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아구찜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12시 30분. 이 시간의 신사역 주변은 언제나 취객들로 넘친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넥타이 부대들의 행렬. 아저씨들.
하하, 나도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일거야.
난 분명 저런 모습을 한 중, 고등학교 동창을 많이 보았다. 30살이니까.
나와 친구들 외의 또래들은 대부분 아저씨의 모습으로 오늘밤도 접대니
회식이니 하며 술을마시거나 거리를 휘청이며 다니고 있을테지.
턱.
생각을 하고 걷는사이 누군가 나와 어깨를 부딛혀왔다. 한눈을 팔고 있던 것은
내쪽이었기에 나는 '죄송합니다' 사과를 한 후 하얀 셔츠에 감색 넥타이를 맨 남자의
실루엣을 스쳐지나려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남자는 집요하게 내 앞을 막아섰다.
'뭐야, 시비거는건가. 만만한새끼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때서야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그의 표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껄렁한 욕지거리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양 미간을 좁히고 어어,
하는 소리를 계속 내던 남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다.
"아, 문종이, 신문종 맞지?"
기쁜얼굴로 짝짝 박수를 치는 남자. 아아, 그래. 나도 기억난다. 재...준?
분명 이재준인가 하는 그런 이름이었지. 여전히 존재감 없는 얼굴을 하고
있구나.
"우와, 너 여전히 잘 생겼구나, 하나도 안변했다 야."
말한 후 자신을 보는 나의 시선을 느끼며 멋적은 웃음을 짓는다.
"난 뭐, 아저씨지 뭐."
난 마찬가지로 가볍게 웃어주었다.
"아아, 아니야 너도 여전히."
존재감이 없구나.
집이 근처니 술도 깰 겸 잠시 좀 같이 걷자며 재준은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나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귀찮았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가워 하는 녀석의
얼굴에다 그런 말을 하기가 미안했다.
이런 저런, 집값이 어쩌니 재개발이 어쩌니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우리는 어떤 골목으로 들어섰다. 뭐야, 이런 곳에 살았었나 이녀석.
골목은 점점 더 인적이 없어지고 으슥해졌다.
"이쯤에서..."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된 나는 재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서려했다.
재준은 갑자기 울상이 되더니 나를 잡아끈다. 집 나와 산지가 오래 됐다며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란다.
중학교 동창이었던가? 너도 알다시피 난 그런 취미가 없단다. 그러고보니
넌 좀 게이같은 구석이있었지.
"미안. 좀 피곤해서."
"좆같은 씨발새끼."
응? 난 나올리 없는 이상한 말을 들음과 동시에 주변의 인기척을 느꼈다.
둘? 셋? 그들은 내 팔을 뒤에서 감고 머리를 앞으로 눌러 나를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뭐, 뭐야이건!
쿵!
난 뒷목이 저릿해짐과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것을 느꼈다.
물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흐릿하게 시야가 들어오고 난 조금전 까지의 상황을
기억해 내는 데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 해야 했다.
몸이 무언가에 묶인 듯 움직여지지 않는다. 주변은 어두컴컴한 지하실. 영화에
나오는 딱 그런 곳이다.
아아, 그래 난 납치를 당한 모양이다.
눈 앞에는 재준을 포함한 3명의 남자가 내가 정신이 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들이밀었고 그들의 표정을 본 후에야 내 상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그건 마치 장난감을 가진 어린애의 표정. 날 이제부터 신나게 가지고
놀아주겠다는듯 한껏 달뜬 얼굴들이었다.
몸과 팔은 의자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보았던 수많은 액션
영화가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탈출했더라. 최근에 본
헐크도 생각났다. 맥가이버도. 다이하드, 미션임파서블.
다 부질없었다.
'대체 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입에 테잎이 붙은 모양이다. 공포가 엄습했다.
코로 나오는 숨이 거칠어진다.
그중 가장 멍청하게 생긴 한 녀석이 책상에 놓여진 카타칼을 집어들더니
연필을 깎아대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아니 대체 왜?
"이걸로 니 팔꿈치를 깎으면 어떨까"
아, 협박을 하려고 그런거구나. 갑자기 팔꿈치가 시려왔다.
"킥킥킥. 이새끼 표정 봐. 아니면 그 잘난 얼굴을 깎아줄까?"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 졌다.
카타칼이 내 얼굴을 깎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아아, 얼마나 쓰라릴까.
재준이 내 입에 붙은 테입을 좍! 때어냄과 동시에 "사, 살려줘!" 란 말이
터지듯 튀어나왔다.
"너 예전에 싸움도 곧잘 했잖아? 존내 패버리고 싶지?"
패긴요,
사람이 현실에 순응하는 시간은 의외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죽거리는
재준의 얄미운 면상을 보고 떠오른 말은 '살려만 줘.' '미안해' '뭐든할게' 딱
이 세가지였다. 아, '패긴요' 이걸 추가해서 4가지.
난 위에서 떠올린 세가지의 말들로 끈임없이 애원하며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비굴하게 굴었다. 이 때 느낀 것이 자존심이란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집어던지는 허울 같은 것이구나, 하는 거였다.
당시의 생각같아선 이들이 내 엉덩이에 바세린을 바르고 비누를 좀 주워 달라고
했어도 기쁜마음으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려만 준다면.
문득 머리속에 떠오른 생각.
아 그래-, 이들이 원하는게 뭘까, 내가 의외로 그 요구를 잘 받아들인다면
흔쾌히 풀어주지 않을까. 내 기억이 맞다면 난 저녀석에게 원한 살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돈? 복수? 어느쪽이지?
난 혹시 비위를 상하게 할까 차마 '무엇을 원해?' 라고 물을 수 없었다.
그저 말똥말똥 바라만 볼 뿐.
"고추로 매듭을 지어봐"
멍청하게 생긴 놈이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기엔 너무 짧아서..."
반사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 씨발, 길게 할 수 있잖아"
"아...하하, 그렇게 하면 그게 너무 딱딱해져 버려서...헤헤"
이 무슨 추태란말인가. 하지만 다행이도 그들은 킬킬거리며 웃어주었다.
역시 유머란 좋아.
난 그 순간의 따뜻함을 느끼며 '죽지는 않을지도 몰라'
라는 안도를 했던것 같다.
"자 이걸 봐"
재준이 눈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내 것이었다.
"여자 번호가 많은데? 응? 이 썅놈아. 그 얼굴로 대체 얼마나 후리고 다닌거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돼 버린거냐 재준아.
대체 뭐가 널 이렇게 만든거야...
내가 알기로 넌..
음, 넌... 음, 그러니까...
존재감 없는 새끼였잖아.
"에헤헤, 후... 후리긴요. 그냥 아는 동생들입니다."
"이 씨발새끼"
퍽! 아, 그리고 얼마동안 구타가 이어졌던가.
아프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아니 내 신체 어딘가를 아무렇지 않게 훼손해
버릴 것만 같은 이들의 무자비함이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살려만 주세요, 살려만 주세요.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 이유 같은 것도 중요치 않았다. 살려만 준다면.
절대 경찰따위에게 신고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난 안한다면 안하는
사람이다. 이 분들이 그걸 믿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딴 비굴한 생각이 온통 머릿속에 가득 차올 때 쯤, 재준이 말했다.
"별거 아냐. 여기 저장 돼 있는 여자들한테 전화를 해서 돈을 좀 받아 내려구.
너에게 급한 일이 있다고 하면 몇 백씩은 들고 나와주지 않겠어? 난 돈 벌구
넌 여자들에게 네 가치를 확인하고. 서로 좋잖아. 중학교때부터 인기 많던
신문종이?"
너 꽤 부러웠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나이트에서 만난 여자애들이 얼굴도 가물가물한 날 위해 돈을 들고 나와
줄까... 그것도 몇 백 씩이나. 너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물며 잘 아는 사이라고 해도 그런 여자 세상에 없다고. 이제보니 얼굴이
꽤나 오타쿠스럽게 생긴 것이 여자에 대한 환상이 대단한 것 같군.
아니면 그 환상에 배신 당한 상처를 이런 식으로 푸는 것일까.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난 그저 전화를 받은 여자들이 우연히도 날 흠모하고 있어서, 얼마가
되든 돈을 싸들고 와 이들에게 건내주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누가 있었지... 연희, 미혜, 혜진, 영숙...
아 씨발. 혜원은 짱깨집 이름인데.
전화를 걸기 시작했는지 문 반대편에서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난
지금까지 여자를 좀 많이 사귀어 둘 걸 하는 때 아닌 반성을 의자에 묶인
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 온 재준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다. 역시나...
"이 씨발새끼, 완전 쓰레기구만?"
"에..."
"기집애들이 욕부터 해,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면서 끊어버리데?"
재준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씨발 너도 불쌍하다 불쌍해."
나는 절망했다. 재준의 옆에 서 있던 멍청한 놈이 카타칼을 드르륵, 하며
날을 세운다.
"그래도 딱 한 명 있더라.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서광이 비췄다. 아아, 누굴까. 그 여신님은. 이 곳에서 나가면 한 턱 크게..
아니, 평생을 노예처럼 모시고 살아드리리라. 물론, 그 분이 원하신다면...!
아무리 못생겨도 상관없다. 성격? 그딴게 무슨 상관이냐. 난 이미 그분을
위해 내 남은 여생을 받칠 준비가 돼 있다.
난 그들의 손에 이끌려 약속한 접선장소로 향했다. 널 살려준 여신님의
얼굴이라도 보아두라는 재준들의 상냥한 배려였다.
시간이 지나자 저 멀리서 한 여자의 실루엣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스스한 긴 머리. 약간은 작은 키.
누굴까,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저벅저벅.
점점 다가온다.
그리고 조금씩 보이는 얼굴. 아, 낯이 익다.
누구였더라...
예쁘다... 내가 저런 예쁜 여자를 알고 있었던가...
아, 아아...
저 여자는,... 저 여자는...
어째서 저 아이가 날 위해 이런 곳까지... 눈물이 나려했다.
"아 씨발 왠 아오이 유우?!!"
라고 크게 외치며 난 잠에서 깼다.
아시발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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