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식 아닌 사랑
생물학에서는 유성생식을 하는 모든 생물의 ‘사랑’을 ‘생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생식’은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타성과 만나 자손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생물학에서 사랑이란 우월한 이성과의 섹스를 통해 더 나은 자손을 생산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을 ‘무생물’이라 표현하는 모 생물학자의 사고방식에서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는 보편적으로 대학생의 금전적 결핍이 사실일 때, 상호간 결핍을 겪는 이들의 사랑이 임시적일 수밖에 없음에 동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생물의 유전자와 유사하게, 한 개인의 재산적 부유는 평생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기인하여 오늘날 인간의 우월한 유전자란 뛰어난 육체적 능력 및 외모 뿐 아니라 재산으로도 환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성은 돈이 많은 이성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그 재산의 영향력은 그 개인의 우월함으로 생각 될 수 있을 것이며 (돈이 많음을 추구하는 우리를 인정하는 하여 뒷바침 할 문구).
하지만, 나는 앞서 언급한 관점에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한다. 사랑에 대해 인간과 기타 하등 생물에 대해서 같은 개념을 적용시킬 수 있는가? 앞서 생물학에서 사랑의 정의가 생식, 그리고 유전적 우월성을 추구한다고 밝혔지만, 필자는 이를 인간 하등의 생물에서의 정의로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사람이 지나는 길섶에서 개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서 짝짓기를 하는 모습, 풀 위의 메뚜기가 짝짓기를 하는 모습을 우린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지만, 청운관 앞에서 짝짓기를 즐기는 학생들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다. 이 저급한 예시를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기타 하등동물과 구별되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것을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사랑’에 대해서도 기타 생물과 다른 인식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울 때에 얇은 옷을 입으며 날이 추워지면 외투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언제나 위기감을 꺼려하며 안정감을 원한다. 이는 모두 하등 동물과 같은 본능적인 추구이지만, 더울 때에 더 뜨거운 음식을 먹기도 하며 추울 때에 찬물에 뛰어들기도한다. 배가 고프지만 먹을 것을 자재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위험에 내모는 스포츠를 즐기기도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이성을 통해 우리의 생을 본능에 반하여 개척하고 즐기며 구현해 나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우린 본능적으로 우월한 타성을 찾는다. 한 남자가 잘생기고 키가 크다는 인식, 지나가는 여성이 예쁘고 다리가 곱다는 인식은 모두 우리가 본능적으로 그들의 유전적 우월성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우월한 사람을 찾듯이, 내 자손도 그 우월한 유전자에 매료 될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린 반드시 그 우월한 유전자에만 매달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젊고 고운 여성이 외모가 뛰어나지도, 재산적 부유함도 갖추지 못한, 심지어 자손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도 모를 나이 지긋한 교수나 시인 등과 같은 사람과 연을 맺는 경우를 숫하게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를 보고서 우리 인간이 모두가 유전적 우월함을 따라간다고 생각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예시이며, 더 우월한 유전자를 추구하지 않고, 이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짝을 찾은 부부의 예시는 어디에나 있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자신을 만족시켜 주었을 것이며 그와 함께하는 것을 행복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를 정신적 사랑의 맺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글쓰기의 주제는 사랑과 돈의 등가교환 관계이다. 필자의 글은 결론적으로, 사랑과 돈을 등가교환으로 여기는 사랑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에 반하는 정신적, 이성적 사랑도 분명히 존재함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나의 가슴을 떨리게 했던 연인의 말과 목소리가 어느날 대수롭지 않고 따뜻했던 손이 그저 미지근한 살덩이로 느껴지더라도, 그가 내게 내어준 시간과 마음, 위로가 어떻게 무의미 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