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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됐다. 제1전선에 활약중인 정규군에 대한 지원 및 예비병력의 확보에 그 목적을 두고, 다음해인 1951년 1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50만명에 이르는 17~40세의 남성들이 제2국민병으로 징집됐다. 중공군 참전으로 전방의 전선이 급속도로 붕괴되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실행에 옮겨졌다.
적보다 더 무서운 내부 비리와 부패의 상징 ‘국민방위군 사건’의 시작이었다. 말 그대로 헐벗고 굶주린 ‘죽음의 행렬’이었다.
선전하는 국군의 활약상에 고무된 많은 청.장년들이 지원했고, 대다수의 지원자는 가족을 부양하려면 군인으로서 받는 혜택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후방에서는 출신지나 과거의 행적에 대해 주민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는 일들이 많아서 "대한민국"의 군인이라는 사실은 확실한 신원보장의 증명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들도 그들을 "죽음의 행렬"로 이끄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지원자 대부분은 피복류나 장비에 대한 보급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간단한' 일상복 차림으로 집결지에 모였다. 1950년 한반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해였다. 당시 국방부에서 발행한 식권을 가지고 지정된 집결지에 도착하면 내무부에서 식사배급을 지원하는 것으로 약속이 되었으나, 내무부와 국방부와의 마찰로 인해 식사 배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 지역에서 동일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마냥 걸어 갔다.
교전은 커녕 총을 집어든 적도 없이 추위와 배고픔, 질병으로 약 9만여명이 죽었다.
그리고 역사는 정규적 군사인력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국군 전사자 12만명중에 이들을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군수뇌부를 포함한 간부들은 23억 원(圓)의 예산과 쌀 5만2000섬을 빼돌렸음이 국회 진상조사 결과 드러났다.
나라가 힘들때를 이용해서 이런 자기배만 불리려는 자들은 항상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헌 등 5명은 사형이 선고받고, 그해 8월 12일 총살됐다. 재빨리 덮었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았다. 불편했던 진실이었으니까.
최근에 들어서야 이들에 대하여 '순국'이었음 인정했다.제한적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2003년 6월 13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천변에서 발굴된 44구의 국민방위군 유해 합동 영결식이 김일수 제주방어사령관 등 군장병과 유족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병 제6613부대 연병장에서 엄수됐다. 유해는 제주시 양지공원에서 화장한뒤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지난 50년의 세월동안 차디찬 강변에 이름없이 묻혀 있던 분들입니다. 이런 일을 한 것은 뉴라이트가 아니라 노무현입니다. 과연 좌파정권이 우리 순국선열들의 노고를 짓밟았었던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바로 이런 놈들이 뉴라이트 입니다.
최전선에서는 참전용사들이
골깨지고 피터져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뉴라이트 이놈들은 전쟁중에도
국민들의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는 것을요.
모든 재향 군인회와 6.25 참전용사님들은
뉴라이트에 대해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결코 우리의 6.25 참전 용사님들 아끼는 것
이 아니라...국민방위군 사건처럼 우리의 훌륭하신
참전용사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
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정녕 이들에게 국가를 맡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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