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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가 아이에게 유리한가?>
‘한국아동패널’이란 종단연구가 있다. 2008년부터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장기 아동 추적 관찰 프로젝트다. 아이들을 출생 시기부터 모아서 추적 관찰하면 아동의 성장과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인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연구에서는 이런 종단 연구가 정말 끝판왕인데 벌써 이 연구가 9년 차 이상 진행되었다. 최근 이 연구의 초기 분석 자료들이 공개되고 있는데 유아기 발달에 부모가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흥미 있는 부분이 많다.
아버지가 어떤 양육 태도를 갖고 있을 때 아이의 발달에 가장 유리할까? 이에 대한 질문을 하면 답변은 다양하다. 전통적인 아버지 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따뜻하고 친구같은 아버지가 좋다는 사람들도 있다. 실증적인 자료는 과연 어느 쪽 손을 들어줄까? 마침 한국개발연구원의 김인경 박사가 작년에 ‘한국아동패널’ 자료를 활용하여 ‘우리나라 영유아발달의 결정요인과 정책적 함의’라는 보고서를 낸 바 있다. 여기에 부모의 양육 태도가 아이의 발달과 정서 상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연구에서는 부모의 양육 태도를 온정성과 통제성으로 나눠서 분석하였다. 온정성은 36개월 이전에는 아이와 놀며 시간을 보냈는지, 아이가 힘들거나 불편해보이면 즉각 적절히 대처했는지, 아이에게 긍정적이고 따뜻한 관심을 보였는지, 아이의 행동에 융통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았다. 36개월 이후에는 아이와 친밀한 시간을 가지는지, 아이의 의견을 중시하고 표현할 기회를 주는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놀아주는지, 가족 규칙을 아이와 함께 정하는지, 아이의 질문에 잘 설명을 해주는 지로 측정하였다. 통제성은 아이가 어려도 엄격하게 예절을 가르치는지,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반드시 벌을 주고 반성하게 하는지, 아이가 부모의견에 반드시 순종하게 하는지, 지켜야할 규칙을 정하고 아이가 지키도록 하는지, 가정교육을 위해 아이의 행동을 제한하는 지로 평가하였다.
양육 태도는 온정성과 통제성이 둘 다 높은 경우도 있고 (권위적 부모), 온정성은 높지만 통제성은 낮은 경우도 있고 (허용적 부모), 통제성은 높지만 온정성은 낮을 수도 있다 (권위주의적 부모). 연구는 아버지, 어머니의 양육 태도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보고, 그에 따른 아이의 발달과 문제 행동을 분석하였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의 통제성이 높은 경우 아이의 발달은 좋지 않았다. 아이에게 문제 행동도 더 많이 나타났다. 아이의 수용 어휘력(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의 수)은 온정성이 높은 아버지에게서 더 높았고, 온정성이 높은 아버지 중에선 통제성이 낮은 경우에 어휘력이 좋았다. 덜 통제하고, 아이 입장을 더 많이 받아주며 교류하는 아버지가 아이의 언어 발달에 가장 좋았다. 재미난 것은 어머니의 경우에는 표현 어휘력(말할 수 있는 어휘의 수)과 양육 태도의 상관성이 있었는데, 아이가 36개월 이전에는 온정성과 통제성이 둘 다 높을 때 언어 발달이 가장 좋았다. 즉 아이에게 제대로 반응하고 관심을 보인다면 규율을 분명히 세우는 어머니가 유리한 것이다. 다만, 어머니도 36개월 이후에는 온정성이 높고, 통제성은 낮은 경우가 아이의 언어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이의 문제 행동 역시 아버지의 통제성이 높은 경우 일관되게 나쁘게 나왔다. 우울이나 불안 같은 내재적 문제 행동이든, 과잉행동과 충동성과 같은 외현적 문제 행동이든 모두 아버지의 통제성이 높을 때 더 많이 보였다. 아버지가 엄격하면 아이의 문제가 줄어들 것 같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아이의 문제 행동이 나타날 확률이 가장 낮은 그룹은 온정성이 높고, 통제성은 낮은 아버지였다. 친구같은 아빠가 아이에게 가장 유리한 셈이다. 재미난 점은 아버지의 양육 참여 빈도와 아이의 문제 행동은 큰 관련이 없었다. 아이를 많이 돌본다고 아이가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적게 보더라도 제대로 돌봐야 하는 셈이다. 또 아버지의 소득이나 학력도 관계가 없었다. 오직 아빠의 양육 태도만이 아이의 문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였다.
아이 입장에서 아버지는 무섭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남자는 조금 더 힘이 세 보인다. 키도, 몸집도 큰데다 목소리는 굵고 표정은 강하다. 젖을 주고, 늘 붙어있던 어머니에 비해 접촉 빈도가 낮다 보니 친밀함의 정도도 낮기 마련이다. 친밀함이 바탕을 깔렸다면 엄한 표정을 지어도 수용하기 쉬운데, 친밀함이 약하다 보니 조금만 딱딱한 표정을 지으면 겁이 나기 쉽다. 자신을 공격하거나 배제하려는 느낌이 들어 두렵기 마련이다. 똑같은 수준으로 엄마와 아빠가 혼내도 아이들이 경험할 때 아빠가 혼내는 것이 견디기 더 힘들다.
이런 이유로 아빠들은 아이를 훈육할 때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위험성이 있을 때는 분명하게 통제를 해야겠지만 빈도가 높아선 곤란하다. 날선 칼은 함부로 뽑아선 안 된다. 두려움을 자극하면 아이들은 아버지를 피하기 마련이다. 그래선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아이에게 주지 못한다. 지금의 아버지들은 자애로우면서 권위를 지키는 아버지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엄격하게 하다 보면 그저 무섭게 대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에게 두려움만 줄 뿐 올바른 행동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한국아동패널’ 연구에서도 어머니의 통제성은, 적어도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의 문제 행동을 줄이는데 효과적이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이다.
적잖은 아버지들이 아직도 엄한 아버지가 아이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이 아이들의 인성이 바르게 자라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 그저 아버지 권위에 대한 향수에 불과하다. 시대가 변하면 양육 방식에도 변화를 줘야 하는데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실천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런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과거가 좋았다고 말한다면 상투 틀고, 천자문 읽는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강력한 가부장 사회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바깥일을 맡아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아이는 많이 낳았고, 아이들 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 결정할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는 저절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더 이상 아버지만 밖에서 일하지 않는다. 맞벌이의 비율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아이의 수는 줄어들어, 기껏해야 한두 명을 낳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간의 경쟁은 사라졌고 부모가 아이에게 끌려다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부장제 문화 역시 지속적으로 힘을 잃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아버지가 권위를 높이려고 애를 쓰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에게서 심리적으로 멀어질 가능성만 높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가정에서만 경험하지 않는다. 다양한 매체에서 간접 경험하고, 친구의 가족 관계를 관찰하며 경험하고, 교육기관의 활동에서 경험한다. 그렇게 경험한 아버지 상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버지 모습과 비교하게 된다. 과거라면 아버지가 무섭다고 해도 다른 집 아버지도 대개는 무서우니 원래 아버지는 그런 존재려니 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또, 과거에는 아버지가 무서워도 아버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말을 안 들으면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권도 강했기에 아버지에게 잘못 보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을 생존의 위협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에게 의지하면 되고, 유치원 선생님 등 다른 의지할 수 있는 어른들이 있다. 게다가 형제가 사라지니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자신과 경쟁할 대상은 없어졌다. 반면 아버지는 아이가 사랑을 주지 않으면 자식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제 아쉬운 사람은 아버지가 되었다.
요즘에는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권위를 높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저 아버지가 자기에게 잘 해주면 아버지를 사랑하고, 잘 해주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배우지 못한다. 아버지들은 아이를 가르치려고 무서운 사람 역할을 하지만 아이들은 무서운 아버지에게 배우지 못한다. 그저 상처만 받는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아버지들은 조금은 더 부드러워져야 한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 좋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좋다. 이왕 아이를 낳았으면 아이에게 사랑받는 부모가 되는 편이 낫다. 자식 키워서 얻을 수 있는 만족이라고 해봐야 이젠 그것이 전부다. 자식은 더 이상 재산도 아니고, 나중에 받을 효도를 기대한다는 것은 한겨울의 감나무를 지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출처 | 서천석의 마음연구소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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