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멋진 전쟁 얘기를 할 때 늘 떠오르는 건 "국가가 위험한 상황에서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 것"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전세계가 이런 식의 스토리에 열광하죠. 힘에는 밀리지만 명분과 의지에서 이긴다, 뭐 너무 나가면 2차 대전 때의 일제 꼴이 나지만요. -_-;
중국에서도 무슨 얘기를 진행함에 있어 자기들은 약하다, 우리가 피해자다 하면서 자기들이 끝내 이겨내는 스토리를 좋아하고 서양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힘 센 서양인들을 이기는 게 동양에서 선호하는 스토리지만,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서양인 주인공이 일본 사무라이에게 계속 지다가 한 번 무승부 한 걸로 참 좋아하죠 (...)
한국에서도 이런 스토리는 참 많습니다. 일단 중국과 싸우면 수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_-; 이 때문에 일부러 우리의 수를 줄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한산도 대첩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군사는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리가 많았는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10분의 1의 병력으로" 어쩌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영웅은 만들지언정 바람직한 전쟁은 아니죠. 위험이 깊을수록, 영웅의 단독 활약이 더 대단할수록 전쟁 자체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이순신 장군이 있죠.
비장한 전개와 역전한다는 짜릿함 때문에 무시되지만, 진정한 승리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뒤의 모든 것을 다 계산해서 피해도 적은 전쟁이 가장 바람직한 전쟁이죠. 그런 점에서 3차 여요전쟁은 정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려군의 작전대로 된, 한국의 전쟁사에서 모범으로 삼아도 부족하지 않을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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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주에서 "뛰어난 용병이란 (중략) 전력을 유지하고 승리를 완전히 하는 것, 이게 공격을 꾀하는 방법이다." "작은 병력이 고집한들, 큰 병력에게 잡히는 법이다." - 모공편
귀주까지 겨우 도달한 소배압이었지만, 쉽게 빠져나갈 길은 없었습니다. 앞에서는 고려의 대군이 버티고 서 있었거든요. 둘 사이에는 강 하나만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요사에는 이 강을 다타이하라 적고 있는데, 이 二河가 그냥 강 이름인지 강 두 개를 말 하는 건지는 해석이 엇갈립니다) 소배압 휘하 장수들은 고려군이 강을 건넌 다음에 치자고 했는데 야율팔가 혼자 거부하죠. 적에게 배수진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요. 이 때문에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싸웁니다.
어차피 양군의 주 무기는 화살, 보병 위주였던 고려군은 검차를 중심으로 차근차근 전진하며 화살을 쏘았고, 이에 맞선 거란군 역시 화살로 응수했습니다. 강감찬으로서는 무리할 수도 없었고 무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차근차근 확실하게 이들을 이겨야 했죠. 소배압도 필사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지면 돌아가지 못 하니까요.
어느 한 쪽의 우세 없이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 고려의 마지막 수가 등장합니다.
뭔가 분위기는 고려군 쪽이 사우론의 악의 군대 같은데 (...) 구원 온 로한은 고려군을 편 들었죠.
소배압의 철수 후 개경에서 달려 온 김종현의 1만 정예 기병은 그대로 거란의 배후를 찌릅니다. 이조차도 강감찬이 계획한 것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김종현이 원래 제 때 합류해야 했는데 늦은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러기로 한 것인지는요. 하지만 작전이든 우연이든 이 절묘한 한 수는 거란군의 후방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수가 더 있었죠.
한겨울에 북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그것도 남쪽에서 김종현의 지원군이 나타난 바로 그 순간에요. 정말 이것조차 계산한 거라면 강감찬은 어디까지 내다본 것일까요 =_=; 우연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이렇게 비바람을 몰고 온 남쪽의 고려 정예 기병은 전투를 일방적인 학살로 바꿉니다.
고려사 등에는 이 때의 전장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없지만, 요사에서는 양쪽에서 화살이 쏟아져서 거란군이 버틸 수 없었다는 것으로 포위 섬멸전의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21만의 거대한 포위가 진행됩니다. 그 어떤 전투를 막론하고 포위전에서 남는 건 단 하나죠.
이 전투로 우피실, 요의 황제 직속 정예군이 완전히 전멸했고 상온 해리, 아과달, 작고, 발해 상온 고청명 등 고급 지휘관 네 명이 이 전투로 전사합니다.
+) 발해 상온과 고씨에서 알 수 있듯 고청명은 발해 출신이었죠. 고려에 있던 대도수 등을 생각하면 참 기분이 묘하네요.
겨우 포위를 뚫고 달아난 소배압, 고려군은 그 뒤를 쫓아 철저한 전과 확대를 꾀합니다. 겨우 살아 돌아간 병력은 10만 중 불과 수천명 뿐이었습니다.
"거란 군사의 패전함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
후세에 이를 일컬어 귀주 대첩이라 부르죠.
2. 전쟁이 끝나고 "왕이 영파역에서 친히 맞이하여 채붕을 설치하고 음악을 갖추어 잔치를 베풀고 장사들에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왕이 금화 여덟 가지를 친히 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오른손으로 금술잔을 들고 왼손으로 감찬의 손을 잡고는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으니 감찬이 배사하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돌아온 강감찬을 현종은 극진히 대우합니다. 아마 머리 속에서는 2차 전쟁 때의 악몽이 떠올랐을 겁니다. 그걸 확실히 보복한 것이 이 전투였죠. 이 때 공을 인정받아 상을 받은 이가 9천 5백명 가까이 됐다고 합니다.
요 성종은 돌아온 소배압에게 "얼굴 가죽을 다 벗겨버리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용서해 줍니다. 귀양 가는 걸로 끝났죠. 그 외에 전사한 자들에게 보상해 주면서 울분을 달랬죠.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려를 치지 못 합니다. 귀주대첩에서 전멸한 우파실은 사실상 거란군의 주력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란의 주력군이 고려에서 소멸해 버린 것이죠.
전쟁이 끝나자마자 흑수를 비롯한 온갖 여진족이 승리를 축하했고, 송에서도 계속 축하 사절을 보내 왔으며, 일본에서도 조공을 바쳐 왔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외교에 대격변이 온 것이죠.
1021년,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고려에서는 6년 동안 붙잡아 뒀던 -_-;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양국의 관계는 회복됩니다.
그 이후에도 양국의 분쟁이 아예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일단 보주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양국은 이걸로 계속 부딪힙니다. 고려에서는 요 성종 때의 약속대로 압록강 남쪽은 모두 받겠다고 나섰고, 거란에서는 옛날에 쌓은 거라서 포기할 수 없다고 맞섰죠. 결국 "성은 못 주는데 그냥 그 근처에 니네가 살아도 된다"로 타협하게 됩니다. (...) 좀 잇다 다시 얘기하죠.
뭐 이렇게 세 차례의 여요전쟁은 모두 끝났습니다.
표면상으로 보면 고려가 거란에 대한 사대를 끝내지 않았는데다 압록강 이북으로 올라가지 못 했다는 한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특히 3차 여요전쟁이 끝난 후 양국의 분쟁을 보면 대체 어느 쪽이 위인지 헷갈리죠. -_-;
현종이 죽은 후, 덕종부터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게 됩니다. 거란은 물론 여진도 막았지만 고려는 막무가내로 쌓았죠. 위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다는 꿈은 이것으로 끝이 납니다. 어쨌든 국력으로는 고려가 열세였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외부의 침략을 철저히 끊고 외교, 경제적인 이득을 챙기면서 고려는 동북아의 하나의 축이 됩니다. 작다 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 나라, 강소국이라는 현실적인 노선을 걷게 된 것이죠.
3. 고려의 태평성대 어쨌든 보주를 통해 압록강 하구를 여전히 가지고 있던 거란은 여기에 상설 시장을 만들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송-여진-고려에 이르는 무역의 이득을 노리려 했죠. 하지만 이는 곧 보주가 영구히 거란의 땅이 되는 것을 뜻 했고, 고려에서는 외교적으로 막고 아예 군사들을 보내 시위합니다. (...) 함락은 아무래도 힘들었나 봐요. 일단 평화롭게 지내기로 했고, 압록강 사이 섬에 있는 내원성과 배다리로 연결돼 있었으니까요. 계속되는 싸움 끝에 요는 결국 포기합니다. 이 때 고려는 송의 연호를 쓰기도 하고 "너는 황제가 아니라능 ㅡㅡ" 이라면서 죽은 요 성종의 연호를 쓰기도 합니다. (...)
보주에 시장을 설치하는 게 막히면서 동북아의 교역은 고려에 집중됩니다. 서쪽에서야 송에게 삥 뜯은 걸로 살았겠지만, 동쪽에서는 고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죠. 이에 따라 여진과의 교역도 고려가 주도하게 되었고, 거란의 여진에 대한 지배력도 크게 약화됩니다. 대신 고려는 송-거란-여진-일본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의 중심이 되어 참 많이 벌어 먹었죠. 이 때로부터 여진의 완안부가 성장해 고려, 거란에게서 벗어나려 할 때까지, 사실상 여진은 고려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수평적 관계는 아니지만 수직적 관계도 아닌 애매한 관계가 계속되죠. 거란이 제대로 대접 안 해 주면 송의 연호로 갈아타고, 거란에게 뭐 달라고 할 때는 거란의 연호를 쓰는 상황, 이쯤 되면 황제라 불러 주는 수준이죠 (...) 뭐 더 이상의 전쟁은 고려에도 필요 없었으니까요.
송에서도 고려를 최대한 붙잡아야 했습니다. 거란과 관계가 가깝고 멈에 따라 이어지고 떨어졌던 게 그 둘의 관계였지만, 그 덕에 고려는 사신을 보낼 때마다 송에 많은 물자를 삥 뜯어 옵니다. (...)
그러니 이게 모티프가 있긴 한 거죠. (koel2, demiru님 제보 감사합니다 >_<) 뭐 고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지만요. -_-; 기록 보고 했다기보단 그냥 요나 서하나 다 써먹었으니 고려 써 먹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1031년, 현종은 세상을 뜹니다. 향년 40세였죠. 흥미롭게도 이 해 전쟁 영웅, 고려의 문곡성 강감찬도 세상을 뜹니다. 고려의 태평성대의 토대를 마련한 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게도, 요나라 최고의 명군이라 불리며 요나라를 크게 키운, 하지만 고려에서 크게 물 먹은 요 성종 역시 이 해 죽습니다.
+) 참고로 강감찬은 전쟁이 끝난 후 쉬게 해 달라고 했는데 현종은 지팡이를 내려주며 더 일하라고 했답니다. orz;; 황희의 대선배.
고려 말, 고려의 역대 왕들을 평했던 이제현은 현종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인군이 천명 만 믿고 욕심을 함부로 하고 법도를 어기면 비록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는 것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치세에도 난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함을 처음과 같이하여 써 천휴를 기다리는 것이니 현종과 같은 이는 이른바 나는 간연함(지적할 것)이 없다 하리라"
뭐 현대의 눈으로 보면 지적할 게 좀 많긴 하지만... 이건 한 왕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나 다름 없겠죠. 이렇게 현종은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왕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122년 예종의 죽음까지, 고려는 전성기를 쭉 누립니다. 자세한 건 링크한 pokerface님 글을 참조하시구요. 다만 너무 평화롭던 시대라 orz 주목을 안 받죠. 조선의 세종대왕 같은 경우도 한글이라는 어마어마한 거랑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정말 빼곡히 적힌 사료가 있어서 그렇지 없었으면 비슷한 대접을 받지 않았을까 싶네요.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고, 그 정도로 태평성대였다는 것이겠죠. 또한, 이렇게 외부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천리장성 내부에서 천천히 고려인들이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민족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4. 다가오는 먹구름 그렇게 국력을 쌓았던 고려가 반항하는 완안부 애들도 좀 누를 겸, 영토도 좀 늘릴 겸 한 게 동북 9성 정벌이었습니다만... 실패했죠. 여요전쟁이랑 비교하면 이게 왜 실패했는지 답이 나오긴 합니다. -_-; 서북면의 개척은 참 차근차근 천천히 진행됐죠. 성 쌓고 개발하고 백성들 이주시키고 싸울 땐 싸우고 타협할 땐 타협하고... 하지만 동북 9성 때는 한 방에 뙇 밀고 성도 금방 금방 쌓고 끝내 버렸죠. 여진족을 너무 만만히 본 탓이었을 겁니다. 그 여진족은 약해져 가던 요를 멸망시켜 버렸으니...
고려 내부에서도 여진에 사대를 하냐 마느냐로 싸우긴 했지만, 의외로 금과 고려의 사이는 조용했습니다. 동북 9성 정벌 때의 고려, 아니 척준경의 힘 (...) 도 있었지만, 고려가 그 정도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여진도 충분히 알고 있었거든요. 당시 금사의 기록입니다.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행여 침입하여 사건을 일으키지 말고 오로지 군영을 튼튼히 하여 널리 척후병만 배치하라."
이 때 연전연패하던 거란은 고려에 최소한 보주 지방에라도 지원을 해 달라고 했고, 고려는 거부하고 단호히 국교를 끊습니다. 결국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보주와 내원성에 무혈 입성했고, 금도 이것을 건드리지 못 하면서 마침내 압록강 남쪽은 온전히 고려의 차지가 되게 됩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요금 교체기에 더 이상의 활약을 못 했다는 것이겠죠. 동북 9성의 실패가 컸습니다.
그리고 이 때 더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고려 내부의 혼란이 시작된 것이죠. 문벌귀족의 독점이 심해지면서 금에 사대하는 걸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났고, 이게 막히면서 더 극에 달합니다. 한편, 동북 9성 정벌을 통해 입김이 커진 무관들의 불만이 시작됐고, 이를 또 억누르는 과정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죠.
1170년 시작된 무신정권은 이후 쭉 계속됩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졌고, 그 동안 쌓아 놓은 게 있어서 버틸 수 있었지만 최충헌의 최씨 정권이 시작되면서 고려는 안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인 1162년,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몽골에서 한 소년이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이었습니다.
이전에 조선의 마지막을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죠. "내우가 극에 달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외환이 닥쳐오는 것을 보면 천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