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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란, 파비안의 첫인상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처음엔 천정이 보였고 그 뒤 숙소의 건물 입구부터 어떤 시선으로 계단과 복도를 지나 순식간에 내 침대 앞까지 왔다. 곧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가 천정에서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다음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것은 나를 향해 순식간에 돌진해왔다. 동시에 투명한 보호막 같은 것이 나를 에워쌌고 그 무언가는 필사적으로 막을 뚫고 나에게 들어오려 했다. 영문은 알 수 없어도 이 갑작스러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순간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처럼 갑작스럽고 굉장한 코골이가 시작되었다. 내 상황보다 괴이한 그 소리는 나에게 달려들던 그것과 나를 지키던 막을 모두 조각조각 만들어 한순간에 가루로 날려 버렸다. 한동안 거의 없던 가위눌림은 왜 느닷없이 스페인에서 다시 시작된 것일까. 지난밤 축제 분위기를 잔뜩 마신 사람들의 코골이 때문에 깊게 잠이 들 수 없었는데 우습게도 그 소음은 나를 살렸다.
그대로 더 자는 것을 포기하고 짐을 싸서 나섰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어둠 속에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허둥지둥 뛰쳐나왔지만, 다행히 그 누구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다만, 급하게 나오다가 입구 옆에서 자고 있던 노숙자를 밟을 뻔했지만, 그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모두 평온한데 혼자만 부산스러운 것이 영 못마땅하고 억울하나, 답 없는 내 인생처럼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가늘게 떨어지는 달빛은 미처 산길까지 밝혀주지 못했다. 거대한 이 어둠 속에서 한 치 앞을 확보하기 어려워도 숙소 앞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기엔 지독한 노숙자의 체취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벼랑 아래로 떨어졌던 것처럼 천천히 어둠 속으로 걸었다.
하루에 20km 걷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 걸음은 무척 무겁고 작은 물집이 겨우 한둘뿐인데, 발끝과 뒤꿈치는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했다. 덜 마른 콘크리트 바닥에 빠진 두 발을 허우적대며 걷는 기분이었고 어깨에 이고 있어야 할 배낭을 양쪽 발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고 걷는 것 같았다. 오전 내내 걸었지만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하여 겨우 십여 킬로미터를 걸었다. 벤치에 앉아 배낭을 다시 싸며 버릴 만한 것을 찾아보지만, 마땅히 버릴 것이 없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치던 이안은 내 짐을 보고 혀를 찼다.
“와, 보따리장수 같아! 이것은 필요 없고 저것은 쓸모없네.
전부 여기서도 살 수 있는 것들인데 무슨 욕심에 그걸 다 짊어지고 다니는 거야? ”
영국에서 집시로 떠도는 삶을 사는 그로서는 나의 모든 물건이 한낱 짐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시간이 맞는데 이 물건들도 가지고 있으면 다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에 결국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짐을 쌌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이안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 없어서 아쉽고 필요했던 것과 선물까지 전부 챙겨 왔는데, 과거의 경험은 이미 사족이 되어 내 발을 잡아끄는데도 이 욕심들을 짊어지고 간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융통성 없이, 미련하게.
첫날 처음 인사하고 며칠을 보이지 않던 루카와 루카스가 멀리 보인다. 아니다. 이미 이안과 함께 점이 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안을 포함해 모국어 외에 외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마담 엘리자베스와 점이 되어 사라진 루카와 루카스, 5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내 기를 팍 죽인 나탈리를 제외하고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크고 많은 사람으로 복작거리는 서울. 그곳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사람이란, 포근하게 도시를 품은 안개처럼 겉보기엔 예쁘지만 가까이하면 상처를 입히고 입는 선인장과 다를 바 없고 밤낮이 없이 시끄럽다가도 막상 찾아오면 반갑지 않은 도시의 적막처럼 낯설고 두렵다.
서울 사람들은 연인이나 친구, 선배나 후배들도 모두 부부의 관계와 닮았다. 함께 하는 동안 그렇게 정겹던 사람들도 돌아서서 시야 밖으로 사라지면 관심도 애정도 함께 거둬간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사람이 많아지면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외려 인심을 잃어간다. 옆집에 독거노인이 조용히 숨을 거두고 앞집에 혼자 살던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모르고 제 삶을 사느라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다 느끼는 나도, 어쩌면 그런 많은 그런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먹고 자라나서 입을 막고 온몸을 둘러싼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점점.
며칠 대화라는 것을 제대로 못 해서 잡스러운 생각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익숙한 향이 바람을 타고 내 어깨 위로 넘어왔다. 아침에 보았던 그는 노숙자였다. 그는 노숙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순례자였단 말인가. 반가운 마음보다 놀란 마음에 어찌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그는 이미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하이, 부엔 카미노”
“어? 어.. 어! 하이. 너도.”
“그런데, 덥지 않아? 벌써 12시가 넘었다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그 긴 팔 재킷......, 괜찮아?”
“그러네. 진짜 덥네. 불 속에 이글이글 익어 가는 스테이크가 된 기분이야.”
“뭐라고? 그렇다면 재킷을 벗어!”
“아니야. 뜨거운 직사광선을 맞아 온몸이 따가운 것도 너무 싫고, 무엇보다 살이 타서 살갗이 벗겨지고 시커멓게 되는 건 더 싫어.”
“음....”
그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상과 다른 말을 하더라도 내게는 들을 여유가 없었고 듣기 싫은 말은 고작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자마자, 동시에 초인적인 힘이 생겼다. 길은 내리막으로 접어들었고 아기처럼 아장아장 걷던 발이 순식간에 바퀴를 달았다. 아니 날개였을지도 모른다. 먼저 간다는 짧은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배낭의 무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왜 긴 팔 재킷을 꾸역꾸역 입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납득시키는 것도 귀찮았지만, 강력한 서양인의 체취가 방금 뿌린 향수처럼 나부끼는 통에 그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아찔했다. 그 후로 한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야 하고 아프면 쉬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한 고독에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나마 몇 없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우리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에 좋든 싫든 언제나 친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다지 인자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던 어르신들 덕분에 그 발길이 오고 갈 때마다 잡음도 함께 들끓었으며 엄마의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그 아픈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기에 아버지는 표현이라고는 모르는 무뚝뚝한 남자였으며 그의 어깨를 누르는 부담은 당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웠다. 옛날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당신들도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고 가장이 되었으며 어른들도 부양해야 했다. 남편의 위로와 응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엄마는 눈물을 삼켜야 했고 삼킨 눈물들은 고스란히 마음에 쌓이고 쌓여 언제든 폭발하는 거대한 용암을 품은 화산이 되어있었다. 그럴수록 아빠는 더욱 일에만 매달렸고 자식들은 은근히 내버려졌다. 다행히 우리 중에 크게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이 없었으나, 사실 누구도 정상적인 마음인 사람이 없었다. 늘 배고팠던 것은 비단 우리의 뱃속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언제나 곪아있었고 사랑과 칭찬은 항상 부족하여 갈구하고 구걸하는 비렁뱅이였다. 내 동생도 그랬고 어떤 누군가도 그렇게 실수했듯이, 나 역시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의 갈증을 사랑으로 대신하려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기까지 십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첫사랑과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은 연달아 상처만 남겼다.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그 시작에 오류가 있었다. 운 좋게 몇 번의 사랑에 실패하고 내 문제점을 찾았으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나 스스로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것은 자각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온갖 심리학 서적과 자기계발서들을 읽고 또 읽었다. 온통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설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인을 알고 나니 그 후로는 어떤 사랑도 쉬이 시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본능은 언제나 해바라기처럼 사람들을 쫓았고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작은 상처에도 쓰러지고 무너져버렸다. 이런 속을 알 리 없는 사람들 눈에는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하는 변덕쟁이로 보였을 수도 있었고 수많은 소문과 오해를 생산해냈다. 그래서 다가오는 손은 냉큼 잡지만 선뜻 계속 잡고 있지를 못했다. 조금만 이상한 소문이 들리면 나보다는 그 사람에게도 상처가 될까 봐, 여자든 남자든 또 거리를 두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늘 피하는 이상한 꼴이 되었다. 그런 내 습관이 이 머나먼 스페인에 와서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벌써 며칠을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카페에서 커피를 시킬 때 외에는 누군가와 말을 섞어보지도 못했다. 한참을 걷다 인적이 드문 시골 성당에 다다랐다. 배낭을 내려놓고 한쪽 구석에 앉아 가만히 제대 쪽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모은 인자한 마리아가 보였고 그 주변으로 아기 천사들이 모여 있었다. 순식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리아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엔 발바닥부터 사지가 너무 쑤시고 아파서였던 것 같다. 그런 고통은 잠깐 쉬면 사라지는데 눈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들의 눈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려워 마주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그들 옆에 몸을 비비대며 서고 싶어 하는 내가 힘들었다. 무시하지도 그 속에서 어울리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갈구하는 모습을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복잡한 심정을 쏟아내고서야 겨우 다시 길을 나섰다.
발이 너무 아파서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아프다기보다 숨이 막혔다. 본능적으로 등산화를 벗었다. 양손에 등산화를 들고 그대로 걸었다. 등산화가 없는 양쪽 발이 바닥에 닿았고 그때마다 배낭의 무게가 발바닥을 짓누르며 지압하듯 앞으로 쏠렸다.
‘왜 꼭 등산화를 고집했던 걸까?’
고정관념을 버리면 다른 선택지를 더 얻게 되는데 간단한 원리를 이제야 깨달았다. 맨발로 걷다가 아프면 슬리퍼를 신으면 되는 문제였다. 그렇게 맨발로 걷다가 슬리퍼를 신고 걷다가 하면서 순식간에 십여 킬로를 걸었다. 멀리 작은 선착장이 보였다. 배를 타고 만을 건너거나 굳이 10킬로 정도를 더 걸으면 배를 타지 않고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푼 안 되는 뱃삯 때문에 고민하며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며칠 전 그 노숙자가 시끄러운 아저씨들과 함께 왔다. 나도 모르게 배낭을 들어 올렸다.
“안녕? 저기 배가 들어오는 거 같은데......”
“어. 나는 그냥 걸어가려고.”
“뭐라고? 걸어가면 몇 시간이나 더 걸려. 여기서부터 20km는 더 걸어야 해.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나온 객기였다. 아마도 시끄러운 아저씨들과 한배를 타는 것이 껄끄러웠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숙자도 반갑지 않았다.
“다음 배는 몇 시에 들어오는지 알아?”
“글쎄, 나는 그런 거 신경 쓰고 계획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금발에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노숙자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옷에는 간혹 작은 구멍도 있었고 베이지색 바지는 거의 회색에 가까웠으며, 다 찢어진 파란색 쓰레기봉투로 싼 통기타를 배낭에 둘러메고 보통 남자와는 다르게 매우 느릿느릿 걸었다. 수염을 얼마 만에 한 번씩 깎는지 볼 때마다 덥수룩했고 그것은 그가 더욱 노숙자처럼 보이도록 힘껏 돕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에도 빼곡하고 촘촘하게 자리 잡은 빛바랜 갈색 털들은 흡사 침팬지나 원숭이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에게는 정말 미안한 생각이었지만, 갈색 빛의 그것들이 빛에 반사될 때는 얼핏 금발 빛이 돌아 그나마 덜 지저분해 보였다. 이런 행색과 다르게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양인답지 않게 꽤 어려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를 관찰하던 내게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너 한국 사람이지?”
“어떻게 알았지?”
“조금 낯가리는 거나, 긴소매와 모자로 해와 싸우는 건 동양인 중에서도 유독 한국 사람이 많더라고.”
“그래? 나는 나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내가 수많은 사람을 스치고 만났지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해. 95%는 한국인이야. 그건 그렇고, 이름이 뭐야?”
“혜란. 공혜란 성이 공이야.”
“아. 헤이롼, 콩.”
쉽다고 생각했던 내 이름을 사람들은 의외로 쉽게 발음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노숙자는 정확하게 발음할 때까지 내게 교정을 부탁했다. 어차피 지금 보고 또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오늘 우연히 같은 숙소에 머문다 해도 오늘이 지나면 다시 볼일 없을 텐데, 구태여 이름을 외우겠다는 그가 사실 조금 귀찮았다.
“난 ‘파비안’이야. 반가워.”
그 노숙자의 이름은 외모와 다르게 꽤 세련되고 멋지게 느껴졌다. 그리고 계획 없이 떠돌며 자유로운 영혼인 그와 어쩐지 잘 어울리기도 했다.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출처 | 2011년 추억 소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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