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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패전방송이 나올것이라는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패전선언이 이루어지기 몇일전, 조선총독부에서 은밀히 재화를 가득가득 채운 배편을 일본으로 밀항시키려다 선적을 초과하여 배가 침몰직전에 이르는 상황이 발생. 급히 회황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4년을 끌었던 전쟁을 끝내는 항복이요, 36년의 압제를 포기한다는 선언이였다. 일본제국이 무너져내린 날이였다.
"만약 1분이라도 정전이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여러분들은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근무해야 한다."
- 패전발표 직후 을지로에 있던 본사로 뛰어간 경성(서울)전기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가, 정전이라는 상황에서 어떤 소요가 발생할지 모르니, 직원들을 챙기며 한 말.
"조선인이 이렇게나 많았나..."
- 식민지배 초기 공포정치시대를 지나, 문화통치(1920년대)이후에 조선으로 넘어왔던 일본인들은 대체적으로 조선민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대도시에서는 거주지는 물론 상업지역도 일본인 지역과 조선인 지역이 분리되어있었고, 일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특별히 접촉할 일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패전발표 이후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는 조선민들의 수에 다들 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 호즈미 신로쿠로.
"조국이 패전했다고.. 꼭 본토로 돌아가야 합니까?"
- 나카무라 기미(23). 충남 강경에서 근무하던 일인 경찰은 그렇게 부모님께 되물었다. 그는 일인이지만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자랐고 조선땅에서 근무를 하던 일인이였다. 본토는 대일본제국본영이라 말만 들었을뿐. 가본적이 없다. 이곳 충남 강경이 내 고향인데... 조국이 패전했다고 직장도 버리고 연고도 없는 본토로 가야한다는걸 23살의 청년은 이해를 할수 없었던것이기에 부모님께 그리 되물었지만, 그의 부모들은 강경한 어조로 그래야만 한다고 답할 뿐이였다. 나카무라는 조선에서 나고 자랐기에 조선이 일본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해본적이 없었고 그저 저선이나 본토나 다 똑같은 일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들에겐 조선은 조선일뿐. 일본이 아니였다. 더욱히 패전을 한 지금 일인경찰가족에게는 아주 위험한 곳이될 터였다.
"패전한 8월 15일 하루에만 은행의 지급준비액 20%가 사라졌다."
-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는 정신을 놓은것같은 예금출금요구에 17일날, "큰돈을 급하게 빼면 크게 위험할 수 있으니 예금은 언제든지 인출가능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직접 방송을 하기도 했지만, 재산을 빼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 귀에는 소귀에 경읽기 였다. 실제로 은행에서 돈을 인출해 귀가하다가 강도를 당하는 사례가 발생했지만 경찰서에 신고를 해도 "지금 우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드릴수 없다" 라는 답변을 받고 절망했다. -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항구로 향하는 귀환열차에 짐을 바리바리 들고 가던 사람이 넘어졌다가 그 짐의 무게때문에 도통일어나지를 못하는데, 눈길 닿는 곳 어디에서나 한히 보였다. 등에 짐을 지고 젖먹이 아이를 안은 아낙을 보니 씁쓸한 기운이 들었다. 십수년를 일군 재산의 말로가 고작 이것뿐이구나."
- 고타니 마스지로 인천일본인세화회장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소리도 잦아들고, 초기의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사람들의 머리도 다시 차가워졌다. "지금 일본으로 돌아가봤자 인생 20~30년을 이곳에서 보낸 우리들에게는 딱히 본토에 연고가 없다. 게다가 몇달간 계속된 대공습에 이미 폐허가 되지 않았나. 어쩌면 조선에서 살길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하는 일본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는 어린아이부터 백발성성한 노인들까지 빈자리를 찾기어려울만큼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모두 일본인들이였는데 선생으로 보이는 자가 단상에 올라 말을 이었다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말미암은 현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망연자실하여 넋놓고 있기보단,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새로운 조선에 우리도 협력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어 학당이 개설되었는데 희망자가 정원을 초과한터라 일주일만에 학급을 증설해야 했다. 이후 미군이 들어오고 치안이 더 안정되자, 본토로 돌아가지 못한 일인들은 더더욱 조선에 눌러앉을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부모님이 계신곳인데.. 그냥 그대로 두면 안되겠습니까..?"
-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시정을 장악한 조선인들이 일인 공동묘지를 정리하기로 하고 일을 진행했다. 부모님과 친인척들이 묻힌곳이라 어렵게 어렵게 조선인들을 찾아가 사정사정해보았지만, 조선인 인천시장은 "동경(도쿄)에 조선인 공동묘지가 만들어지면 당신들은 그걸 그냥 둘건가?" 라고 일갈하며 거절했다. 일인 묘들은 모두 수거되어 한곳에 매립되고 공동묘지는 정리되었다
"어이 거기 일본인! 여기 뜨거운 물 더 가져와!"
- 도코 요시마사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의 교장으로 있었으나, 패전이후 가족들과 조선에서 먹고 살려면 무슨일이든 해야 했기에 공동목욕탕에 취직을 했다. 조선인들은 꼬박꼬박 하대를 하며 놀려대거나 군심부름을 시켰지만 어쩔수 없었다. 평양시내에는 냉면가게나 술집에서 일을 시작한 일본인 여인들이 늘었다. 하얗게 분을 칠하고 소련진주군을 상대하는 그들을 로스케 마담이라 불렀다 - 고니시 아케오 세회협회 섭외부장
군정점령당국이 1946년 1월부터 일본인들의 부분적인 상업행위를 다시 허가했다. 잡화를 팔거나 하는등의 일본인 보따리 상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으나 쉽지는 않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신이 과거에 가르치던 조선인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는 선생님도 있었다. 곽산 소학교에서 근무하던 도코 도시에는 그녀가 가르치던 부유한 조선인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갔는데, 한때 자식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였기에 조선인부모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잘 대해주었지만, 고용주가 신경을 써줄수록 그녀의 마음은 아팠다.
일본본토의 상황이 조선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나을것이 없었고(미군 공습을 있는대로 처 맞고 전쟁말기에는 일본내 공출도 악랄하기 그지없었다고함) 연고도 없었기에 돌아가기를 꺼려하던 일본인들도, 결국 일본인들의 재산을 군정에서 모두 거둬들인후 조선인에게 돌려주는 적산법이 시행되면서 귀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고국이라고 돌아간 곳에는 고국이 없었다
1947년 1월 겨울. 오사카의 어떤집에서 22살 일본여인이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다키카와 야쓰오라는 이 여성은 1945년 11월.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거처할 곳이 없어 수소문 하던끝에 친척이 사는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원래 이 집에는 미쓰이씨 가족 5명이 살고 있었는데 다키카와의 가족은 8명이였기에 좁은집에 느닷없이 13명이 살게되었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두 집안에 다툼이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가뜩이나 패전으로 본토인들도 살기 빠듯한데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다키카와는 자살 했다.
1947년 겨울. 도쿄역 임시귀환자 수용소는 본의아니게 반영구 수용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용소는 대충지어진 임시건물에 바닥에 깔린 거적이 전부였는데, 귀환자 출신 어린이가 수용소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본토 어린이들에게 "외지에서 굴러들어온 거지새끼!" 라는 놀림을 받게 되면, 수용소로 돌아와 부모를 붙잡고 원래 살던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울음을 터트렸다.
1946년 여름부터 조선뿐만아니라 중국. 동남아에서 귀환하는 귀환자들이 본토에는 거의 없는 풍토병을 달고 들어오는 경우가 발생했다.
"조선, 만주에서 돌고있는 전염병으로 콜레라 페스트 발진등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본토인들이 귀환자들에게 온정을 베푸는것은 옳은 일이지만, 귀환자들과 접촉할때는 위생에 각별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것이 당시 일본언론의 보도행태였다. 전염병 세균 덩어리 취급을 받고 있었던것이다.
"귀환자로써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어떤때였습니까?"
"... 너희들이 외지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수탈하고 억압하면서 언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니, 이제 천벌을 받는것이다. 라는 조롱을 들을때 였습니다."
1930년대 만주국에 살던 일본 여고생들이 도쿄로 수학여행을 가서 제일 충격 받았던 게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죄다 일본인들이 하고 있다는 것임.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인력거를 끄는 일본인 노동자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고 함 본래 그런 일은 전부 중국인들이 하는 천한 일인데 일본인이 하고 있어서 엄청 충격 받았다고 즉 조선과 만주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얼마나 풍족하고 떵떵거리면서 살았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음.
당시 본토는 화족들이 많아 아직 신분제를 크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도 한 몫하는데 외지인 조선과 만주는 그런 경우가 적었기 때문에 일본인 입장에서는 거진 다 평등했다고 함 대신 그 허드렛일을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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