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제기]
이 자료의 가장 큰 허점은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하는 차별과 억압을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여성과 남성이 공통적으로 당하는 차별과 폭력’에서 남성의 피해 경험만을 의도적으로 추출해 부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젠더의 영역이 아닌 사회 문제를 젠더의 영역으로 억지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료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피해자다! 그러니 여성만이 피해자라고 말하지 마라!” 그러나 페미니즘은 여성 개개인을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여성 젠더를 피해자로 만드는 남성 중심 사회의 성차별 구조를 문제 삼는 것이 페미니즘입니다.
사람은 다양한 차별 구조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차별은 한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종차별, 장애인차별, 성소수자차별, 청소년차별, 노동자차별 등등 젠더의 영역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차별 구조들이 존재합니다. 이 자료에서 부각하는 남성의 피해자성은 죄다 젠더의 영역과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반박]
1. 교육 분야
교육 시스템에서 여성이 더 높은 학점을 받거나 대학에 더 많이 진학한다는 사실은 남성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차별도 입증하지 못합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산점을 주거나 학비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이공 계열에서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수한 ‘배제와 차별’과 맞서야 합니다. 여성의 높은 학점과 높은 진학률이 아니꼽다면 그만큼 남성이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되지 차별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개인의 노력과 관련된 문제지 젠더의 영역이 아닙니다.
2. 노동 분야
3D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남성들이라는 사실은 거꾸로 말하면 3D 업종으로 이윤을 챙기는 자본가들이 주로 남성을 채용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남성의 육체적 능력이 대부분 여성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일을 더 짧은 시간 안에 해치워야 이윤은 증가합니다. 자본가의 입장에선 성능 좋은 도구를 써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싶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3D 업종의 남성 노동자 편중은 자본가들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전략의 결과지 여성이 힘든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여성이 3D 업종에 지원한다고 해도 사측에서 먼저 거부하거나 남성 중심적 분위기의 일터에서 밀려납니다.
게다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도 자본가들이 비용을 더 들이기만 한다면 깨끗한 환경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들 대부분은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 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을 위한 비용을 이윤과 대척점에 있는 ‘낭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물음은 ‘왜 남성들만이 3D 업종에 종사하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왜 3D 업종 노동자들의 인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가?’
이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문제지 젠더의 문제는 아닙니다.
3. 범죄 분야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가해자가 누구인가?’입니다. 성폭력이든 폭행이든 여성 대상 범죄의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입니다. 여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의 표적이 된다’는 현실이지 남성 젠더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조차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자친구를 택시 태워 보내며 택시 번호판을 적는 남성도, 딸이 늦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행금지 시간을 정하는 남성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고 강요하는 남성도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아닌 또 다른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가해자의 표적이 된다면 이는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이자 사회 구조적으로 벌어지는 범죄입니다. 그러나 남성이 범죄 피해자인 통계에서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된 남성을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대검찰청 범죄 통계를 뒤져 보면 알 수 있듯 성폭력이든 폭력이든 가해자의 비율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즉 남성인 피해자들은 남성 가해자들의 폭력에 당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남성혐오’ 범죄일까요? 정말 그렇다면 남성도 밤길 걷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혼자 택시를 타지 못해야 합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언제 피해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남성이 범죄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그가 ‘남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가 ‘다른 이유’로 그를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원한이나 치정 문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로 짝지어지는 범죄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을 동시에 따져 볼 때 젠더라는 관점은 의미가 생깁니다. 단순히 피해자의 성별만으로는 아무것도 입증해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남성 피해자들의 단순 수치는 젠더의 영역이 아닙니다.
4. 그 외 분야
이 자료에서 언급된 그 밖의 통계들은 하나같이 낯 뜨거운 것들뿐입니다. 자살의 78%가 남성? 교도소 수감 인원의 93%가 남성? 평균 60% 더 긴 감금형? 노숙인의 60%가 남성? 현역 군인 85%가 남성? 여성보다 남성이 평균 수명이 더 짧다? 이 모든 통계들은 남성의 피해자성을 부각하기 위해 사회 구조적인 문제들을 배제해 버린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자살의 78%가 남성이라는 사실에서 짚어야 할 것은 그 많은 남성들을 자살로까지 몰고 간 사회 구조적 원인이지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이 자살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교도소 수감 인원의 93%가 남성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남성이 범죄에 더 많이 노출돼 있다는 뜻이고, 평균 60% 더 긴 감금형은 불합리한 사법제도의 문제이자 정말 '남성'이기 때문인지 검증되지도 않았으며, 현역 군인 85%가 남성이라는 수치에 대해선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여성을 거부하는 분위기라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 모든 것들은 죄다 젠더의 영역이 아닙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이 감당해야 하는 피해가 아니라 다른 사회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이 자료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차별과 폭력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희석시킴으로써 남성이 성차별 구조의 가해자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눈속임입니다. ‘조삼모사’나 ‘아전인수’라는 사자성어가 어울릴 것도 같습니다. 겉으로는 해외의 저명한 학자의 발언처럼 꾸며져 있지만 실은 각종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리석은 얘기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성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성이 피해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적 차별 기제와 폭력은 분명 존재합니다. 페미니즘이 문제 삼는 것은 남성들 개개인이 아니라 바로 그 남성 중심적 차별 구조입니다. 남성들은 이런 자료를 통해 스스로를 피해자라 가장하면서까지 성차별 구조를 은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여성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공연히 페미니즘 탓을 할 시간에 자신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억압이 누구의 손으로 어떤 권력을 통해 자행되는지 정교하게 사고해야 할 것입니다.
남성도 분명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여성에 비해 극히 적습니다. 이 간단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마 자신이 겪는 모든 억울한 일들은 죄다 여성들 탓이라는 피해망상에 평생 사로잡혀 살게 되겠지요. 그런 삶이 어떤 파국을 맞게 될지는 최근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범이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자료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발언이 나옵니다.
“남성의 특권에 대한 이 씁쓸한 수사법을 그만 내버리고 서로 좀 더 내통하고 친목합시다.”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현장에 일베 회원이 들고 나온 ‘남녀 서로 친하게 지내요’라는 피켓과 다를 게 없는 말입니다. 오직 가해자들만이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을 잊어버리거나 얼버무린 채 피해자들에게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평화’란 가해자들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펌 바람계곡의페미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