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문을 열었습니다. 제 자취방 특유의 그리운 냄새가 났습니다. 매일 맡던 냄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요?
"아..." "음..."
저희 둘은 문 앞에서 한동안 머뭇거렸습니다. 들어가야 할까.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걸까. 비록 지수가 믿는다고 얘기를 해주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망설여 졌습니다. 왠지 지금 발을 들여 넣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들어... 갈까요?"
조심스레 입을 여는 지수. 그녀도 바짝 긴장했는지, 고개를 살짝 내리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볼이 발갛게 붉어졌더군요...
"그래...; 가자."
저렇게 추워하는(?) 모습을 보니 더이상 여기 있으면 안돼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차피 갈대도 없잖아' 라고 자기를 합리화 하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한발자국... 이젠 밖에 있는게 아니라, 안으로 오게 됐네요.
쿵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려서 깜짝 놀랄 뻔 했습니다. 원래 문 닫히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어둑한 방 안에 들리는 건 그녀와 나의 숨소리 뿐... 분명 그렇게 밖에 들리지 않는데도, 제 귀엔 마치 제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후... 진정하자. 진정해. 그냥 잘 곳이 없었던 거니까...! 아까 까지만 해도 이 방에 단 둘이 같이 있었잖아!"
하지만 그땐 잡생각이 많아서 이렇게까지 지수를 의식하지 못했었죠. -_-; 뭐 어쨋든, 전 익숙하게 몇 걸음 움직여서 방 안에 불을 켰습니다. 그제서야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고, 저희 둘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 "어..."
밝아지자 마자 제일 먼저 지수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수도 똑같은 마음 이였을까요? 저희 둘은 눈이 마주쳐 버렸습니다. 그리곤 바로 둘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죠.
"오빠... 얼굴이 빨개요..." "어...; 너도 그렇내."
지수는 얼굴이 굉장히 달아올라 있었는데, 아마 저도 그랬나 봅니다. 지수는 그렇게 뻘쭘히 있다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푸하하... 귀여워요. 저도 그래요?" "어...; 어. 너도 그래. 많이 추운가보다."
귀엽다고? 평소에 듣기 힘든 말을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들으니까 기분이 마구 좋아지면서, 한편으론 굉장히 당황스럽더군요. 여기서 얼굴이 더 빨개지면 안돼니까요! 그래서 전 얼굴이 빨개진 이유를 '추워서 그럴꺼야!' 라는 듯 말을 돌렸습니다.
"네, 춥긴 춥내요..." "응."
제가 그렇게 확신시키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는 픽 하고 웃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알면서도 받아주는 것 처럼요.
그렇게 둘다 움직이지 않고 말만 했습니다. 신발을 벗지도 않은 상태.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넘는 그 턱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높게만 보일까요. 모든 일 하나하나가 너무 긴장됩니다.
제가 엉거주춤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아무 벽에나 기대어 서 있으니, 그녀도 그제야 신고있던 어그를 벗고 들어왔습니다. 평소엔 의식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날은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봤습니다. 생김세와 옷차림 부터 시작해서 동작 하나하나 까지...
어깨를 조금 넘기는 머리에, 상의는 제가 입던 패딩... 그리고 그 아래로 살짝 보이는 긴 가디건, 그리고 다리엔 레깅스... 그녀는 조심스레, 소리가 나지 않게 턱을 넘어서 올라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 시선이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돌리는 그녀. 그런 모습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긴장이 되는지...
그녀는 방 안에 들어와서 제 옆에 기대어 섰습니다.
"앉을까?" "네..."
둘다 스르륵 기대있던 벽을 타고 내려와 앉았습니다. 그러곤 한참동안 서로를 의심하며 침묵; TV라도 켤까 했지만, 왠지 더더욱 대화가 없어 질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화재라도 던져볼까 했지만 딱히 화재도 없고; 뭔가 먹자고 얘기를 해볼까 해도 아까 맥주랑 안주 잔뜩 먹은데다가, 무엇보다 집에 음식이라곤 사망이 우려되는 무 하나 -_-;
그렇게 이 침묵을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하나씩 생각해 봤지만, 그게 전부 하나씩 막혀갈때마다 전 절망감을 맛봤습니다. 이 깔려죽을 것 같은 침묵을 어떡게 하지;
그렇게 고민하다가 시계를 보니 1시 반. 기숙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한 20분 걸리니까, 적어도 1시간은 이렇게 말 없이 있었던 것. 결국 그렇게 1시간이나 고민한 끝에 제가 꺼낸 말은...
"늦었내;" "네;" "잘래?;" "그래요; 그러면;"
저것 -_-; 근데 말하자 마자 아차 싶더군요. 자리를 깔려고 농을 열었는데, 보이는건 깔이불 1개. 덮는 이불 1개. 위로는 전혀 안돼지만, 배게는 2개 더군요.
지수도 그걸 봤는지, 까는 이불과, 덮는 이불을 그냥 각각 하나씩 덮고 자자고 얘기를 꺼냈습니다. 하지만 남자된 녀석이 어떡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전 "괜찮다"라 말하고 그냥 이부자리를 폈습니다.
"자. 끝."
그러자 머뭇거리는 지수.
"저, 저기... 그래도 이건 조금 빠른데, 생각할 시간을..."
어??? -_-?;;;;;;;;;;; 뭐? 무릎을 살짝 굽히고 엉덩이를 살짝 빼며 양손을 꽉 마주쥐는 지수; 전 "난 괜찮다" 라는 의미로 말했는데, 아마 저쪽에선 "같이 자도 괜찮아." 라고 해석한 걸까요.
잠깐만 지수야, 상황이 왜 그렇게 되 -_-; 난 그냥 너 자라고 깔아준거야!;
"자, 잠깐만?; 그게 아니라..." "그래도...!"
왠지 전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닿고는 당황하게 크게 소리쳤습니다.
"아, 아니! 니가 여기서 자라고!"
그러자 "네?" 하고 반문하는 지수.
"난 그냥 나가서 잘 테니까 -_-;;"
그래. 아마 지금 지수가 입고 있는 패딩을 되돌려 받아서(미안해, 그게 제일 따뜻한 거야), 꽉 껴입고 건물 구석에서 자면 되겠죠. 저 녀석 구입하느라 굉장히 고생했으니, 비싼값을 해주겠죠.
"아뇨; 괜찮아요. 그러지 마요. 제가 괜히 이상하게 해석해 버려서;" "아냐. 내가 불안해 -_-; 내가 그냥 나가서 잘께."
역시 그래도 여자애랑 같은 방에서 자는건 절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냥 나간다고 말을 했지만, 지수가 안됀다고 하더군요.
"안돼요;" "아냐; 나도 안돼. 나갈께." "그냥 안에 있어요." "아냐, 나간다니까."
그렇게 몇번 공방을 주고받자 누그러 진 듯 작게 말하는 지수.
"안돼요. 춥잖아요... 감기 걸리면 어떡게 해요..." "..."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나가면 죄인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하긴, 제가 밖으로 나가서 자면 지수도 미안하겠죠. 지수 입장에선 제 방을 뺏어 버린게 되니까요. 그래도 제가 분위기를 못참겠어서 나가려고 하니까 지수가 제 옷소매를 붙잡았습니다.
"가지마요..."
팔만 앞으로 당기면 뿌리 칠 수 있는 작은 힘...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무슨 바이스에 껴 버린 것 마냥 움직일 수가 없더군요...
"..." "같이 있어요..."
결국 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 이불 사용 건으로 둘이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제가 고집을 부려서 결국 지수가 이불 안으로 들어가고, 전 벽에 기대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등.
불을 끄자 깜깜해 지더군요. 보이는 거라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밝은 달빛뿐. 창 밖으론 아직도 함박눈이 내리고 있내요.
전 달빛이 절 비추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몸을 옮긴뒤 눈을 감았습니다. 분명 늦은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잠은 오질 않더군요.
코 끝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냄새. 마치 메론을 입에 한가득 베어 물은 듯 신선한 향 이였습니다. 전 그 향기를 탐하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습니다. 마치 폐가 청량해 지는 것 같은 착각. 하지만 그녀 쪽에선 한숨으로 들렸을까요, 근심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많이 추워요...?" "괜찮아. 하하."
전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미안해요..." "아냐. 안깨운 내 잘못이지 뭐." "그래도..." "됐어, 됐어. 그냥 거기서 자."
그러자 그녀는 조용히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고요한 가운데 서로의 숨 소리만 들리길 잠시. 다시금 그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빠... 저기요..." "응. 왜?"
어차피 잠도 오질 않았기에, 별로 상관 안한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내가 일부러 늦게 일어난 거라고 말하면 화낼꺼에요?" "음? 뭐라고?" "아니, 아니에요. 그냥 못들은 걸로 해요." "아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분명 뭔가 머리가 하예질 정도로 굉장한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음..."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고민하다가 말했습니다.
"사실 저 그때 일부러 늦게 일어났어요..." "하...?"
도대체 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잘 모르겠어요..." "그럼 너 고백하고 나서 만약 제대로 안 됐으면 어떡게 하려고 했었는데?" "..."
설마 이녀석 계획도 없이 분위기에 이끌려서 대형 사고 친건가 -_-;
"미안해요... 그냥 같이 있었던 시간이 너무 좋아서... 말 하기 싫었어요..."
조금 우습더군요. MT때 여우같은 계획-누군가 말한 것을 그대로 인용해서-을 다 세워놓고 그것도 실행에 옮겨놓은 녀석이, 이렇게 허술하게 나온거니까요. 하지만... 그런 모습도 왜 이렇게 귀엽지. 라고 까지 생각되니 다시 한번 피가 머리로 갑자기 몰리기라도 하듯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리고 뱃속에 불이라도 떨어진 양 배에서 기침이 크게 올라왔지만, 꾹 참아내고 아래로 다시 눌렀습니다.
"그래?" "네... 죄송합니다."
조용히 심호흡을 몇 번. 머리는 차갑게 식히고.
"근데 그걸 왜 말하는 거야? 말 안했으면 몰랐을텐데." "그냥... 말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마치 화분을 쏟아버린 어린아이 같이 말하는 녀석...
"뭐가 좋았길래 그렇게 자는 척 한거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랑 이렇게나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게 좋았어요..."
그 말을 듣자 머리 끝까지 뜨거워졌습니다. 저 말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은데 멈추지 않더군요.
"누워있는데... 머리 위로 좋아하는 사람 숨결이 느껴져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사실 꽤 오래전에 깼지만...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아... 정말 거짓말 안하고 성불 할 뻔 -_-;
"아냐. 지난 일이잖아. 괜찮아."
말만 저렇게 하고 있지 이미 속으론 쾌재. 당장이라도 가서 껴안아 주고 싶었습니다.
"화났어요?"
제가 속마음을 들키지 않게 말을 짧게 해서 무뚝뚝하게 보인걸까요. 지수는 이불을 푹 눌러썼습니다.
"아냐."
그러자 빙글 몸을 돌려서 엎드린뒤, 이불에서 고개만 폭 내미는 지수.
"정말요...?"
미치겠다. -_-; 젭라.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저 성불해 버릴 것 같습니다.
"응." "진짜죠...?" "어. 그래. 진짜야." "다행이다..."
그녀는 후아~ 하며 한숨을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이불을 살짝 걷었는데, 그러자 달빛 아래로 지수의 발그레 해진 얼굴은 빙긋 웃고 있더군요.
"고마워요." "뭐가?" "그냥요... 화도 안내주고, 나같은 여자 받아준 것도요." "고마울게 뭐가 있어? 화는 그냥 안나서 안난거고. 나도 너 좋아해서 그런건데."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텐데도 절 똑바로 쳐다보는 지수. 몇 초간 그렇게 쳐다보다가 빙긋 웃더군요. 절대 보이지 않을텐데도, 전 순간 귀까지 몽땅 빨개진채로 미소짓고 있는 제 모습이 보이나 싶어 고개를 돌렸습니다.
"왜 고개 돌려요?"
그림자 실루엣이 움직이자 반응하는 지수. 전 다시 마음을 가로잡았습니다. 절대 보이지 않는다. 절대 보이지 않을꺼야. 그렇게 다시 침착을 되 찾긴 했지만... 왠지 지수는 전부 다 솔직하게 풀어 놓는데, 전 정작 마음을 숨기고 있자니... 뭔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도 고개를 돌린채로-제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속 마음을 전했습니다.
남자가 부끄럽다는 부끄런 사실을 밝히는 도중에 너무 부끄러워서(말이 뭐 이래) 끝부분에 좀 삑사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지수가 푸하하 웃더군요.
"그게 뭐에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며 웃는 지수.
"푸하하하.. 그게 뭐에요 진짜.. 정말..."
그녀는 그렇게 잠시간 웃더니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정말요...?" "응. 정말 좋아해...;"
그러자 그녀는 푹 숙이고 잠시간 웃더군요.
"하하.. 하.. 하아.. 아..."
그리곤 어깨를 들썩이는 지수. 왜 저렇게 웃지 싶었지만, 왠지 가면 갈수록 웃음 하나 하나가 길어지기 시작하더니... 울기 시작하더군요.
"우, 울어?;" "아뇨... 그런게 아닌데, 우는거 아닌데.."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더군요. 그리곤 손가로 눈가를 닦는 그녀.
"좋은데 왜... 히끅. 눈물이 나죠... 하윽.."
그러면서 딸꾹질 까지 합니다.
"울지마...;" "네..."
그러면서 눈물을 닦는 지수. 전 그녀가 왜 우는지 잘 모르겠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더군요. 한번 눈물이 터져 버린 까닭이였을까요, 아니면 MT건으로 인해 너무 속에 혼자 앓은게 많았기 때문이였을까요...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있잖아요... 나 너무 불안했어요... 오빠가 고백 받아주긴 했는데..."
몇번이나 숨을 고르며, 말을 할때마다 히끅거리며 한 말이였지만.
"사실...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일방적이여서... 정말 오빠가 날 좋아하는지..."
추하고, 보기 흉하다는 느낌 보단. 정말 속에서 많이 쌓아두고, 고민을 한 것 같았습니다.
"아직 모르겠어서... 은하 누나때문에, 여자한테 실망해서... 아무 여자나 괜찮은건 아닌지..."
정말 밑바닥에서, 혼자만 골똘이 앓던 문제를 모조리 토해놓는 지수.
"정말 고백 받아줬지면... 너무 무서워서..."
그렇게 생각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말해주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맡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응... 알겠어. 많이 힘들었구나..."
그리곤 엎드려서 훌쩍이는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러자 안심했기 때문일까요... 엎드려 있던 아이가 일어서 앉아서 저한테 폭 안겨서 울더군요...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숨도 못쉬며 한참간 울었습니다... 아마 아까 제대로 말 하지 못해서 불안했던 것, 마저 토해내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안심 등 여러가지 것들이 있었겠죠. 그녀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속에 있던 죄책감과 불안감들을 토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