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새로운 이웃이 들어온 한 달 전부터 시작되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이 빌라에 반가운 이웃이긴 했지만, 딱히 그녀와 친분을 쌓은 일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옆방 에서 일주에 두, 세 번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벽이 쿵쿵대는 소리, 이웃 여자의 신음, 그리고 음악 소리와 약간의 비명. 그 모든 것이 내가 잠드는 야심한 밤에 일어난다는 것이 문제다.
"아~미치겠다."
리드미컬하게 둥둥대는 벽에 손을 가져다 댄다. 하필이면 내가 눕는 침대 바로 옆 벽이 이웃집과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잠을 제대로 자질 못하니 미칠 노릇이다. 아침에 출근시간이 늦어지는 건 당연하고 눈가 아래로 다크서클이 주욱 내려온다. 결과적으로는 밥상에 브로콜리가 추가되어, 한 달 식비가 조금 더 나가는 불상사도 초래하게 되었다. 미친년! 대체 오밤중에 뭘 하는 거야! 그런데 그 순간 희미하게, 여성의 비명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저기요."
나는 대충 옷을 걸쳐 입고 301호, 옆집의 대문을 퉁퉁 두드렸다. 11월의 새벽 칼바람이 발등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할퀸다. 어찌나 추운지 자동으로 발이 동동 굴러진다. 입에서는 뽀얀 입김이 유령처럼 흐른다. 언제 나오는 거야? 씨불씨불 거리고 있는데 희미하게 들려오던 음악소리가 뚝, 끊긴다. 그리고 철제 문 너머,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그러나 내가 볼 수 있는 건 쇠고리에 걸려 좁게 열린 틈새 뿐 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 밤중에..."
그녀는 생각보다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나는 순간 추위가 온몸에서 싹 달아나는 걸 느끼고 톡톡 쏘아대는 말투로 내 이웃사촌에게 정답게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밤중에 대체 뭐 하시는 거 에요? 벽을 쿵쿵대질 않나, 음악을 틀질 않나, 비명을 지르질 않나. 락커에요?"
좀 더 화났으면 뒤에 육두문자도 서슴없이 들어갔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내 생활패턴을 와장창 무너트린 장본인 이었으니까. 부슬부슬한 머리에 퀭한 눈동자, 앙상한 얼굴과 몸에 퉁방울만한 눈이 제법 불쌍해 보이긴 했지만 내 불만은 생각보다 훨씬 컸나보다. 그런데,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에게 하는 그녀의 말. 가관이다.
"이상하다...방음 잘되는 거 확인 했는데."
"이런 썅, 당신 진짜 개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방음이 잘되면 집안을 클럽으로 개조해도 된다는 소리인지 뭔지, 생각보다 대단한 그녀의 뻔뻔함에 욕이 저절로 나왔다. 나름 지성적이고 이성적인 나에게-사실 좀 욱하는 면이 있기는 하다만-서 이런 말이 나온다니 나조차도 믿을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여자는 좀 정상이 아닌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문을 닫았다. 그 좁은 틈새가 닫히는 순간에 나는 그 시커먼 암흑 속에 쌓인 그녀의 집 안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 속에서, 문이 닫히면서 흘러나오는 집 안의 냄새가 나에게 닿았다. 코끝을 강렬히 찌르는 비릿한 냄새와 섬유 탈취제의 은은한 향기. 그 서로 절대 어울리지 않는 냄새의 협연이 살짝 느껴지고, 다시 칼바람이 그 뒤를 쫒아와 내 콧등을 시큰히 스친다.
"좋게좋게 삽시다! 네?"
나는 크게 소리치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으, 추워.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켜보니 세시 삼십분이다. 망할, 출근 준비까지 딱 세 시간 반 남은 상황이다. 어찌됐든 눈을 감으니 잠은 파도처럼 밀려와 노곤하게 나를 담근다. 그때, 벽을 타고 여자의 비명소리와 흐느낌이 들려오는 듯 했지만, 이미 나는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질 정도로 잠에 빠져드는 상태였다.
"정군. 또 지각이구만."
"죄송합니다 과장님.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무슨, 여기가 군대야? 이 사람아. 김군, 최양봐. 자네보다 선배인데도 제시간에 재깍 나오잖아!"
한차례 폭풍 후 내게 남은 건, 회의 보고용 프레젠테이션 수정본과 시말서. 그리고 오늘의 할 일들 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고 프레젠테이션을 수정하고, 휴게실에서 분말 커피를 하나 탔다.
“태우씨, 또 지각 한 거야?”
말을 건네며 내 옆으로 다가온 사람은 과장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 최양 이었다. 이름은 최 윤희. 회사 선 후배 사이이기 전에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이며, 또 한때는 나의 연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나에 대한 호칭을 세 차례 바꾼 여자다. 사귀었을 때에는 자기, 헤어지고 나서는 개새끼, 회사에서 만났을 땐 태우씨. 하여튼 여자는 편한 생물이다. 자기만.
“네 선배님. 시정하겠습니다.”
“시말서 생각에 화났구나? 뾰루퉁 하기는.”
그녀는 솔직히 좀 짜증나는 존재다. 헤어진 후 혼자서 힘들어하고 혼자서 날 미워하고 혼자 잊어버리더니, 사회적 위치에서 나를 아래에 두자 그녀는 마치 나의 모든 것을 아는 누나인양 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는 언제나 내 위에 있었다.
“알면 좀 가라.”
“깐깐하게 굴지 말고~ 오늘 밤에 축구하잖아. 너희 집에서 같이 보면 안 돼?”
그리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승낙하는 건지, 나도 날 잘 모르겠다. 어찌됐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는 시말서를 제출했고, 무사히 회의를 마쳤고, 퇴근 전에 부장에게 한번 더 욕을 먹었다. 그리고 윤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 역으로 향했다. 왜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이 나는 걸까?
“BBQ는 기름도 안 좋은 거 쓰고 가격도 비싸. 다른 거 먹자.”
“기름이 다 똑같은 기름이지 뭐.”
“안 돼. 저쪽에 굽네 있네. 난 굽네 맛있더라.”
결국 왼 손엔 그녀의 고집이 잔뜩 들어간 치킨 한 마리, 오른 손엔 비열 처리가 돼서 맛이 끝내준다는 캔 맥주들을 들고 즐거운 나의 집으로 향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집 청소 안 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 분명 또 한바탕 난리를 치겠군.
“이게 뭐야!”
“적당히 해라, 니가 내 애인이냐?”
윤희는 들어오자마자 쌓여있는 컵라면 용기며 김 봉지 등을 보고 경악을 한다. 나는 대충 치킨과 맥주를 던져두고 TV를 켰다. 아직 중계가 시작 되려면 먼 모양이다. 그녀는 어느새 주방에서 쓰레기봉투를 가지고 나와 주섬주섬 쓰레기를 담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투하나가 꽉 찼다.
“봉투 줘. 내가 버리고 올 테니까.”
“오는 김에 더 큰 봉투 하나 사와. 이건 뭐 해도 해도 끝이 없네.”
정말로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 것이다.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꽉 찬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선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두 눈이 퀭한 여자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헉!”
이웃집 여자다. 심장이 철렁해져서 한 순간 다리가 풀렸다. 그녀는 멍하니 나를 응시한다. 청소를 하느라 부산을 떨어서 시끄러웠던 걸까? 하지만 소음으로 따지면 그녀는 나한테 할 말도 없을 텐데.
“무슨 일이세요?”
“여자 친구 분이신가 봐요.”
그녀가 입을 뗀다. 나는 순간 이유 없이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부스스한 그녀의 머리털이 마치 어릴 적 동화책 속에서 보았던 마녀의 머리칼 같이 느껴진다. 흉흉하게 늘어진 기미는 짙고 암울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좀 더 ‘그녀답게’ 보이는 듯 했다.
“아니요. 직장 동료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는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히 피어올랐다. 계단을 마저 내려가기 전에 내 집 앞을 올려다보니, 아직도 어둠 속에 그녀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지금 그녀는 왠지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두 눈을 퀭하게 뜬 채로.
“삼천 백원요.”
쓰레기봉투 묶음을 사고 슈퍼를 나와 담배를 문다. 그리고 축구를 끝내고 윤희를 어떻게 집에 보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축구가 끝나고 나면, 아마 우리는 자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안고 싶지 않다. 그녀와의 사랑은 내게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고, 슬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아...”
나는 그녀가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내 현실에 그녀가 개입하게 된다면, 평생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몹시 괴로워 하고 있었다.
“씨파...”
담배를 땅에 떨어트려 발로 짓이긴다. 그 사이 바람은 좀 더 차가워져서 나는 연신 욕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불이 켜진 삼층의 창문을 바라본다. 창문에는 여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
다만, 서로 다른 그림자가 두 개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저긴 우리 집인데? 윤희만 있어야 하는데? 그때 한 그림자의 손이 천천히 올라간다. 그 손에는 무언가 흉기 같은 것이 들려있다. 이어서 윤희의 비명소리가 짧게 들리고, 머리를 강타당한 그림자 하나가 쓰러져 창문에서 사라진다. 나는 두 손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남은 그림자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내 방에 불이 꺼지고, 낡은 전셋집 빌라엔 어둠이 찾아왔다.
“뭐야...”
바람이 불어온다.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벽이 둥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웃 집 방의 어둠 속에 스며든 비린 냄새와 방향제 냄새가 흘러온다. 나는 어느새 뛰고 있었다. 계단을 미친 듯이 올라간다. 내 집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떨어트린다. 핏자국이 있었다. 이웃집으로 향하는, 새빨간 발자국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머릿속은 복잡하다. 나는 내 방문을 열고 핏자국의 방향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지 않은 치킨 냄새가 느껴지고, 불을 켜자 사방에 난자한 핏자국과 윤희의 가방이 보인다. 나는 침대에 힘없이 털썩 앉는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천천히 등을 벽에 기댄다. 윤희의 비명소리가 벽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다.
“빨리 와주세요. 지금...”
횡설수설 하며 상황을 설명한 뒤, 통화를 종료하고 나는 천천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벽에 맞닿은 등이 둥 둥 울린다. 윤희의 비명이 들린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구하러 가야할까. 그러나, 그러나...
“흐흐...흐흐흐...”
이렇게 그녀가 죽는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좀 더 고개를 깊숙이 파묻는다. 눈꺼풀이 덮은 어둠 속에서 이웃집 여자의 퀭한 얼굴이 떠오른다. 무표정한 그녀의 입가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덩달아 나의 입가도 올라가기 시작한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인지하고 있었다. 아까 마주쳤던 나의 정다운 이웃은, 분명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웃집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죽인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인 것이...
“정 태우씨. 경찰입니다.”
어느새 동이 터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 밝아진 방 안과 형사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이웃집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흰 우비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집안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윤희의 시체는 없다.
“윤희는...윤희는요?”
“최 윤희 씨는 사망했습니다.”
그 말을 하는 형사의 표정은 못 볼 것을 본 듯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진술을 위해 경찰차에 탔다. 죄를 지은 건 내가 아닌데 마치 내가 죄인이 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밖에서 형사 두 명이 이야기 하는 내용이 차 안으로 들려왔다.
“아니 그 미친년 영양결핍까지 있었다면서요? 문이 잠겨있던 것도 아니고.”
“두려움에 그랬을 수도 있지. 어찌됐든 유명한 연쇄살인범 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뼈만 남은 년을 멀쩡한 남자가 무서워해요? 이거 살인방조죄 아뇨?”
“신고가 늦었던 것도 아니라서, 아마 표창장도 나올 것 같다.”
나는 경찰서에서 사건의 진위 등등 내가 아는 한에서 최대한 나는 피해자처럼 보이게끔 진술했다. 알리바이는 쓰레기봉투를 산 마트의 직원이 증명해 주었고, 나는 표창장까지 받고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옆집은 문이 열린 채, 안에는 현장 보존을 위해 노란 테이프가 거미줄처럼 쳐져 있었다.
얼마간은 나도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현장보존을 위해서라고 했다. 박스에 얼마간 생활할 용품들을 담는데 문득 어제 사온 치킨과 맥주가 보였다. 차갑게 식은 고기와 미지근한 맥주를 먹는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차분히 정리되면서 잠에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어?”
벽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대자, 다시 한 번 쿵 하고 울린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점차 거세지던 진동은 어느새 익숙한 음악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최 윤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거세게 뛴다. 그 때 누군가의 손이 나의 두 눈을 가렸다. 화장품 냄새가 나고 차가운, 아주 차가운 여자의 손이었다. 그것이 윤희의 손이라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세요?”
나는 어젯밤 윤희가 되어 사건을 보는 듯 했다. 방은 얼추 치워져 있었고, TV에선 막 축구중계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 순간,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윤희가 물으며 다가가도 바깥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작은 외시경 으로 바깥을 보아도 새까만 암흑만 보일 뿐이었다.
“태우씨야?”
현관문 잠금장치가 찰칵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서서히 현관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집에서 흘러나가는 빛과 함께 윤희의 눈에 보인 것은 이웃집 여자와 그녀가 내리치는 망치였다.
“허억!”
그녀는 태연히 집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곤 고통스러워하며 주저앉은 윤희를 내려다보았다. 윤희는 오른쪽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것을 찍어 눈앞에 대어 보았다.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아아...”
윤희는 재빨리 일어나 부엌의 서랍으로 가서 칼을 찾았다. 시야가 몽롱해짐에도 삶에 대한 욕구가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입으로는 계속해서 같은 말 만 반복했다.
“태우씨 살려줘....태우씨 살려줘....태우씨 살려줘...흐흑...제발...”
칼을 들어 뒤돌아서자 그 곳엔 이웃집 여자가 서있었다. 윤희는 눈물과 핏물로 얼룩지는 시야에서 두 손으로 칼을 쥐고 서 있었다. 온몸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두려움으로 떠는 윤희 앞에 그녀는 입꼬리가 올라간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헤헤...”
한 발자국, 그녀가 다가왔다.
“히히히히...”
그리고 다시 한 발자국, 그녀가 다가왔다.
“오지마! 흐흑...제발...”
이웃집 여자는 윤희의 말을 무시한 채 한 걸음 더 다가섰고, 윤희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그녀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힘이 빠진 윤희의 칼은 너무 짧았고, 윤희는 순식간에 시야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해야 했다. 가끔 찾아오는 이명증처럼 높은 고주파의 소리가 윤희의 귀에 울렸다.
“사랑해요.”
윤희는 죽어가는 중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해당하고 있는지 느끼고 있었다. 미친 여자는 자신의 신체를 절단하고, 애무했으며 피를 핥기도 했다. 윤희는 그 와중에도 내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지옥 같은 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갈라지고, 내장이 꺼내지고 그 안에 형형색색의 구슬 탈취제들이 들어가는 순간에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시체들이 보관된 방 안에 안치 되는 그 순간까지도.
“아아...”
나는 눈물을 흘렸다. 만약 내가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윤희는 지금쯤 살아 있었겠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죽인 것이다. 눈을 감긴 차가운 손이 천천히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나 이웃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윤희의 시체가 마지막으로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모든 시체들은 치워진 뒤였고, 방 안에는 방향제 구슬들이 조금 굴러다닐 뿐이었다.
“미안해 윤희야...”
방 안에 있는 거울을 본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용서를 구했다. 나의 어깨 위에는 머리가 반쯤 짓눌린 윤희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눈을 굴리며 거울 밖의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가 흐르고 망가진 입을 덜덜 떨며 천천히 연다.
“태...우씨...구...해...줘...”
나는 천천히 주저앉는다. 윤희의 외침이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귀를 막는다. 그러나 소리는 멎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세 번씩 들려오던 노랫소리까지 나의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윤희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기억 속에서. 오히려 그녀는 더욱 더 크고 무서운 존재가 되어서, 나를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그러나 난 영원히 너를 떠날 수 없네
내가 달게 삼켰던 까만 열매를 꺼내버린 그 해부터
영원히 회색이 되어 돌아오는 앙상한 가을
난 소리내 울 수도 없었어 그래서 난 계속 살아
남은 너의 삶이 더욱 더 위험해 지내도록
칼을 쥐고 있던 그 손은 네 손이 아니라
바로 내 손이었어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
하드디스크 탐색모험하다가 예전에 쓴 글이 있어서 추억삼아 올려봐요
아이 풋풋해;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