의 전략적 공세를 수그러 뜨리고자 반작용으로서 미국의 평화적 대응의 일환 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 이었던 그 시기 세계의 냉전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남북의 냉전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지경에서 느닷없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것은 모순입니다.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북한의 첫 핵실험은 1971년 혹은 그 이전이 되는 것입니다.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습니다. 이 휴전을 주도한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 원조, 20억 달러는 IBRD 차관)를 제공하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남베트남, 북베트남, 해방전선(베트콩 또는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습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 감시위원단인 캐나다, 이란, 헝가리, 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키기도 했습니다. 평화협정입니다. 그 해 3월에 미군과 미국의 동맹군들이 철수했습니다. 이 전쟁에 미국은 연인원 53만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그 중 5만8천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20만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택토공세'라 칭하는 북베트남군의 기습공격으로 미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기를 맞기는 했으나 미국은 미군의 반격으로 북베트남군 13만 중에 9만명 이상을 전사시키는 등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습니다. 북베트남군은 산악지역에 조금 남아 있었을 뿐이었고 "신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거지행색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철수 여론을 조성하더니 결국 미군은 철수합니다.
미국은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 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를 남베트남에 양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남베트남의 공군력이 세계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무기는 남베트남에게 양도한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에게 양도한 것입니다. 어차피 남베트남은 패망하게 되어 있었고, 그러한 무기들도 북베트남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 이후 수세에 몰린 국제정세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입니다.
미국은 왜 북베트남에게 40억 달러를 바쳐야 했을까요? 미국은 왜 북베트남에게 무기를 안겨주고 떠났을까요? 그 이유는 미군이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 입니다. 미국은 그것을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라 칭했습니다. (출구전략이란 베트남 전쟁 때 미국 국방부 부서 내에서 사용된 것이 시작이다. 그 후로도 패세 혹은 손실이 심각한 상황이 지속될 때 인명이나 물자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시키는 검토나 그 시행에 대해서 '출구 전략'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위키백과사전)
한편 미국이 북한의 핵폭발 진상을 알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그 진상을 알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자체 개발의 결과물로서 핵실험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소련이나 중국이 북한에게 핵무기를 넘겨주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핵무기 전파'라는 대응으로 나타납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유대자본으로 하여금 심각한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1973년 10월6일, 4차중동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 되었습니다. 이때 북한은 1,500 명의 군사요원(공군부대와 방공미사일부대의 요원)을 파병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조명록 대좌(당시 직책, 우리로 치면 대령급)가 대장인 북한 공군특공대는 이집트공군 항공편대를 이끌고 미그 21기의 특별한 강습(强襲)작전을 수행하여 이집트가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되찾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습니다. 결국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10월22일 미-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이 실현되
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4차중동전쟁은 종료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최초로 위기를 느끼던 때입니다.
1974년, 인디아는 '평화적핵폭발'로 명명한 지하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핵보유국이 됩니다. 물론 인디아는 핵무기를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전달 받은 것입니다. 인디아는 현재 40∼90개의 핵무기 제조가 가능한 240∼395㎏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디아는 유대자본의 영향력이 미치는 나라로서 당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기반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노동급 미사일(인디아명:가우리3)을 북한에서 수입했던 나라입니다. 인디아의 핵보유는 미국이 저지른 첫 번째 '핵무기 전파'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핵무기 보유에 대해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NCND) 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핵보유는 이미 국제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이스라엘은 1976년을 전후로 핵무기를 보유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년도와 일자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제4차중동전쟁에서 유대자본이 위기감을 느끼게 된 동기로 인하여 인도와 같은 시점에 미국이 전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옳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시점은 1974년입니다. 이스라엘의 핵보유는 미국이 저지른 두 번째 '핵무기 전파' 사건입니다.
전직 이스라엘 핵기술자 모르데차이 베누누가 1986년 양심 선언을 한바 있는데 그는 자신이 8년간 핵기술자로 근무했던 네게브 사막 소도시 디모나의 핵 시설에서 이스라엘이 핵무기 200여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의 핵분열 물질과 일부 핵무기를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을 영국의 <선데이타임스>에 폭로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바 있습니다. (한겨레 2004.04.05 20:06)
그의 폭로는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거짓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 제조기술을 보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에 둥지를 튼 3대 유대자본 연맹의 고국으로서 굳이 핵무기 제조기술과 장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핵무기가 북핵 대결에서 논의되어야 할 시점이 되었으니 그 숫자를 일부러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제9조3항에 따르면 핵보유국이란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무기와 그 밖의 핵폭발 장치를 제조하고 또 폭발시킨 나라'로 정의됩니다. 미국이 1945년, 러시아(소련)가 1949년, 영국이 1952년, 프랑스가 1960년, 중국이 1964년 각각 핵실험을 했으므로 이들 5개국이 핵국 입니다. 그 밖의 나라는 핵무기 보유 유무에 상관없이 NPT상에서는 모두 비핵국으로 분류됩니다. 인디아와 이스라엘은 비핵국입니다.
1975년 3월10일, 북베트남은 평화협정을 깨고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였습니다. 마침내 4월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평화협정 서명국들은 침묵으로 대답했습니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남베트남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북베트남이 평화협정 파기시 즉각 해군과 공군력을 동원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재개 및 지상군 지원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은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었고 미국은 그저 자국민을 소개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일 뿐이었습니다. 항공모함을 통해 탈출하던 미국인과 달리 뗏목이나 소형선박으로 탈출한 남베트남 난민들은 그 숫자가 106만명에 이르렀고, 이중 11만명이 바다 가운 데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을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칭합니다. 북베트남의 승리는 북핵이 낳은 베트남의 행운이었습니다.
북한의 첫 핵실험이 단행되었던 시점인 1971년 당시는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때이면서 자본 진영과 공산 진영의 결집이 공고하던 때입니다. 미국은 냉전의 틀에서 북한의 핵 문제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북한과 정치협상을 시작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과 인디아에게 핵무기를 넘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차치하고 인디아는 중국의 잠재적인 적국 이므로 공산진영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하여금 크게 반발 하도록 만듭니다.
1974년,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회의에서 북미 평화협정을 제안 하였습니다. 물론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북-미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북한의 제의에 대해 미국의 대답은 당시에도 6자회담이었습니다.
1975년 9월22일, 제30차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 헨리 키신저는 주한유엔군의 장래와 휴전문제 재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회담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는 1단계는 북-미-중-남이 참여하는 4자회담, 2단계는 소련-일본이 추가로 참여한 가운데 회담을 확대하여 국제 조약을 체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북-미 양자간 평화협정을 주장하면서 거부하였습니다. '7.4남북공동성명'에서 이어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양자냐, 4자냐, 6자냐의 쟁점으로 귀결 된다는 점에서 오늘날 북핵대결의 쟁점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1971년경부터 시작된 일련의 북-미 논쟁은 북한의 핵실험에서 비롯된 정치협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북한의 첫 핵실험은 1971년 경으로 봐야 합니다.
북한의 첫 핵실험을 1971년경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퓨렉스 재처리 기술(Purex reprocessing technology)의 도입 시점입니다.
북한의 핵 기술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살펴보면 1959년에 북-소 원자력협정이 체결 되었고, 1961년에 핵/화학방위국이 설치되었으며, 1962년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영변에 민수용 아이알티(IRT)-2000형 연구용 원자로 건설에 착공하였고, 1964년에 영변에 영변
원자력연구소를 설치하여 소련의 재래식 기술인 퓨렉스 재처리 기술(Purex reprocessing technology)을 들여오기도 하였습니다. 핵/화학방위국이 설치된지 약 7여년 만에 핵무기 기술을 완성하게 된 셈이어서 1971년경에 북한이 첫 핵실험을 했다는 저의 가설과 시기적으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북한의 핵무기를 개발한 대표적인 핵과학자는 화학학자 리승기 박사, 물리학자 도상록 원사, 그리고 북한 핵물리학의 원조 한인석 박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리승기 박사는 방사포(다연장 로켓포)에 사용하는 고성능 화약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방사포를 '리승기포'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세계2차대전 말기, 일본은 흥남에서 우라늄 핵개발을 진행 하고 있었고, 대전 부근에서 플로토늄 핵개발을 진행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승기 박사는 우라늄 핵개발에 참여하였습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서울대 공대학장 지내던 이승기 박사는 1950년 월북하여 1952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아 1997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 했습니다. 이승기 박사는 우라늄 원자에 대한 과학/기술 능력을 갖고 있었고, IRT-2000 이라는 원자로, 그리고 퓨렉스(Purex)라는 재처리는 절묘하게 핵 기술의 3각 받침대를 만듭니다.
특히 퓨렉스(Purex) 재처리 설비가 북한에 들어온 시점이 1964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재처리는 마지막 단계 입니다. 이는 재처리 할 연료봉이 이미 이때에 존재 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중수형 원자로가 이보다 훨씬 앞선 시점에 존재 했었다는 의미가 되고 맙니다. 그
렇다면 북한은 최소한 1964년에 핵물질 보유국이었고, 이후 6년간 핵탄두를 개발하여 대량으로 생산하고, 배치까지 마친 후, 대외 선언적 의미인 첫 핵실험을 1971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영변의 핵개발 시설을 현장 조사한 뒤에 "30년 묵은 낡은 시설"이라고 발언한 사실에 또 주목해야 합니다. 사찰단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그 시설이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그 시설을 가지고서는 가까운 장래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없다.]
이 발언이 의미하는 것은 어디서 쓰다가 꺼내온 오래된 시설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군사용 핵개발을 위한 시설은 미국의 첩보위성과 정찰기가 포착하기 힘든 지하에 건설되어 있으므로 그 중 제일 낡은 것을 민수용으로 개조 해서 지상에 건설된 영변 핵시설에 설치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1993년에서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3년입니다. 즉 1963년 전후에 이미 북한은 5MW급 원자로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1962년에 IRT-2000 원자로가 북한에 들어왔으므로 이를 응용하여 1~2년 만에 새로운 원자로를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해석이 됩니다.
무기상의 글에 의하면, 당시 북한
의 핵개발을 지원한 외부 요소로서 구소련 안드레포프 서기장과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지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드레포프는 북한에 우호적이긴 하였지만 80년 초 서기장이 된지 2년 만에 사망 하였기 때문에 80년대 초에는 이미 북한이 핵을 개발단계와 보유단계를 넘어 배치 단계에 있었으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은 1971년부터 1989년 패망 때까지 집권 하였으나 동독이 핵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하였으므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정치협상을 진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과 인디아에게 핵무기를 이전하는 미국의 양면적 모습은 당시의 정치협상이 무의미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훔쳐왔는지, 얻어왔는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이지 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정치협상에 진정성을 보여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북한도 다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접촉 입니다. 북한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핵거래를 시작한다는 것은 2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는 자체개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행위이고, 둘째는 북한도 핵무기를 다른 나라에 이전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1974년, 북한의 한 외교관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외교관 간에 핵거래는 시작됩니다. '7.4남북공동성명'을 낳았던 북-미 정치협상은 무산되고 충돌국면으로 접어든 것이지요.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다른 나라에 이전하려는 정보를 얻게 되면서 핵실험에 이어 핵이전이라는 또 다른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핵이전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은 셈입니다. 미
국은 베트남에서 벗어나 한반도에 집중하여야 할 때가 어느날 갑자기 다가 왔고 전후 사정 따질 시간도 없이 당면하게 된 것입니다.
1974년 3월,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탈출합니다. 이는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한 것으로 인식 하기에 충분합니다. 북한의 핵보유 사실 자체가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치지 시작한 최초의 사건입니다. 북한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간에 핵 거래가 진행되는 과정 자체가 북한의 핵개발 사실에 대한 심증을 강화하는데 기여하였고 급기야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의 핵개발 및 핵보유가 향후 핵이전을 포함하여 유대자본의 패권에 미칠 영향을 심각히 고려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전개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를 감수하더라도 전쟁을 급히 마무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심리적 요인입니다. 북한으로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거래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결과적으로 베트남이 행운을 얻은 셈이기도 합니다. 북한은 베트남전쟁에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직접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베트남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이듬해 바로 한반도에서 전례 없는 핵 훈련을 실시합니다. 그것은'팀스피릿훈련'입니다. 충돌 국면 입니다. 미국이 느닷없이 핵전쟁 훈련인 '팀스피릿훈련'을 한반도에서 실시하는 정황 자체가 당시 북한이 핵무기를 배비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북한이 전술무기 밖에 없었다면 미국이 굳이 핵 훈련을 실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1976년 6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북한이 간
헐적인 핵무기 거래가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핵 전술 훈련인 '팀스피릿훈련'(Team Spirit military exercise)을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은 전술 핵을 동해상에 집결시켰습니다. '팀스피릿'은 1969년부터 실시된 훈련명칭 '포커스 레티나'가 그 효시이며 1971년부터의 '프리덤볼트'를 거쳐, 미국 레이건 정권의 '동시다발보복전략'에 의한 훈련입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특별한 대치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매우 확장된 훈련을 과시하게 되는 형국입니다.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 점점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협상 국면에서 충돌 국면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어떤 반작용을 했을까요?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미류나무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도끼만행사건'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미군 측이 판문점에 자라고 있는 미류나무를 도끼로 자르려 하자 북한 측이 제지하면서 충돌이 발생한 사건입니다. 북한군 4명과 미군 20명이 싸움을 벌였습니다. 북한군 장교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미군 장교 2명이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고 8명의 미군 사병이 크게 다쳤습니다. 미국이 발칵 뒤집어지고 전세계가 관심을 갖는 대형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게 아무런 보복이나 응징을 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핵보유가 미국으로 하여금 군사력 동원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최초로 한반도 정전체제 하에서 미군의 군사작용에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북한의 거친 반작용은 그만한 여건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78년 즈음,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6기의 핵무기를 북한으로부터 구입하게 됩니다. 구입 비용은 당연히 미국에서 충당하는 것이지요. 6기의 핵무기를 싣고 날아 온 항공기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비행장에 착륙하자 기다리던 미국의 핵 전문가들은 다운그레이드(Down-Grade)된 핵무기를 샅샅이 살피고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핵폭탄이 맞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미국이 싣고 가버려 존재하지 않는 핵무기를 두고 1991년 7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1991년9월의 그에 따른 핵물질보장조치(IAEA Safeguards)에 의거하여, 마치 핵무기를 폐기하는 모양을 취하면서, 1993년에 그 폐기 상황을 만방에 선포하여 비핵무기 국가가 되었습니다. 앞서 인용한 <노동신문>은 이러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 일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항에 내려진 핵무기를 통해 미국은 3가지 사실을 확인 하였습니다. 1)1971년 북한 지역의 핵실험은 북한이 자기가 개발한 핵무기를 시험한 것이다. 2)최소한 구입한 6개의 핵폭탄보다 높은 기술을 갖고 있고 배비 하였다. 3)핵무기를 공개하지 않는 북한의 의도를 파악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 및 핵보유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시점에 어떻게 대처하였을까요?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전쟁? 불가능 합니다. 북한은 미국이 전쟁을 선택할 수 없는 지경으로 세워 놓았기 때문에 핵실험을 단행한 것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핵 거래를 실현한 것입니다. 때문에 미국이 정치협상에 관심이 없다면 그저 북한을 압박하는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978년, 남한은 미국의 용인하에 핵무기를 개발하는 모양을 취합니다.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에 주력 했다는 사실은 공인된 사실이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요한 점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의사에 반하여 마음대로 핵개발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으로서 동원된 '헐리우드 액션'이었다는 점입니다.
1978년, '팀스피릿' 훈련 참가 병
력이 10만 명 증원되었습니다. 동원 병기도 B-52 중폭격기 편대, 랜스 미사일 대대 등 핵공격 능력을 갖춘 부대가 동원되어 그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압박일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의 양상과 규모는 이후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헐리우드 액션과 강화된 핵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당시 미국이 할 수 있는 전부 였습니다. 이는 매우 감정적인 것이며 허구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외교적인 경로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전보다 훨씬 제한적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북한이 자기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라 점을 당연시 하였습니다. 즉 북한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분명해진 변화는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한편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통해 핵 기술 및 보유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었으므로 한반도 군사적 대치 측면에서 '전쟁 억지력'이 완전하게 인정되는 차원의 변화입니다. 군사력에서 크게 변화가 온 것을 전제로 북한은 새로운 포석을 두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작용은 반드시 북한의 반작용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파키스탄과 인디아는 1947년 분리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군사적 대치를 동반한 종교적 갈등과 영유권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카슈미르 분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디아와 원수 관계에 있던 파키스탄은 인디아가 1974년 핵실험에 성공하자 큰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풀 뿌리를 뜯어 먹더라도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절실한 동기를 실현할 방법은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1978년 어느 날,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어느 한 식당에서, 북한 외교관과 파키스탄 외교관이 자리를 함께 합니다. 북한 외교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핵무기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자 파키스탄 외교관은 농담쯤으로 여깁니다. 북한 외교관은 다시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핵무기 제조기술을 갖고 있다" 파키스탄 외교관은 크게 웃으면서 “유머 감각이 좋다”고 답합니다.
당시 파키스탄은 북한이 핵무기 제조기술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북한이 핵 기술을 진짜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은 1974년 인디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줄 피가르 알리 부토 총리는 '풀을 먹더라도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공언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핵무기를 갖고자 하는 의욕만으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차에 북한 외교관 과의 만남은 그들에게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파키스탄 부토 총리는 핵 과학자 압둘 카다르 칸 박사에게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게 하였고, 칸 박사는 북한의 지하기지에서 핵무기 완성품과 미사일에 장착되는 핵탄두 3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북한의 외교관의 '유머 감각'과는 무관한 놀라운 사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 거래는 시작됩니다. 압둘 카다르 칸은 북한과의 핵 거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오늘날 '핵개발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파키스탄에 핵무기를 이전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이어 인디아에 핵무기를 이전하는 미국의 행태, 기만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정
치협상 등은 핵이전을 고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미국은 북한과 파키스탄 간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비밀스러운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미국은 어떤 반작용으로 나타났을까요?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이 마우쩌뚱(毛澤東)의 '혁명적 사회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사회주의'를 여는 '역사적 노선전환'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때 대만에 대한 정책도 평화통일 방침으로 전환합니다. 덩샤오핑의 노선전환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와 비밀협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은 대만과 국교단절을 포함하여 경제분야 등 많은 당근을 제시하였고 결국 중국은 미국과 국교수교를 선택합니다. 중국 공산당 '노선전환 선언'은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1979년 1월1일,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합니다.
미국이 이러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까지 중국과 수교를 하기로 결정한 원인은 바로 북한 때문입니다. 미국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뜻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선택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북 대처 방안이었습니다. 중국이 눈앞의 이득에 동지를 져버린 경우 입니다. 북한의 핵보유가 국제사회의 변동을 불러온 두 번째 사건입니다.
북한 으로서는 중국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북한의 핵억제력이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기로 해석할 수 있으며, 북핵이 영향력은 이미 오늘로부터 40년 전에 국제사회에 미치고 있었고, 30년 전에 중국의 '노선전환'까지 불러왔던 것입니다. 북-미의 충돌국면은 계속됩니다.
1979년, 북한은 함경북도 영변에 5MW급 원자로 시설을 착공합니다. 이 착공은 핵시설 단지를 건립하기 위한 초기 시설에 불과합니다. 미국은 1982년 첩보위성을 통하여 겨우 이러한 사실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인적 첩보에 의해 1979년 당시에 이미 알았을 것입니다. 다만 미국으로서는 왜 북한이 핵시설을 외부에 건설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어보나마나 핵무기를 공개하기 위한 초기 절차인 것이지요. 핵무기가 공개된다면 정치협상은 더 이상 없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반작용을 했을까요? 미국은 다시 한번 북한과 정치협상을 시작합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직후, 최규하 총리 시절인 1980년 2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남-북은 총 10회에 걸쳐 회담을 했습니다. 이 회담 역시 뚜렷한 합의점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 됩니다. 북한은 5월18월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 전두환 대통령이 민주인사들이 체포 구금되는 현상 등을 이유로 미국
의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특히 7.4남북공동선언 회담에 이어 이러한 남한 당국자들과의 간접회담으로는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한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영변 원자로 건설은 계속됩니다.
1980년 10월, 북한은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이라는 통일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북미대결의 귀착점을 북한은 분명히 제시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북한의 목적이 일본 본토나 미국 본토에 대한 문제까지 염두에 둔 연방제 주장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어쨌든 정치협상에 의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며, 결과적으로 일본 본토나 미국 본토까지 포함된 연방제가 목전에 있으니 함부로 단정하기에는 또 어려움이 있습니다.
1980년 즈음, 북한은 파키스탄에 원심분리기 완제품 20여기와 관련 기술을 제공합니다. 미국으로서는 우려가 현실이 되어가는 첫 과정입니다. 이로서 미국은 2가지 원치 않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통해 핵기술을 공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키스탄에 핵무기를 이전하려는 움직임 입니다. 미국은 북한 외교관과 직접 만나야만 되는 시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주저 합니다. 영변 핵시설의 건설과 파키스탄과의 핵 거래는 계속되고 미국과의 정치협상도 중지된 상태로 세월은 흘러갑니다.
1983년 즈음, 북한은 파키스탄에 P-1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3000여기를 제공합니다. P-1은 '파키스탄형 우라늄 원심분리기-1형'의 줄임 말인데 원래는 북한의 것이므로 'NK-1'이라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P-1으로 호칭하기 때문에 부득이 P-1으로 호칭 하겠습니다. P-2는 P-1보다 발전된 원심분리기로서 역시 북한의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P-1을 이용하여 우라늄을 농축하기 시작합니다. 저농축 우라늄입니다. 북한과 파키스탄과의 계약에 의하면 이 P-1을 통해 농축된 저농축 우라늄은 모두 북한이 전량 회수해 가는 조건입니다. 회수한 저농축 우라늄을 북한은 지하 고효율 핵물질 제조공장 원자로의 연료봉으로 가공 사용하여 플로토늄으로 변환시키거나, 고농축 우라늄으로 가공하여 원자력 잠수함의 원료로 사용하거나 특고농축 우라늄으로 변환하여 핵무기(우라늄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미국이 발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1984년,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참가 병력을 20만 명으로 늘리고, 훈련기간도 50∼90일로 크게 늘렸습니다. 이러한 훈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은 점점 '직접협상'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되고, 해결 방법에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도래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 북한의 목적은 미국을 협상에 깊숙이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큰 변화를 보여줍니다.
1985년,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경수로 4기 제공을 약속 받고 핵확산방지기구(NPT)에 가입합니다. 미국은 그 동안 자기가 인정하는 국가에만 핵무기 보유를 허용하거나 이전하고,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는NPT(핵확산 금지 조약)을 통해 무려 185개국을 강제로 가입시켜 핵무기 전파 방지 노력을 해왔습니다.
북한의 NPT 가입으로 미국은 크게 고무 되었을 것입니다. 핵확산의 주체가 될 공산이 큰 북한이 NPT체제에 가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에게는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의 건설과 파키스탄과의 거래가 중단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과 미국의 외교적인 접촉은 탐색전의 성격을 갖고 비록 비공식적이고 간헐적인 만남이지만 대화는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탐색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북한의 과정은 계속됩니다.
1987년 2월, 미국의 첩보위성이 북한 영변지역을 촬영한 영상자료에는 아직 지붕을 씌우지 않은 그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 안에 두터운 벽으로 된 격실(cell)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그 격실들이 플루토늄을 분리/추출하는 공정을 위하여 배치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재처리 시설 입니다. 또한 고폭실험장이 건설 되어 있었고 고폭실험 흔적은 누가 보아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곧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사회에서 공개적인 문제로 대두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현상입니다. 파키스탄 문제와 함
께 이 문제는 미국으로 하여금 예전보다 훨씬 더 다급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80년대 말 국제사회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봄, 이른바 '천안문사태'가 발생합니다. 중국이 유대자본과 수교하고 개방을 선택한 이상 필연적으로 발생 할 일이었습니다. 그 해 4월15일에 중국 당을 대표하며 정치적 민주화를 꾀하다 그 전 해에 실각한 호요방(胡耀邦)이 사망하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호요방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민주화를 이루자는 시위가 대학가 등에서 터져 나오고 단식 연좌시위를 시작하자 그 주위에 모이는 학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6월3일 밤 군대가 수도 북경에 진입해 한밤 중에 해산을 시도해 이 과정에서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군의 발포로 많은 시위대들이 죽거나 다친 가운데 시위대들은 해산 당합니다. 중국 당국은 서방이 몰아오는 바람이 어떻게 위태롭게 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중국은 유대자본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중국 간부들은 누가 비밀
공작원인지 서로 모릅니다.
1989년 11월, 동독이 멸망했습니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통일이 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체제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동독은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나라로서 동독의 멸망은 소련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에게서 유대자본의 영향력 냄새가 납니다.
1990년 3월, 미하일 고르바쵸프 서기장은 기존의 공산주의적 헌법을 자유민주적 헌법으로 바꾸었습니다. 또 소련인민대의원대회를 신설하여 여기서 소련최고회의를 구성하도록 하여 소련최고회의가 서구에서의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하도록 하고, 복수정당제도를 인정하며, 대통령제를 신설하는 등 제도개혁을 단행 하였습니다. 한편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의 최고회의 의장도 고르바쵸프와 같은 혁명세력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 거대한 소련이 유대자본의 비밀공작과 침투에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990년 6월8일,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공화국의 최고회의 의장에 당선(5월29일)되자 러시아공화국 영토에 대한 주권독립선언을 통하여 러시아 영토 내에서의 러시아공화국법률이 소련연방법률 보다 우위에 있다고 선언하는 한편, 1991년 6월12일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옐친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91년 7월20일에는 공산당 활동 금지의 포고령을 내리고 시장경제체제 도입 등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이때 필연적으로 공산당 세력의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991년 8월19일 공산당 세력은 쿠데타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로 끝났고 소비에트연방은 지구상에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소련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상
은 일종의 혁명과 같이 일어난 것인데 이는 마치 유대자본이 봉건군주를 상대로 즐겨 써오던 서구의 혁명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유대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후 일련의 현상들이 마치 서구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처럼 비쳐지지만 그러한 현상은 유대자본의 책략인 '종속제어'의 일환일 뿐이고 지금도 여전히 러시아에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유대자본이 중국, 동독, 소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혁명은 중국을 제외하고 동독과 소련에서 성공했습니다. 놀랍고 무서운 일입니다. 북한은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혼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북한과 유대자본간의 대결은 계속됩니다.
한편 이러한 혼란기에 북한은 서방에 대한 반감을 가진 소련과 동독 공산당 측 요원들과 과학자들로부터 무기기술에 대한 고급 자료와 장비들을 획득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는 놀라운 자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연방의 붕괴로 인하여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대우는 차치하고 월급도
받지 못하는 등 하루아침에 신세가 처량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강하나 갈 곳 없는 처지에 있는 무기 과학자들을 포섭하는데 전력을 질주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무기를 통째로 구입할 수도 있었습니다. 기초과학이 발달한 북한에서 이러한 추가적인 요인들은 무기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소련의 해체가 마냥 불행 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혼란기에도 북한에서는 어느덧 영변 핵시설 5메가와트급 원자로는 가동이 시작되었고, 태천군에도 새로운 200메가와트급 원자로를 착공합니다.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거래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유대자본은 공산진영을 상대로 큰 승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골치거리인 북한과의 협상은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사안입니다. 북-미 간에는 본격적인 직접협상이 시작됩니다. 그 결과로 여러 가지 변화된 현상이 속속 나타납니다.
1991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남북한 유엔 가입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9월17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는 의제번호 제20호로 총회에 상정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규 회원국 가입 건은 만장일치로 의결돼 총회 의장인 샤미르 쉬하비주 주 유엔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에 의해 유엔 가입이 선포했습니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분단을 고착화한다며 단일국호/단일의석 가입안을 주장하였던 북한이 왜 유엔 동시가입을 받아들였을까요? 공산진영의 파탄에서 비롯된 세계지형의 변화는 북한이 동시가입을 거부할 경우 남한 단독 가입으로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어차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므로 회피할 이유를 상실 했습니다. 또한 유엔을 통해 대화채널을 생성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작용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뉴욕채널이 생겨났고 북-미는 직접회담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유엔은 유대자본이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는 수단입니다.
1991년 9월27일, 부시 대통령은 전 세계에 배치되어 있는 모든 지상과 해상발사 전술 핵무기를 철수하겠다고 선언 했습니다. 부시의 선언으로 남한의 모든 핵무기도 철수되었습니다. 그 해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은 "지금 이순간,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북한으로서는 중요한 성과를 얻은 셈입니다. 미국은 1957년 남한에 첫 핵무기를 반입한 이래 34년 만에 상시 배비용 핵무기가 없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확인 하지는 못했으므로 사실인지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 합니다. 뉴욕채널이 효과를 발휘하여 정치협상의 가능성이 보이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로의 생각은 다른데 있습니다.
이때쯤 북한의 무기과학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유대자본에 맞설 수 있는 힘은 물리력인 군사력이고 이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관철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군사력이 우선될 수밖에 없는 지경이고 이러한 노선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한 요인이 생겨난 것입니다. 가시적이고 폭발적인 무기과학 기술 발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유대자본에게 취하는 협상은 느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의 방침은 협상의 진척을 거절할 이유는 없으므로 협상의 창구는 열어두되, 내부적으로는 군사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1991년 12월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기본 문서가 체결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원칙의 재확인, 민족 화해 이룩, 무력 침략과 충돌 방지,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 교류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 도모,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북-미의 정치협상 국면에서는 반드시 남북 간의 대화가 따라다닙니다.
1991년 12월31일,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의 비핵화를 약속한 공동선언이 있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입니다.
우리민족의 입장에서 1971년 '7.4 남북공동성명'도 참 좋은 내용이고,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도 참 좋은 내용입니다. 이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루한 북-미 대결 과정에서 진정성 없이 생겨난 합의사항이고 보면 실천이 될 리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 역시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북한의 관심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무기개발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후, 북한은 파키스탄에 화성급 미사일을 판매 합니다. 1992년 3월13일 당시 미국 국무부 정치군사문제 담당 차관보 리처드 클락은 연방의회에서 "지금 북한은 제3세계에 대한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한계선을 넘어서 완성된 미사일 체계를 팔고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1992년, 북한은 IAEA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사찰협정에 조인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파키스탄과 핵 거래를 계속하고 있고 심지어 미사일까지 판매 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도 미국이 이중적인 태도로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힘겨루기가 계속되는 과정 일 뿐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힘겨루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서로의 입장 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휴식기는 오래 갈리 없습니다.
이때쯤, 미국은 북한이 이란과 핵 거래를 시도하고 있다는 신빙성 있는 정보를 획득합니다. 북한과 이란 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파키스탄과의 핵 거래에 대해서 애써 태연한 척 하던 미국은 이란과의 핵 거래에 대해서는 숨길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미국으로서는 기절할 일입니다.
1993년 1월26일, 주한미군사령관 로버
트 리스카시는 제17차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3월에 재개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이번 훈련에는 핵무기를 실은 최신예 전략폭격기 비(B)-1비(B)가 동원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부시 정권 마지막 해였던 1992년 봄에 미국은 팀 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중단한 바 있었는데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이스라엘에 위협이 될만한 이란과의 핵거래 움직임에 태연할 수 없습니다. 충돌 국면은 그 도를 더해 가 군사적 충돌을 배제하지 않은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1993년 2월9일, 미국은 IAEA를 통해 북한의 영변 핵시설 여섯 번째 특별사찰 후 추가 사찰을 요구합니다. 물론 북한은 거절합니다. 얼마후,
1993년 3월10일, 북한은 미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앞세워 강요하고 있는 '특별사찰'을 거부한다고 발표하였고 이틀 뒤인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다는 폭탄선언도 잊지 않고 발표했습니다. 북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993년 5월30일, 북한은 하루 전날 사거리 500km의 단거리 미사일 1기를 시험 발사 한데 이어 다단형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하였습니다. 몰론 성공하였습니다. 이 미사일을 두고 미국은 럼스펠드 위원회 보고서에서 '북한이 시험 발사한 노동1호 미사일이 사거리 1,300km의 준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이었다'고 주장했으나 김명철 박사의 주장은 다릅니다. 김명철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사거리 3,000 km의 2단형 중거리 미사일(IRBM) 2기였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북한이 탄도미사일 시험을 할 때에는 항상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즉각 북미 회담이 재개 되었습니다. 저는 북한이 이때 최초로 FOBS(부분 궤도 폭격 체제, 위성폭탄)를 선보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FOBS(부분 궤도 폭격 체제, 위성폭탄)에 대한 동영상과 설명은 다음을 참고바랍니다.
1993년 6월2일, 뉴욕에서 북미회담이 진행되었습
니다. 이어서 6월11일 뉴욕에서 '북-미 공동선언'이 채택되었고, 또 이어서 7월14일 두 번째 북미회담이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북-미의 회담은 북한이 이란과 핵 거래를 시도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합의가 성사되더라고 이란과의 핵 거래가 시작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거래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고 이제는 변화해야 할 시점입니다. 파키스탄은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나라이지만 이란은 경우가 다릅니다.
북한은 핵 거래를 할 때 최초 우라늄 원심분리기 모델 P-1 설비 1세트를 건네줍니다. 1세트는 3000기의 원심분리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P-1에서 생산되는 저농축 우라늄은 전량 북한이 선박으로 회수해 갑니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북한은 P-1을 회수하는 반면 P-2로 교체하여 주어 역시 같은 방법으로 계속 거래 됩니다. 이어 특정한 시기가 되면 P-2를 회수하고 핵무기를 건네줍니다. 이때 미사일 기술도 함께 전수해 줍니다. 이것이 ‘대량살상무기 세트’입니다. 미국은 이것을 두려워합니다. 즉 북한이 ‘대량살상무기 세트’를 판매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은 그 반대급부를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북-미 협상의 한부분이긴 하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북한의 전략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유대자본을 주저앉히는 것입니다. 존망을 내건 거대한 대결일 뿐입니다.
북미가 뉴욕에서 회담을 통해 '북-미 공동선언'이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P-1은 해체하여 포장되어 기어코 이란으로 넘어갑니다. 대신 파키스탄은 P-2로 교체됩니다. 유대자본의 진정한 위기의 서곡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픈트랙과 클로즈트랙입니다. 오픈트랙에서 아무리 합의되어봐야 클로즈트랙은 그대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이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지요. 저절로 ‘형님~’ 이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변함없는 전술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유대자본은 전쟁을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1994년. 그때. 전쟁의 위기는 한반도를 뒤덮게 됩니다. 전쟁에도 대화에도 다 준비되어 있다던 북한은 미국을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출처 | 단군박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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