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우화’는 동물을 사람에 빗대어 풍자하고 교훈을 주는 장르이다.
우화는 읽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 교훈에 다다르게 해준다. 등장인물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기에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불편하지 않게 받아드리고 교훈을 얻는다. 이러한 우화 방식은 과거에도 많이 사용했고 현재에도 많이 쓰이는 방식이다.
최근의 우화는 동물뿐 아니라 여러 사물체로 모습을 바꿔가며 현대 사회에 맞게 변화해 왔다.
최근에 들어서는 ‘아이로봇’이나 ‘이브의 시간’ 같은 자연적 존재가 아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이 인간의 모습에 빗대어 지는 경우가 잦다.
이렇게 생물이 아닌 사물로 우화를 만드는 것을 ‘가전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가전 소설들에 나오는 사물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로써 불완전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자신이 만들어낸 사회에서 부조화스럽게 삐걱대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어찌 보면 우리는 동물보다는 사물에 가깝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캐산 Sins는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신조인간 캐산’의 브랜드를 가져와 새로 만든 리부트 개념의 작품이다. 실제 세세한 배경 설정이나 추구하는 주제도 전혀 다르기 때문에 완전한 신작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캐산 Sins의 특징적인 부분중 하나는 뛰어난 작화의 스타일이다. 오쟈마녀 도레미의 작화를 맡은 우마코시 요시히코가 캐산 sins의 작화 담당을 하게 되었다.
굵고 거친 선과 감각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색감은 기존 애니메이션의 작화와 그 궤가 다르기에 캐산 Sins를 자세히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
시나리오는 가면 라이더 헤이세이 시리즈의 메인 작가로도 유명한 코바야시 야스코가 맡았다. 이미 여러 작품에서 작품성을 인정 받은 시나리오 작가의 작품인 만큼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애니메이션적인 노하우가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작품 내내 일관되게 한 가지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캐산 Sins의 주제는 ‘생명 예찬’ 그리고 ‘Well-die'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그리고 캐산 Sins가 방영되던 시기인 2006년쯤에는 최근 문제가 되는 고령화 사회와 맞물려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아닌, 행복하게 죽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Well-die‘는 얼핏 보면 허무주의에 근간하는 것처럼 보이나 ’Well-die'는 어디까지나 행복하게 ‘살기’위한 것이다. ‘Well-die'는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재확인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어느 로봇보다도 아름다운 '신조인간' 캐산, 그는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루나를 살해한다.
내 이름은 캐산.
루나, 난 널 죽이겠다.
본 작품의 주인공 ‘캐산’은 태양이라 불리는 ‘루나‘를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로 캐산은 루나를 죽일 당시의 기억을 잃게 되고, 모두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루나'의 소멸로 인해 세상은 멸망에 치닫게 된다. 영생을 살던 로봇들은 몸이 부식 되면서 서서히 죽게 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어찌되었건 태어나서 계속 살아가기만 했던 로봇들에게 느닷 없이 '끝'이 찾아 오게 된다. 강대했던 브라이킹 보스의 '로봇 제국'마저 무너지고 자신들을 만들어낸 인류는 이미 자신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다.
기억을 잃은 캐산은 어느새 황무지를 떠돌게 되고 ‘캐산을 먹으면 멸망을 멈출 수 있다.’는 괴소문에 홀린 다른 로봇들을 피해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멸망에 무너져가는 로봇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캐산을 먹어라.
캐산의 불행은 그 주변까지 스멀스멀 찾아온다. 멸망을 멈추고 싶으 로봇들은 캐산을 습격하고 캐산은 본능적으로 그들과 충돌한다.
그리고 그 충돌속에서 원치 않는 희생자가 나오게 되고 캐산은 절망한다. 멸망이 찾아온 절망의 세계를 여행하는 캐산은 자신이 누군지, 왜 루나를 죽여만 했는가를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악의를 끌어 안고 고행의 순례를 시작한다.
계속 영광을 누리리라 생각했던 문명은 멸망해갔다.
적응이 느린 놈들은 진작에 죽었지.
힘이 있는 놈들도 더욱 힘 있는 놈에게 먹혔어.
도망치고 계속 도망치던 난
종착지는 어디지? 난 어디로 도망친거지?
뭘 위해서? 살기위해?
뭣 때문에 살지? 도망치기 위해서인가?
그럼 난 도대체 뭐야!
그런건 아무도 몰라.
‘캐산sins 제 3화‘ 중
캐산을 추격하는 로봇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죽음에 쫓겨 다니며 어찌보면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는 ‘캐산’의 몸을 먹기 위해 그를 습격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캐산에 대한 분노는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세상을 파괴한 캐산, 그를 죽이면 멸망을 가져온 자를 처단할 수도 있고 자기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는 구원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절망속에 캐산은 죽지도 않으며 멸망의 징조도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순백의 꽃이다. 그런 캐산을 보며 그를 증오하고 부러워하며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그들에게는 마지막 안식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봇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차피 찾아 올 죽음이라면 막을 수 없는 ‘멸망’이 자신에게 찾아 올 때까지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 들이고 조용히 최후를 기다리기도 한다.
캐산을 좇으며 남은 시간을 헛되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르는 남은 '삶'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로봇들은 영원한 삶에서 벗어져 나와 죽음을 맞이한다. 로봇들에게 그것은 비일상적인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들이다. 로봇은 죽음을 모르지만 우리들은 죽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역시, 저 로봇들 처럼 내려진 축복을 그저 받을 뿐이지 그것에 의미를 찾아내진 못하고 있다.
태양이 내려쬐는 햇빛은 과연 우리에게 내려진 '축복'일까? 태양은 우리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햇빛을 내릴 뿐이다.사실 캐산 Sins의 스토리텔링은 완벽하지 못하다. 실제로 몇몇 구성들은 보는 이를 의아하게 만들 뿐이었고, 방대해 보이는 세계관이나 인물간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못한 채로 끝나기도 했다.
특히 23화와 24화로 엇갈려져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엔딩은 당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엔딩의 지지도 역시 양분되어 논란이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두 엔딩에는 각각의 가치가 존재한다. 감독이 생각하는 끝맺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 해 보는 것도 이 작품의 묘미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캐산 Sins는 자신이 전하고 싶어 했던 중요한 주제는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는다.
딩-동- 딩-동- 이 곳에는 종이 있었어요. 아름다운 소리를 울려퍼트리는..준비된 2개의 엔딩중 어느 것을 선택 할지는 순전히 작품을 보는 사람의 몫이다. 감독은 선택지를 마련하였고, 캐산은 그 선택지를 향해 걷고 있다. 그의 순례는 이제 시작되었다.
그를 따라, 그와 함께 '결말'을 선택해보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