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사촌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은 제대 직전의 말년 군바리였고, 이번이 마지막 휴가라 했다.
나는 형과 어느 호프집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형의 끔찍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진석아, 내가 소름 돋는 얘기 하나 해줄까?"
"응, 해줘"
"너 내가 군함에서 복무하는 거 알지?"
"그래, 형 해군이잖아"
"그래... 내가 해 줄 얘기는 군함에서 겪은 거야"
"오, 재밌겠다"
"흐흐..."
형은 웃었지만, 나는 약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한달 전 일이야, 그 날은 2주간의 출동을 마치고 진해로 복귀하던 날이었어"
"응"
해군에서는 군함이 장기간 바다 경계를 서는 것을 '출동'이라 말한다.
형의 배는 백명이상이 탑승하는 PCC 초계함이었고, 그 날은 오랜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배가
정박하는 날이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정박할 때의 기분은 정말 최고거든"
"어째서?"
"망망대해에서 2주동안 있다고 생각해봐, 거다가 배까지 좁아 터지지...
완전 감옥이야 감옥.."
"재밌지 않아? 밤 바다가 아름답다잖아"
"큭... 그건 하루 이틀이고, 나처럼 2년을 보고 있어봐라. 토나온다 토나와"
"하긴, 그것두 그렇네"
"그리고 그 날은 유난히 휴가 복귀자가 많았었어"
"오, 2주동안이나 휴가야?"
"해군은 휴가가 원래 많아, 대신 복무기간이 더 길고"
"그렇군"
"어쨌든 그 날 내 직속후임 둘도 같이 복귀했거든, 내가 얼마나 반겼겟냐...
말년에 아침밥 한다고 죽는 줄 알았다"
"흐흐... 조리병이 아침하는게 당연하구만 뭘"
"어쨌든 둘이 복귀신고를 하려고 나를 찾아왔어"
형의 표정이 그 때부터 딱딱해졌다.
"근데 막내인 권일병의 얼굴이 좀 이상했어"
"뭐가?"
"흠, 뭐랄까... 안색도 어두웠고 목소리에 힘도 없었어"
"왜?"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무슨 일 있냐고?
근데 대답을 안하는 거야 이놈이, 그래서 그냥 넘어갔어"
"그래서?"
"그냥 피곤한가보다 하고 푹 쉬라고 했지 뭐"
형의 군함은 하루를 더 쉬고 다시 출동을 나갔다.
"이번 출동은 제주도 주위 경계가 목표였어, 사실 말이 제주도지
바다는 똑같은 바다거든"
"또 바다에만 있었겠네"
"그렇지, 사실 출동 나가면 우리 같은 조리병들은 주구장창 밥만 하는거고,
다른 놈들은 당직만 서는 거지"
"그럼 쉬는 시간에는 뭐해?"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출동이 더 편하기도 해, 자기 일과만 마치면 자유거든.
일과 끝나면 매일 비디오도 틀어주고, 노래방 기기도 설치해 주고 말야"
"오, 노래방.."
"근데 문제는 권일병이였어, 얘가 안색이 계속 안 좋아지는 거야.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말야, 그렇게 한 5일이나 지났나?"
형이 소주 한병을 추가로 주문했다.
"그 날 밤에 내가 얘들을 침대에 집합시켰지"
"왜?"
"심심하거든, 넌 말년 병장의 체감 시간을 상상도 못할거야.
완전 하루가 일년같이 느껴지지"
"흐흐... 그래서?"
"그래서 내가 이번에 복귀한 둘에게 재밌는 얘기나 해달랬지"
종업원이 소주를 가져왔고, 형이 잔을 채웠다.
"권일병은 아무말이 없고, 같이 온 김상병이 얘기를 꺼냈어"
형은 소주 한잔을 들이키곤 말을 이었다.
형이 들은 김상병의 얘기는 이러했다.
김상병은 모처럼 나온 휴가에 무척 들떠 있었다고 한다.
김상병의 집은 부산 대연동이었는데,
매일 같이 친구들과 술마시고, 또 노래방가고 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날도 친구와 술을 마신 김상병은 아침이 되서야 일어났다.
거나하게 취한 둘이 사거리 횡단보도앞에 서 있는데,
옆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할머니의 머리에는 커다란 짐이 올려져 있었고, 곧 넘어질 듯이 휘청거렸다.
문득 친구가 김상병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장난 좀 쳐 볼까?"
"응?"
친구는 성큼성큼 횡단 보도를 건너기 시작했고, 김상병도 얼떨결에 따라 걸었다.
옆에 할머니도 둘을 따라서 건너기 시작했다.
"어라, 빨간불이잖아"
김상병이 깜짝 놀라 다시 되돌아갔고, 친구가 키득거리면서 따라왔다.
그 순간 사단이 발생했다.
계속 건너던 할머니를 코란도 한대가 사정없이 들이 박은 것이다.
"끼이익"
차는 요란스런 소리를 내었고, 할머니의 몸은 인형처럼 날아갔다.
"......"
둘은 순식간에 굳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곧 사람들이 몰려왔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곧 앰뷸런스가 할머니를 후송해 갔다.
"미친놈.... 장난 칠 게 따로 있지..."
형이 놀라서 김상병을 쳐다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계속 말했다.
"구병장님... 저라고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저는 장난이었습니다.정말 죽을 지 몰랐다구요"
김상병은 그 날 이후로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할머니가 늘 내 뒤에 있는 거 같아요, 무서워 죽겠어요...
지금도 제 등쪽이 서늘해요"
"헛.."
섬뜩해진 모두가 김상병의 뒤쪽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잖아."
"느낌이 그렇다구요, 제가 어디에 있든지 늘 할머니가 따라다녀요"
"미친놈, 니가 자초한 일이지..."
형이 문득 권일병을 바라보았는데, 그 때의 권일병의 표정이 이상했다.
"뭐랄까... 넋이 나간 표정이랄까.... 아무튼 멍하게 허공만 보고 있더라구.."
"그래서?"
얘기에 몰입된 내가 형을 재촉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지, 내가 무서워서 그만하라 그랬거든"
형은 오싹한 느낌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이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순식간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의 비명이 한꺼번에 터졌다.
"무슨 일이야?"
침대를 빠져나온 형이 본 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김상병이 목에 식칼이 박힌채 쓰러져 있었고, 옆에 권일병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
"권...권일병..."
권일병의 손에는 시뻘건 피가 가득했고, 주위는 온통 핏자국이었다.
권일병은 조용히 김상병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모두를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곧 당직사관과 부사관들이 달려오고, 권일병은 손이 묶인 채 감금되었다.
배는 가스터빈을 풀가동해 진해로 달렸고, 곧 도착했다.
항구에 벌써 헌병과 구급차가 대기 중이었다.
곧바로 권일병은 헌병대로 이송됐고, 죽은 김상병의 시체는 국군병원으로 옮겨졌다.
"왜? 대체 왜 죽인 거야?"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일주일 쯤 있다가, 소식이 들려왔지"
형이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헌병 수사관들의 질문에, 권일병은 이렇게 대답했다더군."
"뭐라고?"
"장난이었다고... 살짝 찔렀는데 진짜로 죽을진 몰랐다고 말이야"
"헐... "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정말 섬뜩했어, 잘못하면 우리도 죽을 수 있었단 말이잖아"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형이 계속 말했다.
"그 때 언론에서 엄청 떠들었었지, 게임의 폐해다 뭐다 하면서.."
"게임?"
"그래, 권일병은 입대 전에 게임 마니아 였거든..
서든XX 같은 총싸움 게임이나, 좀비같은 거 죽이는 게임에..."
"에이, 말도 안된다"
"그래, 말도 안되는 얘기지.. 근데 국민들이 솔깃해 하는게 문제란 말야"
"결론은 김상병만 불쌍하게 죽은거네?"
내 질문에 형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일어나자 버스 끊기겠다."
형은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 좀 챙기고.."
내가 앉아서 가방을 챙기는 사이 형이 다가왔다.
"근데 말야, 나중에 수사관들이 한 가지 사실을 밝혀낸 게 있어"
"응?"
형은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날 횡단보도서, 죽은 할머니의 손자가 권일병이란 걸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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