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길 수 있다? 1군은 고려의 중앙군과 만나고, 2군은 귀주에서 한 달째 발이 묶인 상황. 살리타는 우선 1군을 뒤로 빼 안주에서 합류한 다음 2군 역시 물러나게 합니다. 이 짧은 시간이 귀주성에는 또 소중했을 겁니다. 애초에 많은 준비가 돼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군량 등 물자가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겠죠. 몽고군이 물러난 사이 박서는 어떻게든 물자를 끌어모았을 것이고, 그 동안 다른 병력 및 백성들도 합류했을 겁니다.
살리타는 우선 청천강 북쪽의 다른 성들을 모조리 점령하거나 파괴합니다. 귀주성을 고립시키기 위해서였죠. 그 동안 본군 2만은 진격하지 않고 황해도의 여러 성에 항복 사절을 보냅니다. 그 중 평주, 황해도 평산에서 그 사신을 붙잡고 개경에 보내 그제야 진짜 몽고군인 줄 알게 되죠.
한편 살리타가 예상하지 못 한 일이 또 벌어집니다. 맨 처음 항복했던 의주 함신진의 부사 전간이 배신한 것이었죠. 그는 개경에 서찰을 띄워 이렇게 말 합니다.
"국가에서 배를 보내주면 여기 있는 놈들 다 죽이고 개경으로 가겄슴다 -_-!"
무모하기까지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병력을 죄다 남쪽으로 보낸 상황에서 후방은 텅텅 비긴 했죠. 이에 김영시 등 30명에게 배를 주어 보내니 정말 성 안의 몽고군을 전멸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끌던 소미생은 이를 먼저 알아서 도망쳐 버렸죠. 어쨌든 의외의 성과를 가둔 전간이었지만 몽고군에 직접 대적할 순 없어서 남은 병력과 백성들을 데리고 보신도로 들어갑니다. 후에 배를 타고 개경으로 오다가 안타깝게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한편, 귀주는 다시 몽고군과 맞서게 됩니다. 몽고군은 안 되겠다 싶자 항복한 고려군과 고려 백성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면서 투석기 28개로 맹렬하게 성을 공격합니다. 이 때문에 성벽 50칸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박서는 예상이나 한 듯 뛰어난 컨트롤 아니 쇠사슬로 무너진 곳을 막아 버리죠. 결국 몽고군은 다시 포기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몽고군은 또 하나의 귀주를 만나게 됩니다. 자주, 현 평안남도 순천의 자모산성이었죠. 자주 부사 최준명은 적이 쳐들어오자 모든 병력과 백성들을 자모산성으로 옮겼고, 끝까지 싸웁니다. 귀주의 포스에 밀려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자주, 몽고군 본진이 있는 안주의 코 앞이예요. -_-;
귀주성의 항전, 자모산성의 항전, 함신진의 배반, 고려 중앙군 등장... 살리타 역시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더 가자니 여기저기 배후에 적이 있고, 후퇴하자니 꼴이 말이 아니었죠.
고려 역시 자신감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채송년은 몽고군 코 앞인 안북성에 들어갑니다. 수당 때의 고구려처럼, 나당 때의 신라처럼, 여요전쟁 때처럼 (백제 지못미)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상황은 고려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자신만만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들은 몽고군이었습니다.
2. 고려군, 참패 현재의 안주에 있는 안북성, 압록강에 이은 제 2의 방어선인 청천강에 있는 요지였죠. 여기서 강만 건너면 귀주성을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 채송년의 중앙군이 북진하고 귀주성이 버티면서 곳곳에서도 고려군이 힘을 되찾게 되었죠.
헌데 몽고군은 본진 근처임에도 중앙군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걸 묵인합니다. 오히려 점령한 안북성을 비우고 후퇴하기까지 했죠. 유인이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안북성에 집결한 고려군은 성 밑에 다다른 몽고군을 만나게 됩니다. 일단 채송년은 신중하게 행동했죠. 우선 어사 민희와 병마판관 최계년을 보내 음식을 대접하면서 허실을 엿보게 합니다. 하지만 살리타는 냉정했죠. 그 때 살리타는 비단으로 게르(이동식 천막)에 있었는데 비단으로 장식하고 좌우에 부인들을 늘어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너희 나라가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항복하려면 항복하고 싸울 터이면 싸우기로 마땅히 속히 결정하라."
몽고 방식으로는 이렇게 전쟁 중에도 사절을 보내는 게 이해가 안 됐던 모양입니다. 거기에 한 마디 더 덧붙입니다.
"아, 나 권황젠데, 당신 직함이 뭡니까?"
이에 민희는 도지사 아니 분대관이라고 하니 "짬 찌끄레기 보내지 말고 니 선임 오라 캐라"고 돌려보냅니다.
이렇게 쫓겨난 민희, 몽고군은 다시 성 밑으로 군사를 보내 고려군을 도발합니다. 이번에도 채송년은 성만 지키려 했지만 후군 진주 대집성은 생각이 달랐죠. 그는 딸을 최우의 첩으로 보낸, 일단은 최우의 장인, 잘 보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몽고군 생각보다 만만하다는 게 퍼져 있기도 했겠죠. 그가 홀로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고, 몽고군은 잠시 물러났던 모양입니다. 다시 성으로 들어간 대집성이 공격을 주장해서 삼군이 모두 성에서 나오게 됩니다.
1차 전쟁 두 번째 야전이 시작된 것이죠. 고려사에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삼군이 몽고 군사와 싸우는데, 몽고 군사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대로 나누어 줄을 지어 서고 기병이 우리 우군을 공격하니 화살이 비오듯 떨어졌다. 우군이 어지러워져서 중군이 그를 구원하려다가 역시 어지러워지므로 다투어 성으로 들어오는데, 몽고 군사가 승세를 타고 쫓아와서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장군 이언문ㆍ정웅과 우군판관 채식 등이 죽었다."
이렇게 안주와 개경 사이에 고려군은 소멸됩니다.
민희는 개경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렸고, 그 때문인지 고종은 중 3만명을 불러 사흘 동안 밥을 먹이며 몽고군이 물러나길 기도하게 했습니다. -_-;
최우는 오군을 더 징발해 몽고군을 막게 했습니다만, 역시 자기 휘하의 정예병 도방 병력과 야별초는 자기 집만 지키게 했죠. 겨우 모은 오군 역시 정예라 부르기엔 어려워서 기껏 개경을 지킬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몽고군은 남진을 시작합니다.
3. 항복 강요 이 시기 맨 위에서 설명한 귀주에서의 전투가 일어납니다. 2군에게 귀주성을 다시 공격하게 한 후 본군은 남하를 시작한 것이죠. 전투의 순서가 사료마다 조금씩 다른데다 인과가 바뀐 느낌이 나는 것도 있어서 확실히 정하긴 어렵군요.
몽고의 1군은 우선 자기 사신들을 가둔 평주를 쳐서 다시 학살을 벌입니다. 가축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렸다고 적고 있죠. 귀주, 자모산성의 기억 때문인지 서경에는 여전히 손을 안 댔고, 개경을 향해 돌격한 것으로 보이네요.
겨울이 다가오는 개경, 마침내 몽고군은 개경 인근에 다다릅니다. 12월 2일에는 개경의 4문 밖을 완전히 포위했죠.
이렇게 승리라는 일말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개경에서 결사항전 하느냐 항복하느냐의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최우는 강화도로 가는 길을 보기 위해 정찰병을 파견하지만 몽고군에게 잡혀 버렸죠.
다만 몽고군도 개경에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공성전을 다시 하기 싫었는지, 어쨌든 머릿수만은 아직 고려군이 크게 딸리지 않아서 또 일전을 각오해야 돼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뭐 도방과 야별초는 아직 칼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상황이긴 하니까요.
살리타는 우선 이렇게 무력 시위를 하며 고려의 항복을 기다립니다. 개경을 직접 치지 않고 병력을 쪼개 경기도와 충청도를 약탈하면서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얘기하겠습니다.
한편 몽고군 2군은 귀주성을 다시 공격하지만, 박서가 투석기를 대규모로 동원해 대포병사격을 하며 깨뜨려 버리면서 다시 막아냅니다. 이번에도 성벽은 많이 깨졌지만 그 때마다 쇠사슬을 걸쳤서 막았죠. 하지만 이는 대세에 영향을 주진 못 했습니다. 다만 고려군이 그리 만만치 않다, 특히 공성전으로 가면 이길 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각인시켜서 개경을 공격하기보다는 항복을 강요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 것이 이 귀주성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그 후의 상황들을 보면 그냥 개경 공격해서 최우 붙잡아 갔으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도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