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석이는 백혈병에 걸려서 학교를 오랫동안 쉬었다.
눈밑이 거뭇거뭇하고 얼굴도 헬쓱해서 첫눈에 보기에도 어디가
좀 아픈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다 나았다고 하는데 난 녀석이 어쩐지 기분나쁘다.
녀석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종종 눈웃음을 치며 날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이상하게 소름이 끼친다.
"볼펜 좀... 빌려줄래?"
"어? 나도 나 쓸거밖에 없는데..."
진석이는 내 대답에 다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얼마나 오랫동안 안빨았는지 곳곳에 때가 가득했다.
긴 손톱에도, 떡진 머리에도 도무지 씻은 흔적이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난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가득찬 내 필통을 몰래 가방에 집어넣었다.
"선생님 잠깐 교무실 갔다올테니까 조용히 자습들 하고 있어."
"네..."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 마자 더러운 손가락이 내 옷을 움켜쥐었다.
당황한 내가 고개를 돌리자 인상을 찌푸린 진석이가 날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꼬라보고 있었다.
"다봤어. 몰래 필통 가방에 넣는거."
"뭐?"
"있으면서 왜 안빌려줘?"
녀석은 마치 성난 당나귀처럼 입술을 씰룩거리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눈은 또 어찌나 깜빡거리는지 녀석과 눈을 마주치는 내가
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놔 이새끼야. 나한테 볼펜맞겨놨냐?"
"왜... 왜 안빌려주냐고. 이 썅놈아."
예상치 못한 녀석의 고함소리에 반아이들 모두가 깜짝놀라
우리쪽으로 시선을 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녀석은 급기야 울음까지 터뜨렸다.
"흑흑... 왜 볼펜 있으면서 안빌려주냐고 새끼야."
"미, 미친놈이 울긴 왜 울어?"
"왜 안빌려주냐고...흑흑..."
할수없이 녀석에게 볼펜을 빌려주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난 녀석에게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이 생겨버렸다.
볼펜 하나에 저렇게 집착하는 놈이라니 완전 또라이다.
아예 상종을 말아야겠다.
"그리고 나 가끔 아퍼서 책상에 엎드려 있으면 니가 선생님
한테 대신 말좀해. 알았지?"
"......"
"알았냐고?"
"한번만 더 그지랄로 말하면 진짜 뒤진다."
내가 목소리를 깔고 무섭게 말하자 그제서야 녀석은 뭔가 좀
알아들은 듯 더이상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잠시후 수업을 끝내는 종이 울렸고,
책상이 마치 비좁은 감옥이라도 되는 양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이나 매점으로 직행했다.
"야, 백혈병. 따라나와."
종이 치고 쉬는시간이 됐을 때 우리반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논다고 소문이 자자한 원표녀석 패거리가 진석이를 불러냈다.
분명 아까 수업시간에 고함을 지른것이 녀석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리라.
"내가 왜 너네를 따라가야 하는데?"
"뭐?"
오랫동안 학교를 쉰 탓인지 진석이는 개념이란게 없었다.
웬만하면 분위기 파악하고 알아서 길만도 하건만 이녀석은 도무지
적응을 못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녀석의 반응에 호기심이 동한 반 아이들은
그들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짜악, 짝
그 때 원표의 옆에서 오른팔 역할을 하는 범진이가 진석이의
뺨을 두차례 후려친 후 발로 까버렸다.
좀전의 당당함과는 달리 폭력 앞에서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나자빠진
진석이 녀석은 넘어진 채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살피냐?"
"......"
"하, 나이 씹..."
"......"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엄살이라고 해도 조금쯤은 꿈틀거리기라도 해야
정상인데 진석이는 정말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사람처럼...
"죽었다."
누군가의 말이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범진이는 예의 그 거만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굉장히 당황한
듯 진석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아마도 넘어질때 어딘가를 잘못 부딪힌 모양이다.
"진, 진석아 일어나..."
원표와 나머지 패거리들은 난감한 기색으로 그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졌고, 범진이만 사색이 된 채 진석이의 심장부근에 귀를
가져다 대 보았다.
"흑흑... ㅆㅣ발놈아 일어나라고..."
그렇게 진석이는 등교 첫날에 허무하게 죽었다.
그날 이후로 범진이는 두번다시 학교에서 볼 수 없었고,
원표 패거리들도 모두 몸을 사리는 분위기여서 교실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졌다.
마치 폭풍전야의 그것처럼.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은 서서히 기억속에서
잊혀져 갔고 교실도 예전의 분위기를 되찾는가 싶었다.
그날은 진석이가 죽은지 일주일이 되던 3교시 영어시간이었다.
민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저, 저리가... 으아아악..."
민수는 마치 자신의 눈앞에 뭔가 있다는 것처럼 손을 휘휘
내젖더니 급기야는 교실의 4층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짧은 활강 끝에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고,
민수는 목이 직각으로 꺾인채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감지도
못하고 숨을 거뒀다.
콰직
"꾸엑..."
원표 패거리 중 하나였던 민수의 죽음을 시작으로 끔찍한
사고는 계속됐다.
동호는 1층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가 윗층에서 떨어진
창문틀에 목을 맞아 목뼈가 부러져 죽었고,
재진은 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쳐밖고 익사했다.
믿기 어려운 죽음이 계속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죽음의 대상이 된 것은 모두 원표 패거리들이라는 사실이다.
"원표야... 이러다 우리 다 죽는거 아냐?"
"조까."
며칠이 지났을 때 살아있는건 원표뿐이었다.
죽음의 공포는 점점 원표의 숨통을 옥죄어 들어갔다.
그는 굉장히 예민해졌고,
성격도 전보다 훨씬 더 포악해 졌다.
"원표야..."
"한석이구나."
사실 원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갑자기 변해버린 녀석과 점점 멀어지긴
했지만 어린시절 죽마고우가 미쳐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진석이 새끼... 짓이야."
"뭐?"
"나 오늘 학교에서 밤 샌다. 그 새끼 가만안둬..."
원표는 진석이의 원혼이 벌인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원표는
책상에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어쩐지 오늘 원표가 죽을 것만 같았다.
"어쩌려고 그래? 집에 가자."
"한석아... 그동안 미안했다. 내가 너무 변했지?"
"아냐 임마 친구사이에 미안한게 어딨냐."
원표와 난 수위아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불을 모두 끄고
착찹한 심정으로 진석이의 원혼을 기다렸다.
사실 원표는 지금 두려움으로 인해 약간 맛이 간것 같았다.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귀신이라니... 킥킥...
"어엇."
원표는 눈앞에 뭐라도 보이는 것 처럼 겁에질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녀석도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며칠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약국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걸 먹으면 지네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그거죠?]
[그럼요.]
[근데 이런거 불법 아니예요?]
[후후, 한석군이 더 절실하게 원하는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커피한잔 할래요?]
"으아아악"
미친듯이 허공에 손을 휘젓던 원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창문가로 달려갔다.
잠시후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고 이것으로 내 복수도 모두 끝이났다.
난 희미하게 웃으며 교실을 나섰다.
"븅신새끼 귀신이 어딨다고. 크크큭."
계단을 내려가며 난 짜릿한 복수의 쾌감에 심취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 밥이었던 새끼가 어느날 갑자기
일진들과 친해지더니 순식간에 날 왕따로 만들어버렸다.
인간이하의 모욕감을 참고 참으며 오늘같은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건방진 새끼...
"후으으... 푸으..."
아무리 계단을 내려가도 출구는 보이지가 않았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난 여전히 4층 높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지?
"후으으... 푸으으..."
그나저나 아까부터 이게 무슨 소리야?
꼭 성질난 당나귀가 숨을 몰아쉬는 것 같은 괴상한 소리가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어쩐지 진석이 녀석이 볼펜을 빌려주지 않았을때 내던 소리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 진석이...?"
"푸으으... 크으으으... 크르르르..."
소리는 점점 맹수의 으르렁 거림으로 바뀌어 갔다.
온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끼며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진석이가 반쯤 썩은 얼굴에 증오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은 마치 벌래처럼 복도 천장에 붙어있다가 무서운 속도로
날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오, 오지마... 저리 꺼져..."
난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진석이는 지네의 몸통위로 반쯤썩은 얼굴을 달고 내 코앞까지
기어와 괴상한 숨소리를 내며 으르렁 거렸다.
난 그 끔찍한 모습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퍼억
에필로그
[그러니까 이걸 먹으면 지네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그거죠?]
[그럼요.]
[근데 이런거 불법 아니예요?]
[후후, 한석군이 더 절실하게 원하는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커피한잔 할래요?]
여인은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탄 후 의문의 백색가루를
자연스럽게 섞어 청년에게 건내주었다.
청년은 긴장한 탓에 목이 마른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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