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盧 대통령 정부조직개편안 관련 기자회견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차기 정부 인수위의 정부조직개편안에 관해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내용과 절차가 타당한가 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현 정부가 무조건 협력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내용에 관하여 인수위에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부조직 개편의 논거가 무엇이지요?
우리 정부가 큰 정부입니까? 크다면 세계에서 몇 번째나 큰 정부입니까? 공무원 수, 재정규모, 복지의 크기, 각기 세계에서 몇 번째나 큰 정부인지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 부처를 합쳐서 대부처로 하는 것이 작은 정부 하는 것입니까? 대부처 하는 나라에는 한 부처에 업무별로 여러 담당장관이 있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수의 정무직이 있어서, 정무직의 수가 부처 수의 여러 배가 되는 나라가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까? 장관 혼자서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나중에는 우리도 다시 그렇게 가게 되지 않을까요?
대부처로 합치면 정부의 효율이 향상되고 대국민 서비스가 향상된다는 논리는 사실입니까? 그래서 대부처 하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이고 소부처 하는 나라는 못사는 나라입니까? 대부처 하는 나라는 선진국이고 소부처 하는 나라는 후진국입니까? 그렇게 검증된 것입니까? 인수위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까?
위원회가 적은 나라가 선진국입니까? 위원회가 없으면, 학계, 업계, 시민사회의 전문지식과 여론을 수렴하고, 토론을 통해 타당성을 검증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정책의 오류와 장애를 줄이는 일은 어디에서 하지요? 새 정부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지는 것인가요? 대통령 혼자 다 하는 것인가요? 그래도 민주주의가 되고 효율적 행정이 되는 것인가요?
조직개편에 드는 비용은 얼마이고, 업무 혼선으로 인한 행정력 손실은 얼마인지 분석해 보았습니까?
정보통신부는 언제, 왜 생겼는지 아십니까? 한국의 정보통신 기술과 산업은 지금 세계 일류 수준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정보통신부가 없었더라면 우리 정보통신 기술이 세계 일류가 되었을까요? 앞으로 정보통신부가 없어져도 우리의 정보통신 기술이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교육부가 없어진다고 하더니 나중에 보니 과학기술부가 찢겨서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과학기술부는 언제,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과학기술부가 생기고 나서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분석해 보았습니까? 참여정부가 왜 과학기술부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고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이나 해보았습니까? 지금 한국의 과학기술혁신체계가 국제적으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성부가 왜 생겼고, 그것이 왜 여성가족부로 확대 개편되었는지, 그 철학적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까? 보육과 가정교육의 중요성, 가족의 가치를 살려보자고 여성부의 업무로 해 놓은 것입니다. 여성부에서는 귀한 자식 대접 받던 업무가 복지부로 가면 여러 자식 중의 하나, 심하면 서자 취급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통일부는 지키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켜지겠지요. 그러나 통일부의 업무가 정치적 상징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중요한 점이 있어서 한 마디 보태겠습니다.
통일부는 북한을 잘 알고, 외교부는 국제관계와 미국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5년 내내 통일부와 외교부는 북핵 문제나 남북 협력, 북한 인권 등의 여러 문제에서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참여정부에서는 청와대가 이를 조정했습니다.
두 부처가 합쳐지면 부처 내에서 장관이 이를 조정하게 될 것입니다. 장관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과연 이런 사안이 부처내의 조정업무, 장관급의 조정업무가 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기획예산처가 독립하고 나서부터 문화, 환경, 노동, 인권, 복지 예산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경제 분야 예산을 넘어 섰습니다. 이제 예산 기능이 경제부처로 들어가면 예산 구조가 어떻게 변화할까요?
경제부처는 경제계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부처는 시민적 권리를 대변합니다. 그런데 부처간 협의를 해보면 언제나 경제부처의 목소리가 사회부처의 목소리보다 컸습니다. 좌파라는 소리를 듣는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론, 정계 모두에서 재계의 목소리, 경제논리가 큰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사회부처 예산이 계속 증액되어온 것은 예산 기능이 경제부처로부터 독립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산 기능이 경제 부처로 통합되면 예산구조도 다시 변화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예산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위원회도 없어져서는 안 될 위원회가 많습니다. 한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여러 지역,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균형발전특별회계 사업을 심의 조정하고 예산을 배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은 어느 특정 부처의 사업이 아니고 모든 부처에 다 걸리는 일인데 균형위를 없애고 나면 어느 부처에서 이런 일을 할 것입니까? 균형발전정책은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 아닌가요?
인권위원회도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하는 것이 맞는가요? 이번 개편안에 대해 왜 국제인권기구가 대한민국 인권보호의 퇴보이며 독립성에 심각한 우려가 있다고 했을까요?
질문을 하자면 더 할 것이 많지만 이 정도로 하고, 절차 문제에 관해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45개 법안을 고치는 일입니다. 우리 정부의 조직과 기능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폭적이고 전면적인 개편입니다.
정부조직법은 전면 개정이고 나머지는 일부 개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부 개정이라는 법안도 그 법 자체를 무력화하는 조항의 개정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만들 때는 많은 토론을 거치고 국회를 통과한 법들입니다.
참여정부에서 수년에 걸쳐 공들여 다듬은 정부조직에 대해 인수위 출범 20일 만에 개편안을 확정하고, 이를 불과 1∼2주 만에 국회에서 처리하자고 합니다.
이처럼 큰 일이 정말 토론이 필요 없는 일입니까? 이 정도는 우리 국민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문제라서 토론이 필요 없는 것입니까? 국민들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까?
우리 언론은 제가 질문한 내용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질문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까?
우리 국회의원들은 다 알고 찬성하고 있는 일일까요? 그래서 토론도 하지 않고 통과시켜 달라는 것인가요?
국민들이 선거로 대통령을 뽑아 주었으니 이런 문제는 물어 볼 것 없이 백지로 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지난 5년 동안 한나라당은 그렇게 했습니까? 대통령 뽑아놓고 또 국회의원을 뽑아 국회를 구성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민주주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바쁠수록 둘러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충분한 토론을 거치고 문제가 있는 것은 고치고 다듬어서 국민과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또 실수를 줄이는 길입니다.
사리야 어떻든, 물러나는 대통령이 나서는 것은 새 정부 발목잡기이니, 그러지 말고 산뜻하게 떠나라는 언론의 충고를 들었습니다. 말이야 좋은 이야기입니다.
언론이 제대로 토론의 장을 열고 있다면, 그리고 국회가 미리 잘 대응하고 있다면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처 통폐합이 단지 앞에서 말씀드린 일반적인 정책의 문제라면 떠나는 대통령이 굳이 나설 것 없이 국회에서 결정해 주는 대로 서명 공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것이 참여정부가 공을 들여 만들고 가꾸어 온 철학과 가치를 허물고 부수는 것이라면, 여기에 서명하는 것은 그동안 참여정부가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바꾸는 일에 동참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떠나는 대통령이라 하여 소신과 양심에 반하는 법안에 서명을 요구하는 일이 당연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참여정부의 정부조직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고, 민주적이고 신중한 토론 과정을 거쳐 만든 것입니다. 굳이 떠나는 대통령에게 서명을 강요할 일이 아니라 새 정부의 가치를 실현하는 법은 새 대통령이 서명 공포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성가족부, 과학기술부는 참여정부가 철학과 전략을 가지고 만든 부처입니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는 참여정부의 핵심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예산처는 그 동안 탑다운 예산제도를 도입하여 재정운용을 합리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예산, 미래를 위한 예산을 늘려 왔습니다. 이것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정보통신부는 국민의 정부 이전에 생긴 것이어서 철학을 말할 일은 아니지만, 훌륭한 성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부처들을 통폐합한다는 것은 참여정부의 철학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의 요구를 거론한 것입니다.
국회가 하는 것을 보고 말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국회에 맡겨 둘 일이지 대통령이 왜 미리 나서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도 정치권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습니다. 보도도 살펴보고 사람들에게 물어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통일부와 여성부 존치를 주장하고 있을 뿐, 다른 부분은 대체로 ‘부처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인수위원회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부분적 기능 조정을 모색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을 살리고자 여성가족부를 재편하고, 국가과학기술체계를 정비하고, 과학기술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과학기술부를 재편한 사실이나,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핵심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균형발전특별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산처가 독립부처로 존재하는 것이 진보의 가치와 정책을 실현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작은 정부론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인지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작정 믿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참여정부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넘어왔을 때, 그때 재의를 요구한다면 새 정부는 아무 준비도 없이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만 믿고 새 정부 구성을 준비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그야말로 발목잡기를 했다고 저에게 온갖 비난을 다 퍼붓겠지요. 그래서 미리 예고를 한 것입니다.
인수위에 충고합니다. 인수위는 법에서 정한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인수위가 부처 공무원들에게 현 정권이 한 정책의 평가를 요구하고, 새 정부의 정책을 입안하여 보고하라고 지시 명령하는 바람에 현직 대통령은 이미 식물 대통령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인수위의 권한 범위를 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공무원이 장래의 인사권자에게 부당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여정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일, 그것도 공무원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는 일은 새 정부 출범 후에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현직 대통령의 지휘를 받아야 할 공무원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일입니다.
새 정부가 할 일은 새 정부에서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아무쪼록 국회가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정부조직개편안에 대해 책임 있게 논의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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