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확신범 [確信犯, aberzeugungsverbrechen]
도덕적, 종교적, 정치적 의무 등의 확신이 결정적인 동기가 되어 행하여진 범죄 또는 그 범인.
사회가 급격하게 변동하는 시기나 종교적, 정치적 사상의 급변기에 나타난다.
사상범, 정치범, 국사범(國事犯) 등의 범죄는 보통 확신범의 성격을 띠고 있다.
2.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슴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혀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 이광수,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사설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한때 독립신문의 주필이기도 했던 이광수가 앞장서 창씨개명을 한 직후 적은
변명의 글입니다. 이후 이광수에게는 항의와 욕설을 담은 편지가 천 통 넘게 날아들었고, 개중에는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있었습니다. 당시 그가 빗발치는 비난 때문에 어떤 '정신적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그의 친일 행적은 그 이후로 보다 적극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 중에는 때로 익숙하게 비판을 받아넘기는 수준을 넘어, 그 비판을 엉뚱하게도
신념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이렇게 맹렬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너희들을 봐라.
이런 야만적인 행동이야말로 오히려 내가 옳다는 방증이 아니겠냐"는 식의 논리일까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피해자처럼 포장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지를 - 영리하게도! - 먼저 깨닫습니다.
3.
배현진 씨는 제 입사 동기입니다. 옆에서 지켜본 그녀는 영리하고, 빠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그녀가 파업을 접고 올라가며 남긴 글을 보면서 의아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굳이 이렇게 공을 들여서까지 모두의 공분을 살 만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서
(대개는 비꼬는 의미로) 회자되는 "사실과 진실의 촘촘한 경계"가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배 씨가 올린 글을 몇 번이고 곱씹어 읽으면서 조금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 듭니다. 그녀는 확신범입니다.
딱히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범(犯)이라는 글자를 붙이긴 좀 심하다고 하면, 그녀는 - 앞서 파업을 포기한
그녀의 모 선배가 유행시킨 - "신의 계시"에 준하는 확신을 갖고 행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믿습니다. 더 나아가면 자신이 본 것'만'을 믿고, 다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의심은 건강한 생각의 방식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인이고, 말글과 생각을 밥줄로 하는 언론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지 않는 것을 의심하려는 태도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보지 않겠다는 아집으로
변질된다면 참으로 곤란한 일입니다.
배 씨가 거듭 강조한대로 뉴스데스크의 앵커직을 성실히 수행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써 준
앵커멘트만 앵무새처럼 읊지 않기 위해 기사도 꼼꼼하게 읽어보고, 기자들을 찾아와 물어도 보며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고자 했던 모습 보기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다음과 같은 그녀의 말이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저는 뉴스 앵커로서 편집회의에 참석하고 아이템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앵커 멘트를 직접 작성합니다.
적어도 저희가 외압에 굴복해 불공정 보도를 했다면 '그냥 그런 것 같다. 마음에 안 든다' 정도가 아니라
'어느 날, 어느 뉴스' 등의 실증적인 사례를 들어 사죄드려야 합니다."
그토록 성실하게 편집회의에 참석하고, 아이템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앵커 멘트를 작성하면서 정말
배 씨는 그동안 어떤 문제점도 느낄 수 없었을까요? 비록 직접 취재하지는 않더라도 하루에도 수 십 개의
기사를 거치면서 조금의 불합리함도 감지하지 못 할 정도로 둔감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판단한다는 달콤한 오만이 그녀의 '촉'을 무디게 만들었는지 저로서는 쉽게 결론짓기 어렵습니다.
이번 파업에 돌입하기 몇 달 전부터 배 씨 자신이 매일 출근하던 보도국에서 벌어지던 문제 제기와
논쟁, '그냥 그런 것 같다. 마음에 안 든다' 수준을 넘어 빼곡하게 기록된 불공정 보도의 사례들은
여러 글에서 수 차례 언급되었기에 굳이 여기에 다시 베껴 쓰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며칠 전 그녀 스스로
읽었던 톱 뉴스, 권재홍 본부장의 피습(?) 관련 오보에 대한 배 씨의 생각은 참 궁금합니다.
최소한의 팩트 확인도 안 된 프로파간다를 톱 뉴스에 심자고 '편집회의에서 결정하고, 앵커 멘트를
직접 작성해' 방송한 자신의 입이 부끄럽지는 않은가요. 이보다 실증적인 사례를 들어 줄 자신은 없으니
이 쯤에서 거두도록 하지요.
4.
야당 인사들만 동참하는 노조 파업에 대한 안타까움, 저도 동감합니다. 지지와 응원을 실어 준다면
여당 뿐 아니라 정관계, 사회, 종교, 과학, 문화예술 가리지 않고 두 팔 벌려 환영할 분위기니까요.
배 씨가 글에서 '멘탈 붕괴', '충격과 박탈감'이라고 표현할 만큼 노조 사정이 어렵다면, 정치적인
이유로 사람 가려받을 처지는 애초에 아니지 않았을까요?
스스로 입사 이후 네 번이나 파업을 겪었다고 밝혔던 그녀가 이제 와서 뒤늦게 노조에 '정치색'이라는
빨간 페인트를 뿌리려 하는 건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리포트를 급조할 때,
선배 글의 그럴 듯한 부분을 억지로 발췌해 갖다붙여 놓으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딱 그런
수준이랄까요. '비노조원인 MBC 아나운서'로서 지금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보실 의향이 있으시면,
MBC 사태 해결에 관심을 가진 아는 여당 인사(가 있으면) 한 두 분 쯤 소개라도 부탁드리고픈 심정이네요.
배현진 씨는 말합니다.
"언론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의사 표현과 참여는 오로지 유권자로서 선거와 투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파업이 이 무게 중심을 잃고 있지 않나 우려됐습니다."
언론인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참여가 하나 더 있지요. '비판과 감시'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면허증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패가 있어서 비리를 때려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입 다물고 한 표만 던질 생각이라면 이런 시끄러운 일 대신 그냥 성숙한 시민으로 남아야 제격입니다.
권력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뉴스는 그냥 '휴일스케치'가 아닐까요. 물론 차라리 입 다무는게 낫지 싶은
용비어천가 식의 보도가 이어지는 상황은 더 큰 문제겠지만요.
'기계적 중립성의 함정'이란 말은 이제 고등학교 논술 시험에서도 이미 사골처럼 우려먹은 뒤라
안 들여다보는 소재라고 하니 길게 설교할 생각은 없습니다. 뉴스데스크 앵커직이 갖는 무게,
MBC의 간판이자 각종 홍보대사까지 역임하고 있는 자신의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 그녀의 말과
행동을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윗선의 압박과 불안 때문에 스스로 '적극적 전향'에
나설 만큼 저열한 수준은 아니리라 마지막 기대를 걸어 봅니다.
5.
어려운 얘기입니다. 노조 내에서 단합과 동력 유지를 위한 유무형의 압박과 폭력이 존재했다는
배 씨의 고발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든 과장이든 상관 없이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에서 못 한 어려운 이야기, 밖에서나마 이야기해 준 그녀의 용기에 감사를 보냅니다.
우리 모두가 완벽한 군자일 수는 없으며, 파업이 1백 일을 훌쩍 넘기면서 대의를 위해 놓치고 있는
것이 과연 없었는지 숙고해 볼만 한 좋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도 안 나가면서 집회에도 안 나가고
'농땡이' 치는 동료의 빈 자리를 보며 수군댄 적도 있을 것이고, 술김에 험한 말이 오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철면피같은 상대와 맞서면서 우리도 한치 흔들림 없는 '강철 대오'를 이뤄야 한다는 사명감이
누군가에게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느끼게 했다면 - 그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침묵에의 강요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맞서 일어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적 뜻의 공인은 아닐지라도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배 씨의 결정을 우리는 비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 소회의 수준을 넘어 공표한 그녀의 생각과 말은 충분히 비판하고 논쟁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수준을 넘어 잔혹한 말로 저주를 퍼붓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당성을 스스로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 기회를 발전적인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강요가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라는 배 씨의 시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법원이 노조의 압력 때문에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한 것은 아닐 겁니다. 연배 지긋한 비노조원 선배들이 후배들의 조인트(?)가
무서워 파업에 속속 동참하고 사장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도 아닐 겁니다.
이상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모든 것이 강요와 압력과 관성의 소산이라 규정하는 배 씨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실증적인 사례'이며, 배 씨가 얕은 생각으로 그녀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MBC를 욕보였다고 감히 비판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입니다.
사족.
광복 후, 이광수는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던 여성들을 '홍제원 목욕'이라는 지혜를 통해 감싸안았듯이
친일했던 사람들을 포용해야 한다며 변명하기에 급급했지만 끝내 차갑게 외면을 받았습니다.
날선 비판을 하든, 차라리 차갑게 무시하든 결국 배 씨가 남긴 흔적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얼룩으로 남았습니다. 파업이 끝난 뒤 어떤 모습으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articleId=1977393&bbsId=D115&pageIndex=3 이탈리아 "마리아 루이사 부시"와 MBC 배현진~!!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977139&pageIndex=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