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욕실 안에서 콧노래까지 부르며 느긋하게 씻고 있었다. 난 차마 씻지도 못하고 TV만 보면서 녀석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녀석은 말이고 나는 사람이다. 동물로 따지자면 녀석은 암컷이고 나는 수컷이다. 그런데 말 암컷이 사람 수컷보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일까..? 플라토닉한 것 말고, 에로스적인 것. 이런 생각을하니까 마치 철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똑, 똑.'
욕실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문 열어달라는 것 같았다. 문만 열고 닫고 할 수 있으면 완벽할텐데...
문을 열어주자 수증기 가득한 욕실에서 향기로운 샴푸냄새와 바디샤워냄새가 과하게 밀려나왔다. 세상에.. 그 조그만한 몸으로 얼마나 쳐발라 쓴건지 모르겠다. 더 가관인 것은 이 녀석이 두른 수건이었다. 마치 내 동생처럼 머리를 수건으로 하나 감싸고, 몸뚱아리 하나 감싸고, 수건 하나는 자기 발을 깨끗하게 닦았다. 세상의 모든 암컷은 다 똑같구나. 저놈이 수컷이었으면 수건 한장이면 됐을까...?
녀석의 젖은 머리를 보니, 헤어드라이기가 필요할 것만 같았다.
"헤어 드라이기 쓸래?"
그러자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선 끄덕끄덕 거렸다. 자기가 무슨 공주인줄 아는가보다. 난 노예근성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저정도 수발이라면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그냥 그러러니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헤어드라이기를 꺼내 전선을 연결하였다. 난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리 와."
그러자 녀석은 경계했다. 아까 그 일때문에 내 신뢰도가 많이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야한 짓 안할테니까 오라고."
이렇게 말하고나서야 녀석은 마지못해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녀석이 내 옆에 앉자, 나는 녀석을 들고 내 무릎에 앉혔다. 갑작스런 행동 때문에 놀란 녀석은'무슨 짓이야!' 이러는 것처럼 나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헤어드라이기를 강으로 틀고서 녀석의 머리를 말리자, 녀석은 곧 진정했다. 아니 정확히는 갈기일 것이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향기도 무척 좋았다. 여자 특유의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문득,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를 보니까 엄마였다. 난 녀석에게 "네가 해" 이러고서 헤어드라이기를 끄고 거실로 나왔다.
"여보세요?"
"아까 왜 전화 안 받았어? 그리고 너 왜 전화 안했어?"
엄마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뭣 좀 하느냐고.. "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거리며 사정을 설명해보려했지만 엄마는 나의 기회를 단 한마디로 빼앗았다.
"수연이 경찰서 갔었다."
이 한마디는 내 어떤 구차한 변명도 막아버리는 최고의 방어막이었다.
"엥? 왠 경찰서?"
"수연이가 학교 친구들이랑 싸워갖고 글쎄..."
"친구 아니라고!"
혜진이의 말이 고스란히 들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크게 소리친 것 같았다.
"그래가지고 너보고 대신 보호자로 가달라고 하려 했더니만 전화도 안 받고... 이 어린 것이 너 기다리다가 다른 애들은 다 나갔는데 보호자가 안와서 여태 기다리고 있었덴다."
"아.. 죄송해요. 수고끼쳐드려서.. 수연이좀 바꿔주세요."
전화가 넘어가는 소리는 들렸는데 그대로 툭, 끊어지고 말았다. 나한테 어지간히 열받은 모양이었다.
방을 확인해보니, 녀석이 헤어드라이기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어디서 빗과 손거울도 찾아서는 그것으로 자기 얼굴을 보며 예쁘게 빗질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곧장 내 방 침대에 엎어져 누웠다.
"으어.. 나 왜 이렇게 일이 꼬이냐...."
영화 속 주인공처럼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하고 싶었지만 녀석이 하는 행동때문에 순간 멈칫했다. 녀석이 내 비싼 스킨이랑 로션 뚜껑을 열고서 냄새를 킁킁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그거 안돼!"
그러자 녀석도 ;어차피 안 쓸거야.' 이런 표정으로 뚜껑을 닫고서 제자리에 갖다두었다. 물론 이것도 마법으로 했다. 그러고선 내 책상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공책을 하나 빼더니 깨끗한 부분을 찾아서 넘겼다. 그리고 앞발로 뭔가 그리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림 그린다고?"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렇게하면 녀석과 소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녀석.. 인정하기 싫지만 나보다 머리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볼펜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을 마법으로 들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서 난 그것의 뒤뚜껑을 누르고 볼펜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었다. 녀석은 그것이 무척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까 주었던 라면을 봤을 때랑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저 암컷은 뭔가 신기한 것을 보면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볼펜심을 나오게 했다가 들어가게했다가 하며 딸깍딸깍 거리는 소리를 몇 번 내보더니 마음에 들었다는 듯,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난 순간 소리지를 뻔했다.
"글씨도 쓸 줄 알아?"
말 못하고 문 여는 것 빼고는 다 한다. 무척 대견한 녀석이었다. 이런 능력이 발견 될수록 녀석의 몸값이 상승될 수 있으니 무척 신이 났다. 녀석은 이렇게 썼다.
'내 이름은 '야!'가 아니고, 레리티야. 앞으로 레리티라고 불러줘.'
소녀들의 글씨처럼 무척 애교스럽고 예쁜 글씨였다. 마치 여고생에게 편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내 이름은 시윤이야. 그런데 너, 어떻게 거기 있었던 거야?"
녀석에게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어째서 그곳에 버려져 있었는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가 어째서 현실로 튀어나왔는가. 녀석은 곧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기억이.. 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